#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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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올까요?
아이고,
규태는 속으로 머리를 쳤다.
이 아가씨가 끝내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이었다. 캐서린이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규태가 여자에 관심이 없는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카사노바였다.
여자만 봐도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예전에는 이걸 잘 써먹어서 바람둥이로 살았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여자들과의 만남에서 처음부터 정색을 하고 다가오지 않게 하려 했었다.
사실 성격문제만 제외하면 캐서린을 깔 건더기가 벌로 없었다.
외모도 사나와 보이는 눈매가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금발의 푸른눈에 몸매도 운동을 해서인지 탄력이 넘쳐 흘렀다. 외모만이 아니라 대화도 곧잘 통하는 상대였다.
“지금은 할 말이 없네요. 나중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이 말을 남기고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지금 맞부딪쳐봐야 답이 안 나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전에 농담처럼 주고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캐서린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보스는 나쁜 사람입니다.”
어느 사이 다가온 강현이 투덜거렸다.
이놈의 회사는 사주가 무섭지도 않은지 만난 놈마다 시비였다.
“강부장은 또 왜 그래요?”
“캐서린 대표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보스를 담아두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 그래서요?”
“마음을 빠르게 정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이제 캐서린도 지쳤는지 조만간에 마음을 정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이건 유구무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규태가 캐서린에게 희망고문을 했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규태가 캐서린의 대시에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 비치며 슬그머니 피했을 뿐 정작 여자를 따로 만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있으면 유부남의 입장에서 나한테 충고를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 딱히 해드릴 말은 없네요.”
강현이 화가 나서 용감하게 나섰지만 또 결혼 5년차인 처지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겉으로는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술먹여 놓으면 결혼전으로 돌아가고들 싶어하더라.
마음이 싱숭생숭하니까 경기를 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저스가 3승 1패로 월드시리즈를 앞서나가도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오죽하면 평소에 애 취급을 하는 동생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까.
“그러니까 내 귀에는 형도 마음이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들리냐?”
나이를 먹어도 남자는 애다. 규태도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수많은 사건사고를 쳤었다.
그래서 막내동생에게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았을 때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답변이 나왔다.
“아니 형이 어떤 성격인거 뻔히 아는데, 마음이 없었으면 아예 처음부터 아니라고 잘라냈을거 아냐.”
“.......”
“형 보기보다 냉철한 사람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잖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군대가기 전 대학교 다닐 때 확 변해서 딴사람인줄 알았다니까.”
“내가 그랬냐?”
“엄마, 아빠 돈 가져가서 주식투자했을 때 말이야. 난 처음에는 형이 미쳤는지 알았다니까 저러다 집안 말아먹을까 싶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누나 돈까지 가져가서 주식한다는 소리 듣고는 우리집안 장남이 드디어 돌았구나 했다니까. 하여간 그때부터 형 조금 변했어. 그전까지 내가 형한테 개겨도 허허하고 넘어가는데. 그때부턴 아니었어. 뭐랄까? 내가 덤비면 X되겠다! 이런 느낌? 하여간 그랬어.”
당연한 소리였다. 겉모습은 몰라도 규태가 먹은 연륜이란 게 잇는데 그 연륜의 대부분이 아수라장 같은 월스트리트였다. 거기에 말년에는 거침없이 덤벼드는 조직의 히트맨들을 피해다니면서 많은 피를 보기도 했다.
온실속 화초와 비슷한 동생 녀석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기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동년배 사이에선 주먹 좀 쓴다고 깝쪽대봐야 한주먹거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형이 캐서린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면 나하고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란 거지.”
규태는 잠시 스스로의 마음속을 되짚어 보았다. 동생의 말처럼 자신도 캐서린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형, 캐서린이 다른 남자하고 사귄다면 어떨 거 같아?”
“괜찮지 않을까?”
잠시 규태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동생이 말했다.
“아니 그렇게 쉽게 쉽게 말하지 말고 조금 더 심사숙고한 다음에 말해봐.”
조금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더니 가만히 캐러린의 옆에 다른 남자놈이 희희덕거릴 것을 떠올리자 이유없이 가슴이 뛰었다. 뒷골도 조금 아픈 것 같고.
“...... 기분이 나쁠 것 같다.”
“그게 형 진짜 마음이라니까.”
동생의 말에 규태가 진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통기한 3년짜리 감정에 또다시 휩싸여서 인생을 거는 도박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진짜 엿됐다.”
규태의 겉모습은 이제 막 서른에 접어든 애송이지만 알맹이는 백년을 넘게 산 괴물이 숨어 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규태의 목이 달랑거리지 않았다면 늙어서 이리저리 거처를 빠르게 옮겨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나이를 먹게 되면 사랑이란 감정을 쉽게 믿지 않게 된다.
수없이 많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속마음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굳이 사랑이란 감정 말고도 우정이니 가족애니 하는 것들도 쉽게 믿지 못하는 상태로 접어든다.
특히나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더 믿지 못하게 된다.
여자와 사랑을 하는 감정의 낭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골치가 지끈거렸다.
5차전 경기에서 다저스가 승리를 거두며 3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거두었음에도 규태는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하나도 즐겁지 가 않았다.
그게 겉으로 드러났는지 제리가 걱정을 했다.
“왜 그래? 요즘 얼굴이 좋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다.”
“머리가 복잡할 이유가 뭐야? 다저스가 우승도 했겠다. 사업도 잘되고 있잖아?”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해서 고민이다. “
“어떤 미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규태는 애써 무시했다.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해주면 감사합니다 해야지. 어디서 고민질이야.”
우승 축하파티에서 벗어나 단둘이서 하는 조촐한 축하 술자리에서 제리가 규태의 뼈를 때렸다.
“너 인간 불신증이잖아.”
“내가 뭐 어때서? 나처럼 사람을 잘 믿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규태처럼 일을 전적으로 맡겨놓고 돌아보지 않는 사주도 드물었다. 다저스만 해도 어지간한 건 제리에게 전부 맡겨두고 간섭하지 않는가 말이다.
“내말은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관계를 믿지 못하는 증상이 있지 않냐?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이나 우정이나 하는 것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가득한 것 같은데? 내말이 틀렸냐?”
제리는 규태가 가장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사적인 이야기까지는 깊게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규태의 속마음을 짐작했다.
“너 대학에서 심리학 전공했냐?”
규태의 말에 빈 술잔을 채우던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했었나?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공부했지. 나중에 제법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
“하아, 그래서 내가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이 깊다?”
“그것도 병이야. 만약에 네가 한 백 살 넘게 살아서 수많은 경험을 했다면 모르지만 그러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너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끔 네 나이를 헷갈린다니까.”
듣던 규태의 가슴이 뜨끔한 소리였다.
“하여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염세적이라고 느꼈었지. 사실 네가 돈 맣은거 빼면 어떤 제대로 정신 막힌 여자가 덤벼들겠냐? 사귀면 염세적인 냄새가 풀풀 날 텐데. 설마 너 돈보고 덤벼드는 정신 나간 여자는 아니지? 도대체 누구냐 그 용감한 여자가? 나도 정체를 좀 알자.”
확실히 제리의 말은 규태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면서도 규태를 좋아한다는 캐서린의 정신 감정을······ 흠흠!
“캐서린 그린.”
“캐서린? 내가 아는 그 캐서린?”
“그래 네가 아는 캐서린.”
“와아!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거의 성모 마리아네.”
“......”
“그 여자면 가지고 있는 돈도 많을 테니 돈 보고 덤벼드는 건 아닐 테고? 이거 혹시 직장 내 성희...“
“거기까지 그 다음이야기를 내뱉으면 생명을 장담하지 못한다.”
농담처럼 내뱉었지만 친구간에도 함부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리가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캐서린이 그런 거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면 누가 믿겠냐? ‘
“하긴 그 여자 소문대로라면 그럴 리가 없지?”
“무슨 소문?”
“넌 못들었냐? 매덕스가 장난쳤다가 거의 죽을 뻔했다는거?”
매덕스는 젊잖게 생겼지만 외모와 다르게 장난이 심한 악동이었다.
“처음 듣는데?”
“하긴 이런 건 남들이 들어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쉬쉬하고 넘어갔지.”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라.”
“매덕스가 투자 때문에 타이거 벤처에 갔다가 우연히 캐서린하고 만나 겁 없이 장난쳤다가 죽을 뻔 했다고 하더라.”
“이해가 되기 하는군. 죽지 않은 게 다행이겠군. 아니 메이저리그 투수라고 많이 봐준 모양이다.”
매덕스의 장난기는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때로는 남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악의가 담긴 장난질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하지만 상대도 봐가면서 해야지.
캐서린은 메이저리그의 에이스라고 봐주는 성격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남자이자 메이저리그 선수답게 큰 덩치를 가진 매덕스가 캐서린과 싸운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그 정도야?”
“캐서린이 고등학교 때부터 무에타이를 배웠어.”
“그 태국에서 하는 얍얍하는 운동?”
그래도 본게 있는지 제리가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를 냈다.
“응, 듣기론 하도 주변에서 치근덕거리고 집적거려서 짜증이 나서 시작했다고 했는데 적성이 맞아서 대학 때도 따로 배웠다더군. 그리고 전문가에게 따로 시스테마란 것도 배웠을걸.”
“그게 뭔데?”
“러시아에서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들이 배우는 격투술.”
“우와!”
“그러니까 매덕스는 많이 봐준 거야. 어디 부러진 곳 하나 없이 넘어갔으니까.”
에이스 투수가 밖에서 부상을 입었으면 꽤 큰 소동이 벌어졌겠지만 멀쩡했으니까 쉬쉬하고 덮었겠지.
“넌 괜찮은 거냐?”
“뭐가 괜찮아?”
“그런 여자가 좋아한다면서? 둘이 잘돼서 결혼이라도 해봐. 부부싸움을 하다가 잘못하면 넌 맞아 죽을 거 아냐?”
이런 제기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규태였다.
자칫 잘못하면 결혼하고 나서 매 맞는 남편이 될 대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