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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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갔던 탕아가 돌아왔군.”
“제가 탕아란 말은 너무 심하잖아요.”
미국으로 돌아온 규태를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낸 리처드였다.
“그럼 탕아가 아니고 뭔가? 자네가 도망간 바람에 내가 얼마나 난처했는지 아나?”
“남아 있었으면 난처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리처드는 앨런이 금리를 올릴거란 걸 알았나요?”
“아니 그렇지는 않네.”
“그럼 끝났잖아요. 재무장관도 백악관 경제정책보좌관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냈겠어요.”
월스트리트에서 떠돌아다니는 리처드와 규태의 내부정보 거래이야기는 여전했다.
돈을 잃은 놈들은 화풀이 할 상대가 필요했으니까.
“그래 머저리들이 불평을 늘어놓아봐야 누구도 믿지 않으니까. 은행 몇 개하고 투자은행, 헤지펀드까지 골고루 날아가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군. 그런데 이젠 카운티까지 말썽이야.”
어지간히 시달리는지 리처드의 얼굴에 살이 빠졌다.
“저런! 어디가 말썽을 부리던가요?”
“알면서 모르는 척 하기는. 오렌지카운티가 파산위기라네.”
“챕터9를 신청할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나보군요.”
“추정되는 손실금액이 20억 달러가 넘어간다네.”
메릴린치와 오렌지카운티 재정집행관의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된 파생상품투자는 300%에 가까운 레버리지를 이용한 투자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카운티의 재정집행관 시트론이 투자한 파생상품규모는 60억 달러, 이게 잘못되면서 지역정부는 3000명이 넘는 인원을 구조 조정해야 했다.
“참 투자은행에서 별 상품을 다 만들어 팔아먹네요.”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거래였지만 그동안은 10%가 넘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면서 한때 재정집행관 시트론은 오렌지카운티의 현인이라고 불렸다.
일이 잘못된 것은 예상하지 못한 금리인상으로 금리선물투자가 타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순식간에 마진콜을 당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결국에는 챕터 9(파산)를 신청한 것이다.
“이게 투자 규제가 미흡한 탓이지.”
지방정부의 금융상품투자를 막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했다.
“규제가 가능할까요?”
미국은 나라명칭에 연합이란 이름을 넣을 만큼 지방정부의 자치권이 강한 나라다.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울 지방정부가 쉽게 나올까 싶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한국은 꽤 시끄럽더군.”
“그러게 말입니다.”
95년 여름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 사태가 일어났다. 규태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백화점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여주는 TV를 보고서야 기억해냈다.
230억 달러에 달하는 규태의 투자가 한순간 잊힐 정도로 한국은 한동안 삼풍으로 인해 시끄러웠다.
“나도 그걸 듣고는 자네가 한국에 머문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네.”
“전 다른 도시에 머물렀는데요. 전혀 상관이 없었죠.”
“그래도 내가 자네 걱정을 한참동안 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내 걱정을 귀찮다는 듯 가볍게 넘어가지 말라고.”
이렇게 자꾸만 말이 길어지는걸 보면 부탁할게 있다는 소리였다.
“원하는 게 뭔가요?
“자네가 점을 좀 쳐줘야겠네.”
“점이요?”
규태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기분 좋게 지켜보던 리처드였다.
“자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유명한 주술사가 아닌가.”
“리처드까지 그렇게 말할지는 몰랐네요. “
월스트리트에서 규태는 좋게 말해서 오라클이라고 불리지만 그로 인해 손해를 입은 사람들이 부르는 말은 주술사였다.
한마디로 사이비 점쟁이 같은 놈이란 뜻이다.
“클린턴이 요즘 여간 걱정이 많은 게 아니거든.”
“아! 내년이 대선이지요.”
“그래 대선은 내년으로 다가왔는데 경제는 엉망이지 않나.”
95년 대선이 다가오자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에선 작년의 경제혼란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자칫 미국경제가 계속 어지러우면 대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는 중대사였으니까.
“이젠 금리인상도 끝났으니까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도 더 이상은 혼란스럽지가 않잖아요. 앨런도 이젠 확실하게 시그널을 줘야 한다는 걸 알았을 테고요.”
“정말 그럴까? 앨런이 보통 고집이 아니지 않나.”
“한번 호되게 겪었는데 또 그러겠어요. 사실 앨런도 고민이 많을걸요. 예고도 없이 금리 인상했다가 뜨거운 맛을 봤으니까요. 다시 그런다면 이번엔 자리에서 내려와야죠.”
임기가 있다고 하지만 94년 내내 금리를 올린다는 건 중간에 잘릴 수도 있었던 고집스러운 금리결정이었다.
시장의 예측과 전혀 다른 금리결정을 내렸을 때 어떻게 된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으니 조심스럽게 금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전임 재무장관인 로버츠와 충돌하면서까지 금리를 인상했지만 또 다시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이번에 경질 대상이 되는 건 앨런이 될 것이 자명했다.
“하긴 그렇긴 하지. 빌도 금리인상 때문에 꽤 짜증을 냈거든.”
이건 리처드도 인정하는 바였다.
대선이 다가오는데 갑작스런 금리인상이라니 정치인이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미국경제는 계속해서 잘나갈 거니까 걱정마세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첨단 기술주들의 성장세에 불이 붙기 시작할거거든요.”
닷컴버블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금리인상이 마무리되면서 갈 곳을 잃은 뭉치자금들이 캘리포니아의 벤처기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수많은 창업자들이 저마다 회사를 만들고 키워나간다.
“또 IT기업에 자금이 몰려든단 말이지? 그건 조금. 걱정이구만.”
이미 한번 호된 맛을 보아서인지 리처드의 반응은 크게 좋지 않았다.
“첨단 산업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경쟁력을 가지는 부분이니까요.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망 있는 IT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지는 않을 겁니다.”
“IT기업들은 너무 거품이 심해. 93년에 오른 주식들은 하나같이 적자를 보면서 주가만 오르지 않았었나.”
리처드의 반응에 규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품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걷히게 될 테고요.”
“난 IT기업들이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아. 주가가 오르기는 하지만 너무 도박성이 짙거든. 성장한다고 해도 고용효과도 크지 않고.”
이건 규태도 인정하는 바였다. 미국경제의 가장 큰 골치 아픈 문제 중의 하나가 높은 실업률이었다.
“IT기업의 고용률이 제조업에 비할 수는 없죠.”
“하여간 자네가 미국경제가 성장을 지속한다는 말을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군.”
미국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서 경제성장이 지속된다는 소리보다 기쁜 이야기는 없었다.
쌍둥이 적자나 실업문제같은 미국경제의 모든 문제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제일 걱정하던 문제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는지 리처드는 한결 여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한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두 사람이 모두 아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왔다.
“워렌은 한동안 바빴던 것 같던데요?”
“골칫덩이를 넘기느라고 동분서주를 했었지. 그동안 골머리를 썩였던 살로몬을 트래블러스에게 넘겼으니 이젠 오마하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걸.”
미국에 있을 때는 여러 가지 투자문제와 겹치면서 만남이 잦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뜸한 상태였다.
“진짜 투자문제라면 워렌을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네요.”
살로몬을 트래블러스에게 떠넘긴 건 정말 규태가 보기에도 정말로 감탄 할 만했다. 자신 이였다면 그냥 깨끗하게 살로몬 투자지분을 손절처리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규태의 감탄에 리처드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남들이 비웃을 거네. 특히 워렌이 기분나빠할걸. 자네였다면 아예 살로몬에 투자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긴 하겠지요.”
이건 규태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규태가 달리 월스트리트에서 오라클이라 불리겠는가. 처음에는 일부 직원들의 입에서 떠돌던 이야기는 점점 월스트리트 전체로 퍼져나갔다.
“루드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데.”
“신혼이나 즐기면 그만이지 전화는 뭐 하러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인과 결혼한 후로 신혼재미에 푹 빠졌는지 귀찮을 정도로 연락하던 루드와도 자주 통화를 하지 않았다.
리처드와 루드 두 사람은 크게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중간에 규태가 끼면서 자주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젠 신혼에서 벗어났나 보지. 결혼한 지 일 년이 넘지 않았나.”
“하긴 루드가 한 여자만 보고 살기에는 피가 너무 뜨겁죠.”
“루드도 나이가 있는데 그렀기야 하겠나?”
루드와 제인, 두 사람은 십년간 살다가 헤어진다. 이미 똑 같이 살아본 규태의 입장에선 충분히 루드의 행동이 이해가 되긴 했다.
“그럼 앞으로 두 사람이 잘 사는지 내기할까요? “
규태의 말에 리처드가 이마를 찌푸렸다.
“내기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네. 그런 내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제가 생각할 때도 그러네요. 두 사람이 앞으로 쭉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말이 많은 떠버리에 허세가 심하기는 하지만 규태는 루드가 싫지 않았다.
규태에게 원하는 답을 얻은 리처드는 바쁜 일정탓에 급하게 돌아갔다.
***
네스케이프의 인수로 시애틀로 잠시 떠났던 마크가 돌아왔다.
그리고 경쟁자인 제리를 보면서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찾기 위한 야망을 불태웠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넷스케이프 인수로 가장 많이 돈을 번 사람은 규태지만 마크도 만만치 않게 자산을 만들었다.
“잠시 쉬라고, 이제 막 돌아왔잖아.”
너무 열정에 불타는 마크를 규태가 만류했지만 제리에 대한 경쟁심에 불타는 마크를 막아서지는 못했다.
“역시 난 마이크로 소프트와는 맞지가 않았어. 거기에서 일을 하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고.”
“그 정도였어?”
“빌하고는 같이 일을 하는 게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어. 그 사람보기보다 엄청 깐깐하다고.”
빌의 외모만 보아서는 컴퓨터를 좋아하는 너드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능구렁이를 숨겨 두고 있었다. 밑에 직원들을 채찍질해서 실적을 만드는 솜씨는 왜 빌이 세계 최고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지 알게 만들었다.
마크는 규태와 함께 일을 할 때는 전혀 간섭을 받지 않았다가 위에 상사를 두고 일을 하는 게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이번 기회에 알게 됐는지 시애틀의 생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안타깝게도 마크의 이마가 점점 훵해지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여간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니란 걸 저절로 느껴졌다.
마크가 강한 경쟁심을 느끼는 제리의 야후는 한마디로 잘나가는 회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IT기업의 주가가 하락할 때도 제대로 버틴 몇 안 되는 기업 중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조정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95년 금리인상이 마무리 되자 주가 상승이 다시 시작되면서 전고점인 127달러를 돌파했다.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만들지 못해서 고민하던 지난 역사와 달리 규태의 조언을 들어 수익구조를 만든 야후는 타이거 벤처와 손잡고 새로운 스타트업 기업들의 지분투자에도 열심이었다.
가입자 수가 800만을 넘어서면서 폐쇄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유료서비스 기업인 AOL보다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시가총액이 2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먼저 규태와 손을 잡고 일을 시작했지만 후발 주자인 제리에게 밀려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마크의 모습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사업을 하고 싶은 건데?”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사업이 있더라고.”
마크가 규태에게 내민 회사의 이름은 옥션웹이였다. 만들어진지 한 달도 안 된 따끈한 기업이었지만 규태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었다. 사업 내용을 살핀 규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쓸만하기는 한데 이건 개인 웹이잖아? 사업구조가 너무 부실한데?”
“그러니까 투자를 해서 사업을 제대로 해야지. 이건 대박이 될 거라고.”
이미 확신을 가졌는지 마크는 거침이 없었다.
“그럼 비슷한 내용의 사이트를 만들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