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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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투자
“대주주가 15%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팔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단자사의 매도이야기가 대주주 측에서 나온 건 아니란 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투자를 해서 단자사를 인수받으려 한다면 오히려 추가매입을 통해 현재의 대주주자리를 지키려고 할 겁니다만 회장님이 나서신다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계산이 빠른가 보군요.”
돈지랄을 한다면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한다.
규태를 상대로 돈질을 해봐야 달걀을 바위에 던지는 격이다.
“단자사의 대주주라면 전직을 아시지 않습니까?”
“사채업자입니까?”
“예, 명동에서 전주를 하던 이인데 고향이 충청도였습니다. 지방단자사가 만들어지면서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서울에 본사를 둔 단자사와 달리 지방단자사에 투자한 이들의 자금여력은 한참 떨어진다.
“대전단자사의 실력이 그다지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 높게 평가할 이유도 없지요. “
200억짜리 단자사를 사들이려면 주당 10,000에서 12,000원을 줘야 했다. 500억 안쪽에서 전량 주식매입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거래되는 물량을 따지고 보면 50%선까지 주식을 매입하고 증자를 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규태가 결정을 내렸다.
“인수합시다.”
“...거기에서 태국 회사채도 상당수 가지고 있습니다.”
규태의 결정이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구봉만의 대답이 늦었다.
“단자사들 사이에 태국투자가 열풍 아닙니까. 내년까지 들고 있다가 처분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두 회사의 인수팀을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문이 돌면 주가가 올라갈 테니 주의를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야! 이 자식들 왜이래? 왜 우리만 쏙하고 빼놓는 거야!”
재계 서열 3위인 대운의 기조실장 김광섭은 회사채인수에서 자신들만 빠진 것을 듣고는 보고 있던 서류철을 집어던졌다.
“그게 신청한곳 중에 상당수가 퇴자를 맞았답니다.”
요즘 재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타이거 펀드의 회사채 인수였다.
15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들고 와 헬기로 뿌리다시피 국내 재계의 회사채를 인수했다. 5년짜리 자금이기에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받지 않으면 등신이란 소리가 나오는 판국이다.
당연히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대운의 회사채를 인수할 것이라 생각하고 자금 스케쥴을 잡아놨건만 예상하지도 못한 퇴자라니?
이러면 회장님께 큰소리를 친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되는가.
속이 타서 담배만 뻑뻑 피우던 김광섭이 기조실 재무본부장인 문영모에게 되물었다.
“어쩐 일인지 회사채인수를 요청한 몇몇 대기업이 물을 먹었답니다. 저희하고 기아, 삼보건설이 반려를 당했습니다.”
“그런 조그마한 회사하고 재계 3위인 우리가 같은 입장이란 말이야. 이 새끼들 진짜 우리만 물 먹인 이유가 뭐래!”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말을 하다 보니 이젠 머리에서 열이 확 솟구쳤다.
10대 재벌 중에 물을 먹은 건 기아와 자신들 만이었다.
기아야 기업덩치가 크지만 재벌이 라기도 뭐한 전문경영인이 맡고 있으니 진짜로 물을 먹은 건 자신들이 유일한 셈이다.
“아무래도 눈치를 보아하니 그놈들이 실제 우리 재무구조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문영모가 눈치를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놈들 본업이 투자은행 아닙니까? 우리 재무구조가 이상하다는 거죠.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뭐야! 그놈들이 설마? 우리 쪽에서 정보가 센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유럽에서 정보를 얻은 것 같습니다. ‘
“이런 제기랄, 그건 회장님도 신중하게 처리를 하라고 몇 번이나 지시하신 내용인데.”
대운은 80년대부터 회계처리를 하면서 이중장부를 작성했다. 최근 들어서 적자폭이 커지며 더욱 규모가 늘어났다.
밖으로 알려지면 난리가 날 엄청난 일이지만 그 정도를 안 한 재벌기업이 없으니 누구하나 시비를 걸지 않았다.
“대현건설의 회사채 발행도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대현자동차가 발행한 회사채는 받아주었으면서 말이죠.”
“제기랄 이건 이쪽 사정을 훤하게 꿰뚫고 있다는 소리구만.”
암암리에 쉬쉬하지만 대현건설이 이라크전쟁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을 분식회계로 가렸다는 것은 이쪽전문가라면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대충은 조 단위가 넘어가는 분식회계가 처리되었을 것이다.
속이 타서인지 피우는 담배 맛이 더욱 독했다.
피우던 담배가 끝이 보이자 다시 한 개비를 피워 문 김광섭이 문영모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 청와대에 달려가 봐야 좋은 소리가 나오지도 않을 테고?”
“회장님께서 나서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광섭의 얼굴색이 변했다. 자신의 무능이 드러나는 것 같아 회장님께 말하지 않고 단독으로 진행하던 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미룰 수만은 없었다.
자칫하면 막대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게 된다. 그러면 이 자리를 지키기가 힘들었다.
이 자리까지 올라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허무하게 물러난단 말인가.
대운의 기조실장이라면 허울만 좋은 자회사의 사장보다 백배는 끗발이 있는 자리다.
“형님, 이건 회장님께서 나서서야 할 큰 건입니다. 자칫하면 우리 둘 다 죽어요. 아니 둘만 죽는 게 아니라 자칫하면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전 요즘 밤에 잠이 안 옵니다. 차라리 외국지사에서 한직에 머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도 고민한 단 말입니다.”
“엄살은!”
“엄살이라뇨? 저번에 대운전자 산업은행에서 돈 끌어올 때 제 이름으로 연대보증까지 섰단 말입니다. 만에 하나 회사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요?”
산업은행에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수혈 받으면서 담당 임원들까지 보증을 서야 했다.
대학 직속후배이자 대운에 입사해서도 신입일때부터 부하직원으로 키운 문영모의 말이 더욱 무겁게 김광섭의 가슴을 헤집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운은 끝없는 나락에 빠져있었다.
대운의 이일중회장은 글로벌 경영을 외치면서 해외기업을 거듭 인수하면서 규모를 키워나갔지만 그 뒤에는 막대한 적자를 감수한 출혈이 뒤따랐다.
분칠을 해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해마다 막대한 적자가 쌓였다.
그래서 이번 회사채발행을 두고 엄청난 기대를 했다. 잘하면 그동안의 적자를 한방에 막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 들어오는 것이다.
“알았다. 회장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를 드리도록 하지. 어떻게 해서든 이번 회사채 발행은 성공시켜야 해.”
실패한다면 가뜩이나 다른 그룹보다 1%가 높은 회사채 발행금리가 더욱 올라갈 것이고 더욱 가뜩이나 나쁜 재무구조에 목을 조일 것 이었다.
“제기랄 회사일이 갈수록 숨이 막히는구먼. 남들은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이라고 떠들어 대는데.”
목을 조이는 넥타이가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아 김광섭은 숨을 쉬기가 거북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두렵게 느껴졌다.
***
“여기는 제치고 여기는 조건을 보완해서 서류를 제출하라고 해야겠군.”
두툼하게 만들어진 보고서를 세심하게 살피는 샨 나링햄이었다.
보스가 150억 달러의 회사채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샨의 행보는 더욱 바빠졌다.
글자를 모르니 읽을 수는 없지만 신문들에서는 타이거 펀드의 채권투자를 대대적으로 보도 하는 듯 했다.
한참동안 보고서를 들여다보던 샨은 읽던 서류를 집어던지고 구석에 던져둔 신문을 펼쳤다.
그나마 영자로 발행하는 코리아 타임스를 읽던 샨이 발견한 것은 정부의 자화자찬이었다.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얼굴에 금칠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군.”
정부가 모든 것을 앞장서서 타이거 펀드의 대대적인 한국투자를 이끌었다고 재경원 장관이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인터뷰를 읽으며 샨이 가볍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맞은편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을 뒤적이며 분석하던 쟌느가 투덜거렸다.
“정부쪽 사람들이 하는 게 다 그렇죠. 미국이나 여기나 정치인들은 다 된 요리에 포크 올리는 게 습관인거 같은데요.”
“그건 맞는 말이로군.”
오너가 젊어서인지 보수적인 월스트리트에서 타이거 펀드는 이질적인 투자펀드였다.
최고책임자인 대표와 실무자가 이렇게 한 테이블에 앉아서 농담을 주고받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아악! 미치겠어요. 이걸 자료라고 가져다주는 놈들이 제정신일까 싶어요.”
자료를 뒤적이던 쟌느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왜 자료가 엉망이야?”
“하나같이 믿을 수가 없는 자료들이라니까요. 사업전망은 하나같이 장밋빛이고 재무구조는 전부 회색이네요.”
“그렇게 분식이 심해?”
“말도 못해요. 이걸 적정으로 통과시켜주는 회계 법인들은 뭐하는 놈들이래요?”
“회계 법인에게 돈 주는 놈이 기업이니까. 미국이라고 다들 것 같아?”
채권전문가로 월스트리트에서 잔뼈가 굵은 샨은 이런 일에 너무 익숙했다. 미국이라고 다를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몇몇 미국의 대기업들은 보스가 채권투자를 금지 시키고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그중에선 미국에서 최근 들어서 가장 혁신적이라 불리는 기업인 엔론과 월드컴이 있었다.
처음에는 보스의 지시에 의아해서 투자를 금지한 기업들에 세밀한 재무 분석을 했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 기업가운데 상당수가 법으로 금지된 분식회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또 회계 법인들은 그걸 묵인했고.
샨은 월드컴과 엔론의 회계법인인 아서헨더슨이 만든 자료는 아예 믿지를 않았다.
“대충해, 대충,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어. 여기서는 하는 흉내만 내면 그뿐이야. 그동안 너무 바빴으니까 휴식이라고 생각하라고. 미국에 남아있었으면 아마 지금쯤 걸려오는 전화 받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채권전문가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이렇게 넘어가면 이 자식들은 우리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정도로 여길 거라고요.”
“여기 사람들은 보스를 산타클로스로 여기는데 보스야 말로 진짜 악당이지. 어린아이들에게 사기 쳐서 사탕 뺏는 악당.”
한국에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순진한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가끔은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채권투자라고 경영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 여기고 가볍게 대하는 전문가란 사람들을 보면 정말 속이기 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흥, 보스가 시키는 일이라면 군말 없이 하는 대표님이 할 소리는 아니네요.”
“나도 악당이지. 어린애의 코 뭍은 돈이라도 돈은 돈이거든.”
회사채 인수에 시간이 걸리는 건 재무구조를 믿을 수 있느냐를 분석하느라였다.
하지만 이번 일은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시작하는 일이었다.
기업들이 요청한 회사채금액만큼 인수를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비슷한 금액의 투자는 할 생각이었다.
채권투자금액도 외부에 발표된 150억 달러를 넘어 220억까지 늘어났다.
보스의 예상대로 한국경제가 어려워지면 채권금액의 상당수가 주식으로 전환된다.
대충 계산해보면 한국거래소시장의 20% 가까이가 주식으로 전환되는 셈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알짜기업들의 주식을 털도 뽑지 않고 그대로 삼키는 꼴이었다.
처음부터 220억 달러로 주식을 사들인다면 어림도 없는 규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