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119화 (119/220)

#119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

한국투자

일주일동안 서울에서 머물던 규태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삼정회장과의 만남이후로도 끝임 없이 재계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지만 규태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사실 삼정 오회장과 만나 것도 순전한 규태의 호기심 탓이었지 이번 방한에 재계 인사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규태는 한국 재벌들과 친분을 쌓을일도 마음도 없었다. 나중에 IMF가 오면 어지간히 원망을 들을텐데 처음부터 안면 몰수하고 모른척 하고 지내는게 제일이었다.

대전에 내려간 규태가 처음 찾은 곳은 역시 KT창투였다.

선화동 사거리에 위치한 KT창투는 예전에 대전 상공회의소자리에 지어진 새건물로 재작년에 이사를 마쳤다.

구도심에 위치해 있어서 앞으로 신도심이 개발되면 땅값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걸 계산에 넣기에는 너무 KT창투의 투자규모가 커졌다.

30억 자본금으로 시작한 회사의 규모가 창립된 지 8년 만에 백배이상으로 커졌다. 자본금만 3,000억.

운용하는 자금의 규모는 1조에 가까운 거대 금융사로 크기가 커졌다.

창투사의 지분 5%는 우리사주로 배정되어 직원들이 나누어 가졌고 5%가 지역에서 투자를 받아 지분을 넘겼다.

지분 90%의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실제주인을 알아보기 힘들게 쪼개 놓았다.

드러난 규태의 지분은 20%에 불과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히 회사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구봉만 사장이 안내로 회사를 둘러보는 규태였다. 낯이 익은 얼굴들도 하나둘 보였고 모르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한바탕 회사를 둘러본 규태가 사장실에서 임원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유지환전무던가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영업부분을 맡고 있습니다.”

“성과장은 이제 꽤 직급이 올랐을 것 같은데?”

“기업조사분석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사급입니다.”

“박 과장은?”

“감사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성인호와 박태환은 기룡증권을 인수하는 작업에서 크게 활약한 황규철의 직속부하들이다.

“투자는 누가 담당하는 겁니까?”

“여기 오정광 상무가 투자담당입니다.”

“투자담당 오정광입니다.”

한바탕 임원들과 인사를 나눈 규태가 사장실을 둘러보았다.

잘나가는 금융기관의 사장실답게 인테리어가 제법이었다. 다만 나이든 사람의 취향에 맞춘 가구들이 올드하기는 하지만.

“창투사 직원숫자가 전부 얼마나 되죠?”

“여기에서 근무하는 직원 숫자만 78명입니다.”

“꽤 되네요.”

“투자하는 회사들의 숫자가 늘어나서 직원들의 숫자도 자연스럽게 늘었습니다.”

“창투사로는 제일 회사가 큰 건가요?”

“은행이 투자한 창투사들도 많지만 자본금 규모로는 저희가 제일 큽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투자 건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중국투자는 재경원에서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하기로 했습니다. 금액도 말씀하셨던 5억 달러 투자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상해개발채권은 2억 달러를 사기로 했고 나머지는 중국의 벤처에 투자하기로 요청했더니 좋아하더군요.”

구봉만의 말처럼 재경원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한참 한국은 중국투자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는 상황, 정상회담을 앞두고 벤처기업에 투자하겠다면 재경원에서도, 중국정부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소식이었다.

규태는 사장실에서 구봉만과 임원들이 하는 보고를 들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회사의 주인이 돌아왔으니 임원들이 할 말도 들어야 할 보고도 많았다.

"제일 당면한 문제는 지방 투신사의 인수문제입니다. 여러곳에서 노리고 잇어서 상공회의소에서 저희에게 중앙투신사를 인수해주길 바라고 있읍니다."

이전에는 전국에 기반을 둔 3개의 투신사만을 허용했었지만 지방경제의 활성화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80년대 말에 지방 투신사가 만들어졌다.

대전에 본사를 둔 투신사인 중앙투자신탁사가 대전 상공회의소의 주재하에 만들어졌지만 증권사들 가운데 노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결국에는 중앙투자신탁은 태평양증권에 흡수되지만 이번에는 지역에 기반을 두고 가진 현금이 많은 KT창투에 대전상공회의소가 인수를 요청했다.

"중앙투신의 자본금이 300억 이던가요?"

"예, 투신사를 만드는 최저 자본금입니다."

"원하는 인수금액은 얼마입니까?"

"증권사들이 8000원선에서 주식을 사들이는 모양입니다."

"팔겠다는 주식을 전부 사면 몇%의 지분을 갖는 겁니까?"

"전부 48%정도입니다. 태평양증권이 11%, 부양증권이 9%의 주식을 사들였읍니다."

"나머지는요?"

"그냥 가지고 있겠다는 숫자도 꽤 됩니다."

"가격은 올려서라도 전부 사들이세요. 주식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있으면 마음이 놓이지를 않네요. 다른 증권사들 손에 들어간 주식도 인수를 하도록 하고요."

자회사로 만들기로 했으면 인수할때 확실하게 지분을 정리하는게 좋았다. 나중에 가면 지분정리가 힘들고 인수가격이 높아지지만 한다.

규태의 지시가 덜어지자 담당인 오정광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데로 처리하겠습니다."

"오상무가 담당임원이니까 맡아서 해주시고 지분정리에 기룡증권도 참가시키도록 하고요."

KT창투만이 아니라 지분을 기룡증권과 나누어 가지고 있는게 좋았다. 손에 들고 있는 현금사정은 기룡증권이 KT창투보다 아무래도 휠씬 나았다.

두 시간 동안 임원들과 자리를 함께한 규태가 임원들을 치하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일을 잘 처리했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잘나가는 회사에서 큰소리를 낼 일도 없었다.

식사를 함께 하자는 임원들의 요구에도 규태는 다음에 하자고 약속을 미뤘다. 제일 급한 일은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서 처리할 일 때문에 일주일 이상을 서울에 머물렀더니 여간 성화가 아니셨다.

대충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규태가 오랜만에 고향집으로 향했다.

***

고향집에 들려서인지 할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취했다.

여동생이 깨우러 들어왔을 때 창밖이 어두웠다.

“몇 시냐?”

“7시, 나와서 저녁 먹으래.”

“어, 시차 때문인지 엄청나게 피곤하다.”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서 긴장을 풀렸는지 몸이 뻐근했다.

“어이구, 이젠 오빠도 어린나이는 아니라고! 몸 좀 챙겨가면서 일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인지 여동생의 입에서 건강을 챙기라는 소리까지 들을 줄이야.

“그래 신경을 써야겠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언제까지 젊음이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규태가 식당으로 내려오자 이미 가족 전부가 자리를 함께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막내만 빠진 식구들이 전부 저녁식탁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자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LA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식탁의 윗자리에 앉은 아버지가 언제나 그랬듯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규태까지 왔으니 이젠 밥 먹자, 어머니도 드세요.”

“그래 규태와 함께 식사자리에 있으니까 집이 꽉 찬 것 같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으신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저를 들자 식구들도 식사를 시작했다.

“넌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계획이냐? ‘

대충 배를 채우고 숟가락 놀리는 속도가 줄어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가 물어왔다.

“석 달 정도 있을 생각이에요.”

처음에는 한달 정도 한국에 있을까 싶었지만 미국의 돌아가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는 소식에 체류기간을 늘렸다.

천하의 모건 스탠리가 휘청 인다는 소식이었다. 이럴때 미국에 가봐야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 미려 결혼식까지 볼 수 있겠구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높아졌다.

“그럴걸요. 미려 결혼 준비는 잘 돼가지요. “

“준비랄 거나 있겠냐. 그냥 집하고 신혼살림 몇 가지면 그뿐이지.”

어쩐지 결혼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티를 풀풀 내는 어머니 남여사였다.

“왜 그만큼 반대했으면 됐지. 이젠 그만할 때도 됐잖아.”

식탁머리에 앉은 여동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네 어미가 신랑감이 탐탁치가 않은 모양이야.”

규태가 듣기로는 여동생의 신랑은 예전하고 똑 같았다. 대학다닐때 만났던 캠퍼스 커플이었다.

규태도 둘이 사귀기전에 얼굴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여동생은 결혼해서 탈 없이 잘 살았다. 무던한 성격의 남자를 잘 잡은 것이다.

규태는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다.

“상택이가 어때서요? 성격도 무던하고 미려 같은 까다로운 아이한텐 상택이가 맞아요.”

여동생이 규태의 말에 동의한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집안이 너무 떨어지지 않니, 네 여동생한테 재벌집안에서도 여러 번 매파가 왔었다. 도지사집안에서도 혼인이야기가 나왔고.”

어이구!

규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집안에 시집가서 뭐하라고요. 우리가 돈이 없어서 손 벌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사돈이랍시고 뻑하면 우리한테 손 벌릴 테고 거기에 제대로 집안이 엄하기만 할 텐데 뭐 하러 미려한테 그런 고생을 사서 시킵니까. 대현집안봐요 그 집안 며느리들 새벽에 모여서 아침 준비한다잖아요. 쟤한테 그런 거하라고 하면 한 달도 못 버틸걸요. 도지사라고 해봐야 임기 끝나면 끈 떨어진 연인데 정치하겠다고 저한테 돈이나 달라고 하겠죠. 재벌이건 도지사건 우리한테는 전부 쓸데없는 인연이에요.”

어머니의 욕심이야 잘난 사위를 보고 싶겠지만 규태가 볼 때는 성격이 무던한 놈이 제일이었다.

재벌가의 아들놈치고 밖에서 바람 안 피우는 놈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 아까워서 말이다.”

“어머니, 미려는 미려가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세요. 재벌이니 정치가니 전부 우리하고는 엮이지 않는 게 좋아요. 제가 가진 재산이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데다 정치인으로 따지자면 미국 재무장관이 저랑 동업하던 양반이에요.”

규태의 말에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머! 그러니? 그 점잖은 양반이 미국 재무장관자리에 올랐다고? 지난번엔 백악관에 있다고 하지 않았니?”

행정부의 장관자리에 누가 올랐는지까지 세세하게 한국에서 보도 될 리가 없었다.

“리처드가 이번에 재무장관자리에 올랐습니다. 저도 미국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고요. 제가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한국에서 혼맥이니 하는 것 맺어봐야. 외국 나가서 쓸 일도 없어요.”

단호한 규태의 말에 어머니가 기세를 내렸다.

“그, 그러니. 그렇다면야 나도 더 이상 다른 소리는 하지 않으마.”

“아버지도요. 지사이야기 나온 것 보니까 그 건은 아버지 인맥을 따라 흘러든 혼담이었죠?”

규태의 말에 아버지가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미려 상대가 평범한 집안이라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네 말을 들어보니 아까와 할 것도 없구나. 네가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국내에 인맥이 있어봐야 힘이 될 리가 없지.”

“그러니까 두 분 모두 미려가 결혼하는걸 축복해 주세요. 둘이 잘살면 그뿐이죠.”

이야기를 듣고만 계시던 할머니가 나서주셨다.

“호호, 우리 장손이 돌아오니까 단박에 미려혼인문제가 해결되어서 아주 좋구나. 애비나 어미도 이젠 다른 소리 말고 날짜까지 잡았는데 그렇게 좋지 않은 티 내봐야. 사돈들 눈에 어떻게 비치겠니. 이젠 다른 소리들 말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할머니를 보니 규태도 힘이 났다.

집안에서 여동생의 결혼을 그나마 찬성하고 밀어준 사람이 다름 아닌 할머니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우리장손은 언제 결혼 하누? 이젠 여동생까지 추월해서 결혼하는데.”

부모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면 화를 냈겠지만 할머니가 나서시니 규태도 할 말이 궁했다.

예전에는 이미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없었다.

규태가 결혼하는 모습도 미려가 결혼하는 모습도 하나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었다.

이젠 건강하신 모습으로 여동생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잠시 가슴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저도 하긴 해야죠. 그러니까 저 결혼하는 거 보시려면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

“그래 그래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