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118화 (118/220)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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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투자

말문이 막혀버린 오진희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삼정그룹은 설립이후 한국에서 언제나 일등 아니면 이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전통의 대기업집단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회사가 구멍가게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듣게 되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삼정그룹을 어디 길거리 구멍가게에 비교를 하십니까.”

선뜻 대답을 못하는 오진희를 대신해서 자리에 배석했던 이수학이 나섰다.

함께 자리한 오선한이 나서려 했지만 규태가 손을 잡아 말렸다.

“지금 나선 사람이 이수학사장인가요?”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룹비서실을 맡고 있습니다.”

이수학은 신라모직의 대표 자리에 앉았다가 2세경영이 확립되면서 비서실장의 자리에 오른 오진희의 심복이자 소문난 관리통이엇다.

숫자에 해박하니 이런 사람을 조지려면 숫자를 들이 미는 게 제일 빨랐다.

“작년에 삼정그룹의 시가총액이 35조원이 조금 넘더군요. 거기에 비상장회사인 삼정생명, 삼정화재같은 회사를 합치면 실제로 50조가 된다고 따져봅시다. 그게 달러로 얼마나 됩니까? 어제 환율이 1달러에 825원이더군요. 달러로 삼정그룹 가격이 600억 달러입니다. 600억 달러. 이게 구멍가게가 아니라고요. 거기에 한국 내에서도 삼정은 대현에 이은 두 번째 기업 아닙니까. 두 번째.”

95년 삼정그룹은 대현에 이은 두 번째 기업집단이었다. 두 그룹간의 격차는 크지 않고 미래에 대현이 상속문제로 쪼개지면서 삼정이 일위에 올라가지만 아직까지는 엄연한 이등기업.

선대 회장으로부터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지시에 익숙한 오선희로서는 이등이란 수치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였다.

“뭐 이런!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다말인줄 알아!”

“흐흠,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십시다. 굳이 내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얻을게 뭐요.”

말문이 막힌 이수학이 큰소리를 내며 발작하려는 걸 제지하며 오진희가 진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나를 만나려고 한 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이었다면 성공했네요. 우리가 가진 지분이 걱정된다면 내일부터 시장에서 팔도록 하지요.”

이건 삼정에겐 더 심각한 소리였다.

막대한 투자를 거듭해서 이제 이익이 나기 시작한건 좋은데 앞으로도 엄청난 투자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삼정의 오회장이 규태를 만나려고 한건 이 막대한 자금의 조달을 위해서였다. 청와대에 꽂아놓은 빨대가 전해온 정보에 따르면 타이거 펀드도 마침 한국에 자금 투자를 하려던 참이 아니던가.

그런데 삼정전자의 주식을 대규모로 쏟아낸다면 주가가 폭락할건 불을 보듯이 뻔했다.

타이거 펀드가 털고 나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삼정전자에 투자하려는 외국투자가들도 하나같이 발을 빼려 들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원하는 건 삼정전자에 투자하는 투자요청 때문이었소.”

“구체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

오회장이 눈짓을 하자 이수학이 빠르게 자료를 탁자위에 올렸다.

이수학이 내민 서류를 대충 살피던 규태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투자요청서에 적힌 대로라면 내년에만 2조가 필요하고 다음해에도 비슷한 자금이 들어가네요.”

256MD램의 시험생산에는 성공했지만 이걸 실제로 상품화하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제조과정에서 수율이 높아야지 상업성이 있는데 아직 삼정의 기술력으로는 뒷받침이 어려웠다.

실제로 256MD의 대규모 상업생산이 이루어지는 건 중간에 IMF가 터지면서 99년에나 가능했다.

이런 과정을 단숨에 줄이려면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해서 삼정이 계획한 투자금액은 4조원에 달했다.

서류를 마저 읽은 규태가 머리를 저었다.

“이게 현실에서 실제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256MD보다는 64MD의 공정을 극대화해서 수익을 거두겠다는 말이었다. 이를 위해서 대규모 설비투자를 하겠다는 소리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안될 건 또 뭐요.”

“우리에게 요청하는 투자요구 금액이 삼정의 시총 절반에 달하지 않습니까. 뭘믿고 우리가 투자를 한단 말입니까. 꼴랑 몇푼되는 회사채 이자요? 투자하면 5년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투자요청서를 가지고 왔으니 초장부터 휘어잡으려 무리를 한 것이다. 삼정 측의 투자요청서는 규태의 마음에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나이어린 규태를 압박해서 대충 흐물흐물하게 삶아버린 뒤에 투자요청서를 내밀면 승산이 여긴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자율이 12.5%짜리 채권이 아니요. 미국에서 발행하는 회사채금리라고 해도 이보다 높지 않아요.”

“호박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소리는 그만하시고 10%의 전환사채가 끼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끌어봐야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다. 규태는 첫 만남 자리에서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며 확실하게 못을 박아버렸다.

50억 달러의 장기투자를 요구하면서 단순하게 이자를 지급하는 것으로 퉁 치자는 소리는 후안무치한 요구였다.

언제나 갑의 자리에 익숙한 사람만이 내밀 수 있는 조건이었다.

10%의 전환사채이야기가 나오자 그나마 차분해졌던 실내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후로 의례적인 이야기를 나눈 두사람은 별소득없이 만남자리를 끝냈다.

“받아들일까요?”

“절대로 안 받아들입니다. 가뜩이나 우리가 20%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걸로 날카로워져 있는데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할 수 없죠. 다른 투자자를 찾아보겠네요.”

지금 삼정에 투자하는 건 너무 위험이 컸다. 자칫하면 IMF때에 삼정의 배만 불려줄 수 있는 투자였다.

“다른 쪽으로 투자를 알아보려고 해도 미국금리가 높아서 쉽게 투자할 투자자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일본은행들도 요즘에는 미국투자를 늘리고 있습니다.”

예금금리가 제로금리나 마찬가지인 일본은행들 입장에선 6%짜리 미국채만 사도 남는 장사였다.

괜히 불안정한 곳에 투자했다가 물리느니 세상에서 제일가는 안정성을 보장하는 투자를 두고 딴 곳에 투자하는 헛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삼정의 반도체 사업은 일본 반도체기업들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눈에 가시나 마찬가지인 삼정의 반도체 사업에 투자할 일본 은행은 찾기가 힘들 터였다.

규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삼정도 이런 엄청난 투자를 감당할 자금력이 되지 않았다.

시험생산에 성공하고도 상업생산이 한참 늦춰진 건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된 것이다.

“요즘 반도체가 잘나가지 않습니까? 일본 반도체는 미국의 견제에 직격탄을 맞고 있고요.”

10개가 난립했던 일본 반도체 업체가 7개로 줄어들었고 거기에 미국의 은근한 압력으로 시장에서 가격압박을 받고 있었다.

일본특유의 세밀하고 미세한 장인정신이 반도체 시장에선 악재로 작용했다.

반도체는 물량을 찍어내면 낼수록 가격이 떨어진다. 불량만 발생하지 않으면 대량으로 찍어내는 쪽이 이기는 장치사업이었다.

“그래서 무리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삼정의 투자요청서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현이라면 몰라도 삼정이 이런 식으로 과감한 투자를 하겠다고 덤벼들지 몰랐으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0하나가 더 붙어서 진짜 놀랐습니다.”

10억 달러까지는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50억 달러의 투자를 요청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반도체에 대한 오회장의 욕망을 과소평가 한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규태가 결론을 내렸다.

“협상은 계속하도록 하지요. 투자금액은 한꺼번에 집행하고 돌려줄 때는 달러로 받는 거로 합시다. 다만 만기는 3년으로 5년은 너무 길어요.”

규태의 말에 오선한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자신의 상사가 바라는 게 무언지를 감 잡은 것이다.

지금 기룡증권이 하는 작업이 무엇이던가.

97년 이후의 위기상황을 예정하고 산업전반에 걸쳐서 잡아먹을 기업들을 추리고 있었다. 이 잡아먹을 기업 중의 하나로 삼정까지 집어넣은 모양, 상사의 의사가 그렇다면 그 뜻에 맞추어서 일을 진행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실무진에 이야기를 해놓겟습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여러 가지 덫을 놓아두면 천하의 삼정이라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야 관리의 삼정이란 말을 듣지만 세계적인 투자은행의 눈에서 보자면 아직 투자분야는 뒤떨어진 아마추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적인 투자은행들과 부대끼던 시절에 비하자면 이건 어린아이 손목 비틀 기처럼 쉬운 작업이었다.

비밀리에 규태와 만난 자리에서 돌아온 자택으로 돌아온 오회장의 심기는 불편했다.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회장에게 이수학이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전적으로 준비가 부족했던 제 불찰입니다.”

“아니야,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저쪽 나이가 어리다고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야. 월가에서 굴러먹었다면 보통이 아닐텐데.”

천하의 삼정이 규태의 재산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85년부터 주식매매를 통해 벌어들인 돈의 규모를 훤하게 꿰고 있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89년의 도미이후의 투자 행적이었다.

하지만 월가에서도 투자실패가 없기로 유명한 펀드가 타이거 펀드였다.

삼정의 안방인 한국에서야 무슨 힘을 쓰겠냐고 단순하게 생각한 게 가장 커다란 잘못이었다.

“허참 5000천억 달러라니? 그거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나?”

말은 들었지만 오진희는 저절로 고개를 내저었다.

“더 무서운 건 타이거 펀드 말고도 여기저기 투자한 금액이 만만치가 않다는 겁니다. 디즈니나 CBS의 실소유주가 KT란 말이 있습니다.”

“KT라? 누군지가 대충 짐작이 되는군.”

“KT는 김규태사장의 영어이름입니다.”

“소름이 돋는군, 미국에 건너간 지 6년? 그사이에 그 정도로 자산을 키웠으면 앞으로는 어떨지 두렵기 까지 하군.”

“10%의 전환사채발행은 던져본 겁니다만 만만치 않은 지분을 요구할 모양입니다. 투자를 받는 건 포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기엔 차가 제격이었다. 입맛에 맞춘 오룡차를 한모금 마시니 그나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시워해졌다.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지금 반도체는 공장 세워서 찍어내면 돈이야. 일본 애들은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는걸 올 스톱한 생태고, 이건 돈이 눈앞에서 굴러다니는데 포기하려니까 너무 아까워.”

“미일 경제 분쟁으로 일본 반도체투자가 얼어붙기는 했습니다만 4조는 너무 과한 투자는 아닐까 싶습니다.”

이수학의 반응에 오진희가 혀를 찼다.

“이런 이런! 자네까지 왜 그래? 이건 전부 시설투자에 때려 박겠다는 말이 아니야.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돈이 들어오면 여러 가지로 굴려야지.”

“예?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들어갈 투자가 따로 없지 않습니까.”

“이게 왜 그래? 내평생 가장 원하는 투자가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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