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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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육성
소진세의 보고는 규태에겐 당혹스러운 말이었다.
"맨 파워가 부족하다라?”
사회에 나와서 직장에서 어떤 수준의 업무교육을 받느냐는 어느 정도의 교육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버금가게 중요한 일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가려는 것도 이런 교육의 일환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초년병일 때 바싹 구르면 두고두고 써먹을 일이 많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제아무리 인재라도 써먹을 곳이 없어진다.
“직무교육을 강화했지만 솔직하게 증권사의 이직률이 너무 높지 않습니까? 해외파견을 본냇다가 돌아오면 다른 곳에 스카우트 되는 경우가 너무 빈번합니다.”
그나마 기룡증권은 다른 곳에 비해 해외업무연수과정이 순환구조를 이루었다. 그러면 뭐하는가. 뼈 빠지게 가르쳐 놓으면 홀랑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 되어 나가버리는걸.
소진세의 보고에 따르면 대리급 인력의 유출이 심했다.
“제일 써먹기 편한 이들이 대상이로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원의 이직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그나마 기룡증권 아메리카가 있어서 핵심들의 이동은 작은 편입니다.”
해외투자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해외시장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곳이 한국이다. 기룡이 애써 키운 인재들을 다른 곳이 탐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력관리문제는 방법을 마련해야 겠네요. 그리고 종합주가지수가 10월까지는 주가가 죽 올라갈 겁니다. 다시 한 번 1,000선을 넘어설 수도 있겠죠.”
“종합주가지수 1,000이 넘는 다구요?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일시적으로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96년까지는 주가가 상승세를 탈겁니다. 미국시장도 주가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할겁니다. 금리인상이 마무리되면서 불확실성이 사라졌거든요.”
규태가 보는 세계증시는 당분간 온통 장미 빛이었다. 미국과 아시아와 유럽 증시할 것 없이 당분간은 강세가 예상되는 활황시장.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가 불거지지 않는다면 상승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아마 정치적인 문제가 서서히 불거질 겁니다. 이제 임기가 반 정도 지났나요? 눌러두었던 것들 중에 가장 파괴력이 쎈게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아요.”
그게 뭔지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규태와 소진세 둘 다 안다.
“하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리 아닙니까? 정권의 힘이 무서워서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던 이들도 눈치를 살살 보겠지요.”
“그게 가을에 벌어질 것 같단 말입니다. 그때 주가가 하락하면 추가로 담으세요.”
잘나가다 주춤하면 가지고 있던 주식의 이익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이 커지기 마련이다.
기룡증권은 그때도 계속 주식을 담아가란 소리였다.
“그럼 올 한해는 계속해서 주식을 매수해야겠군요.”
“예, 올해와 내년에는 계속 매수타이밍입니다. 하락한다면 싸게 살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격적으로 덤벼 드세요.”
“지금처럼 특정종목매입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동안 기룡은 극도로 종목을 축소해서 주식을 매입해왔다. 삼정전자와, 한국이동통신같은 종목이외에는 자산주나 저PER주의 몇몇 종목만을 매입해왔다.
이제부턴 이런 종목의 제한 없이 전망이 밝은 주식은 전부 매수하라는 지시였기에 소진세의 안색이 밝았다.
“자금 차입을 해서라도 매입을 늘리세요.”
“그렇지 않아도 시티에서 자금을 빌려가라고 수차례 요구를 했습니다.”
기룡증권은 재무상태도 한국 기업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깨끗했다. 차입이 거의 없고 해마다 막대한 평가이익을 얻어 시티은행에선 거래를 늘리려 애를 썼다.
거기에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기룡 아메리카의 운용자산은 엄청났다.
시티은행에서 자금을 빌려주는 차입형태를 띄지만 실제로는 기룡아메리카의 자산을 합법적으로 한국에 투자하도록 도와주는 것에 불과했다.
조금의 위험부담 없이 외형은 늘어나고 수수료수입도 짭짤하게 들어온다.
당연히 시티은행측은 자금을 빌리라고 조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티에서 10억 달러를 차입해서 투자하도록 하세요.”
이건 극도로 공격적으로 주식을 매수하라는 지시였다.
규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소진세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
규태가 한국에 온 것은 신문과 방송에 보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보안을 지키는 일에 신경을 쓴 탓이었다.
하지만 전용기까지 끌고 김포공항에 나타났으니 모든 이의 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정전자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투자내역을 살피던 규태가 오선한의 보고에 난감함을 느끼며 이마를 긁었다.
“내가 한국에 온건 당분간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삼정이 한국정부 여러 곳에 빨대를 꽂아 놓은 건 아시지 않습니까?”
“한국정부에서 막았을 텐데? 그쪽도 그만큼 급하다는 말인가요?”
“지분을 점검 해보고는 기겁을 했을 겁니다. 그만큼 사들였으니까요.”
"용케도 알아냈네요. 우리가 가진 지분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을텐데?"
"전부는 모를겁니다. 워낙 보안에 신경을 써서 매입을 했기에 알아도 공식적인 지분이외로는 추가 5%정도만을 잡아냈을겁니다."
22%까지 늘어난 해외자금의 투자지분가운데 2/3가 규태가 가진 회사들이 투자한것까지 알아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소리였다.
외부에 드러난 기룡증권과 kt창투의 삼정전자의 지분은 15%선이었지만 페이퍼 컴퍼니와 역외펀드를 이용해서 사들인 지분까지 합치면 그 두 배였다.
삼정그룹의 입장에선 자칫하면 그룹의 주력인 삼정전자의 경영권이 홀라당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
당연히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반도체가 적자를 보면서 그룹이 휘청거리자 거듭해서 증자를 하며 시중자금을 전부 끌어 모았던 90년대 초반의 막대한 증자 때문이었으니 누구를 탓하기도 뭐했다.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으며 심혈을 기울인 반도체사업이 92년 64MD램의 성공에 이어 94년 8월에 세계최초의 256MD램의 시제품개발에 성공했다.
그로인해서 계속되는 증자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익을 거둔 삼정전자의 주가가 95년 초에 140,000만원을 넘어갔다.
“현재 삼정전자의 시총이 얼마나 되죠?”
“8조가 조금 안됩니다.”
“꽤 늘어나긴 했군요. 삼정그룹이 보유한 삼정전자의 지분이 얼마나 됩니까?”
"계열사별로 지분을 나누어 들고있는데다가 상속 지분까지 복잡하게 엮여있어서 정확하게 알기는 힘이 듭니다만 대략 37%선이라고 여겨집니다."
37%라면 국민연금의 지분 7%까지 합치면 경영권 탈취는 불가능에 가깝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아니로군요."
"20%의 지분을 가졌다면 언제라도 경영에 간섭하려면 얼마든지 할수있는 지분이지 않습니까? 삼정에선 그걸 걱정하는 걸겁니다."
87년에 4천400억 원이던 삼정전자의 시총이 10년 세월이 지나면서 엄청나게 늘었지만 아직 세계적인 기업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일본버블이 꺼지기 전에 일본대기업가운데 7개가 시총 1000억 달러를 넘어섰었다.
이를 원화로 환산하자면 80조가 넘는 금액, 시총 8조에 간신히 도달한 삼정전자가 가야할 길은 멀었다.
“보자고 하면 한번 봅시다. 아무래도 경영권이 불안한 모양이니 안심을 시켜줘야죠.”
“삼정전자의 경영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뭐하러요? 지금도 잘하고 있는데 굳이 끼어들 필요가 있나요. 그쪽이 편한 날자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하세요.”
잘하고 있는 경영자에게 간섭할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괜히 간섭했다가 역사처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게 큰일이었다.
반도체와 스마트 폰에 투자하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미래는 규태도 바라는 것이다.
다만 한국의 카를로스 슬림이 되지 않도록 억제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 빌 게이츠를 제치고 세게 제일의 거부의 자리에 오르는 카를로스 슬림은 멕시코가 IMF관리체제에 들어가자 그동안 뿌려둔 정계의 지원을 바탕으로 공기업을 싼 가격에 쓸어 담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 부를 바탕으로 세계제일의 부자자리까지 올라갔지만 반대로 멕시코의 경제는 급전직하, 이때부터 가뜩이나 빈부차가 극심하던 멕시코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견제하려는 마음을 가진 규태의 입장에서 볼 때 부친의 사망으로 자리를 물려받은 삼정의 회장인 오진희는 그만큼 유능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오진희회장은 규태와 만난 첫 자리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악수를 나누면서 손힘을 자랑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규태로선 코웃음이 날 일이었다.
학창시절에 레슬링을 했다는 오진희의 이력답게 손아귀의 힘이 보통이 넘었지만 젊은 규태에게 미치지 못했다.
규태가 그냥 많은 돈을 번 젊은 투자자라면 기선을 제압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속알맹이는 닳디닳은 백년이 넘는 노물이었다.
이제 막 부친으로부터 회장자리를 물려받은 오진희회장정도는 애송이로 여겨도 될 노련함을 파릇해보이는 젊은 외모에 감춘 규태였다.
애초부터 자신의 뜻대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오진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연히 어투가 거칠어졌다.
“기룡증권이 노리는 게 뭡니까? 왜 20%가 넘는 주식을 매입한거요?”
“노리는 거라니요? 우리는 그저 삼정전자의 영업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한 주식을 매입한 것뿐입니다.”
기름바른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규태를 보며 오진희가 으름장을놓았다.
“이러고도 기룡증권이 한국에서 사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다면 오산입니다.”
오진희의 반응에 규태가 속으로 혀를찼다. 삼정전자가 더욱 커지고 세계화가 되면 나아지겠지만 아직 삼정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규태가 월스트리트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로 으름장을 놓았다.
“이거 실망인데요? "
“뭐가 실망이란 말이오?"
“상대가 어떤 상대인지도 모르고 덤벼들다니 말입니다. 이건 내가 아는 삼정과는 다른 모양이라서 말입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삼정정도는 안중에도 없어요.”
규태가 아는 삼정은 글로벌 대기업으로서의 위상이 확실해지는 2010년 이후의 모습이다.
터무니 없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오진희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젊은 사람이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오. 한번 뜨거운 맛을 보게 해줄까요."
오진희의 반응에 규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보자 내가 가진 기업 중의 하나가 리만브라더스가 있군요. 거기에 시가총액이 얼마인줄 아십니까? 어제날자로 뉴욕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된 금액이 125달러니까 시총이 780억 달러가 되는군요. 삼정전자의 시총이 얼마던가요? 100억 달러가 되던가요? 거기에 내가 투자한 회사 가운데 하나인 타이거 펀드가 어느정도의 자금을 굴리는 지 압니까. 오천억달러가 넘어요.”
“.......”
기세등등하던 오진희 회장이 규태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삼정생명을 제외하곤 그룹에서 가장 큰 회사가 삼정전자다.
그룹전체의 시가총액을 합치더라도 리만의 금액을 넘지 못한다.
“내가 창업한 야후의 주식가격만 해도 삼정보다 높을 것 같은데요? 굳이 내가 삼정전자와 같은 작은 회사의 경영권을 탐낼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한국에서 잘 머물 지도 않는 내가 말입니다. 거기에 삼정이 한국정부에 뿌려둔 돈을 믿는 모양인데 그 정도의 영향력은 내가 볼때는 우습단 말입니다. 나와 함께 타이거펀드를 설립한 동업자가 지금 미 행정부에 재무장관으로 있는데 말입니다. 어디한번 그쪽에서 말하는 뜨거운 맛 보고 싶네요. ”
IT버블이 꺼지면서 주가가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야후는 시총이 100억 달러를 넘는다.
타이거펀드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에다가 가지고 있는 주식들의 평가금액을 합치면 5천억 달러를 넘어선지 오래.
한국에서 힘쓰는 삼정이라고 해도 이미 규태의 시선에선 너무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