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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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육성
청와대에서 나와 기룡증권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규태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속마음을 털어냈다.
“너무 심각한데요? 이러면 막을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 말입니다. 너무 한 방향으로 꽂혀 있어요. 경제정책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지금 같으면 앞으로 이 년 후가 걱정입니다.”
“이 년 후면 정권의 임기 말이로군요.”
“지금이야 정권의 힘이 좋을 때니까 잠잠하고 있지만 임기 말이 되면 내외로 여러 문제가 터질 겁니다.”
“행정부 쪽에 있는 지인들이 대통령이 OECD병에 걸렸다고 투덜대던데 사실인 모양입니다.”
“난 지금까지 경제 관료들이 대통령을 그쪽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반대더군요. 대통령이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누구도 나서서 만류를 할 수가 없는 모양 세였습니다.”
“지금 대통령이 고집이 세기는 합니다.”
“평생을 독재하고 싸운 사람 아닙니까.”
“독재하고 싸우는 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 무덤에서 맹세를 했다고 하니 더욱 밑에 사람들이 나서기 힘들 겁니다. 아니 지금쯤이면 자기들 지분을 챙기려고 눈이 벌게져 있을 테니 다른 쪽은 염두에 두지도 않겠죠.”
아직까지 가신문화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평생을 바쳐서 대통령을 받들어 목표를 이루었으니 밑에 사람들도 제몫을 챙기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뿐 장기적인 경제대책은 꿈도 꾸지 못했다.
가신이라고 볼 수 없는 경제수석도 장기적인 경제 상황보다는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에 바쁜 모양새다.
“경제전문가라고 하기에는 경제수석이 생각보다 시야가 좁더군요.”
경제수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관료들이 보는 시선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했다.
“대학교수를 하다가 청와대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다음 경제부총리자리를 노리고 있으니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일만 하려고 한답니다.”
차 운전대를 잡고 있는 황규철은 특히 경제수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황본부장은 왜 그렇게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입니까?”
정곡을 찔린 듯이 황규철이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입을 열었다.
“큼, 그 사람 라인이 안기부를 말아먹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라인이요?”
“소통령 라인입니다.”
“소통령이라? 아하! 아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로군요.”
대통령의 아들이 배후에서 전권을 휘두른 사실은 아름아름 퍼져나가서 나중에는 게이트로 발전한다.
“라인한놈이 안기부에 차장으로 와서 개판을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지인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안기부 같은 중용한 기관을 장악하는 일은 정권의 중요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피해를 직접 입는 사람이라면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안기부에 지인을 많이 두고 있던 황규철이다.
지인들이 피해를 입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황규철은 안기부의 힘이 어디로 쏠리는지 규태에게 설명하면서 투덜거렸다.
“그 사람들 그곳에서 나오면 회사에서 뽑도록 하세요.”
“예! 정권에서 눈치를 줄 텐데요?”
“자기들 입으로 문민정부라지 않습니까. 그 정도 압박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회사의 사주가 자신 있게 말하는 일이다. 회사에서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황규철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지인들이 갈 곳이 없어서 헤매는 꼴은 보지 않게 된 것이다.
“경호회사는 어떻습니까?”
“잘 굴러 갑니다. 대표님께서 찾아오시려고 했지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만류했습니다.”
“큰 문제는 없겠지만 황본부장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요. PMC하고는 교류를 하고 있습니까?”
차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라 보안이 안전했지만 혹시 몰라서 자세한 이름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인적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파견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 말로는 콩고 쪽이 아주 엉망이라고 하더군요.”
규태가 황규철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는 앞으로도 엉망일겁니다. 최대한 지분을 챙기라고 하세요.”
콩고의 동부지역은 코발트와 인듐 같은 희귀광물의 보고이지만 썩어빠진 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곳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치안은 엉망이란 소리였다. 무법천지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군벌들이 지역의 지배자였지만 그들조차 제대로 통제를 하지 못했다.
“아까 종금사들이 태국에 투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충 얼마나 되는지 확인 좀 해보세요.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자됐을 겁니다.”
바트화가 지금처럼 고정 환율로 움직인다면 땅 짚고 헤엄치는 투자다. 일본자금 빌려다가 태국에 투자하면 2%의 차익이 고스란히 떨어진다. 투자가 아니라 자금중개로 여긴다면 앞으로 투자액수가 점점 커질 것이었다.
발 빠른 놈은 먼저 움직이고 늦은 놈들도 이제부터 관심을 가질 터였다.
기룡증권사무실에 도착하자 지시받은 내용을 확인하느라 황규철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선한도 리만 브라더스 서울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대충 현황파악에 나섰다.
“지금까지 종금사들이 투자한 금액이 20억 달러가 조금 넘었습니다. 앞으로는 추정이 불가능합니다.”
“이건 왜 재경원에서 터치를 안 한답니까?”
“아시다시피 바트화는 고정 환율이 아닙니까? 이걸 투자라고 보지 않고 중계업무로 보기 때문에 재경원에서도 큰 간섭을 하지 않고 사후에 신고만 받는 모양입니다.”
“신고를 하지 않으면 재경원도 까맣게 모르겠군요.”
초반에야 위험이니 어쩌니 해서 간섭을 했지만 투자구조가 조금의 위험도도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 반년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투자가 안전하단 착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너무 걱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바트화가 고정 환율이라 태국정부가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투자는 안전한 것 같습니다만.”
규태는 오선한이나 황규철, 그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소진세를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게 이렇게 안전하고 좋은 투자면 투자은행들은 뭐 하러 중계만 한답니까? 리만 브라더스 서울사무소장이 누굽니까? 잠깐 올라오라고 하세요.”
리만 브라더스 서울사무소장 볼프강 패트릭이 급하게 올라오자 규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인사는 됐고요, 패트릭 소장한가지만 물어봅시다. 리만 서울사무소에서도 태국 투자 중계 많이 하지요?”
이미 서울 사무소로 나오기 전부터 규태와 본사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볼프강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그렇습니다. 지난달에만 2억 5천말 달러의 금액을 중계했고 앞으로 6개월간 12억 달러의 추가 투자 중계가 예약되어있습니다.”
“밀린 건 태국채권확보가 어려워서 입니까?”
“다투어 금융기관들이 태국채권을 사들이고 있어서 조금 어렵습니다.”
규태가 가만히 볼프강을 보았다. 아시아지역을 담당하는 헤드쿼터를 도쿄에 만들어야 하지만 리만의 특성 탓에 서울로 정해졌다. 볼프강 패트릭은 이미 아시아 지사장의 역할을 수행 중이었다.
볼프강은 대학을 졸업하고 20년이 넘게 월스트리트에서 잔뼈가 굵은 금융맨이었다.
무사히 지사장의 역할을 해낸다면 본사 중역의 자리를 꿰찰 인재였다. 레온회장이 나름 신경을 쓴 것이다.
“왜 투자은행들은 직접투자를 하지 있습니까?”
“그게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중계업무를 하는 기관이다 보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요. 진짜 이유 말입니다.”
회사의 비밀이라 조금 망설이던 볼프강이 입을 열었다.
“...사실 이게 리스크가 큰 투자라 그렇습니다. 바트화가 고정되어 있어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바트화가 고정이 아니게 되면 손해를 볼 위험이 대폭 올라갑니다.”
“투자위험 측정을 해보니 리스크가 너무 크지요? 그래서 직접 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거구요.”
대형투자은행들은 투자방법을 만들면 리스크와 수익을 계산하는 기법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 테스트에서 탈락하면 투자를 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그렇습니다.”
“.....”
“흐음······.”
볼프강 패트릭의 발언에 앉아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침묵을 지켰다.
“그럼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봅시다. 일본 금융기관에서 단기 자금을 빌려서 태국의 채권에 장기 투자한다. 단 환율은 고정되어 있다. 이게 얼마나 유지될 거라고 봅니까?”
이젠 볼프강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1년은 유지될 거라고 봅니다만 2,3년이 넘어가면 알 수 없습니다.”
“가장 위험요소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환율위험입니다. 고정 환율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으니까요. 멕시코 만 봐도 환율은 외부공격에 취약합니다.”
“일본에서 빌려오는 자금의 만기가 어느 정도입니까?”
“1년짜리도 있지만 대부분은 만기가 6개월 미만입니다. 투자하는 쪽은 장기자금을 원하지만 빌리기 쉬운 게 단기자금이니까요.”
“......”
“저 회장님 저희 리만이 태국투자 중계에서 빠지는 건······.”
“왜 빠집니까? 리만이 투자하는 사람들한테 총들고 강요라도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저희가 하는 건 투자권유니까요.”
“그럼 열심히 파세요. 중계수수료도 확실하게 챙기고요. 멍청이들이 알아서 자기돈 내고 개미지옥으로 들어가 주는데 그걸 왜 마다합니까.”
규태의 기억으로 태국바트화가 평가절하가 되면서 국내의 종금사가운데 살아남는 회사는 단 한곳밖에 되지 않았다.
이외에도 태국투자에 물려서 파산하는 증권사도 꽤 많았다.
규태가 나서서 말린다고 이들이 들어먹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이때만 해도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너무 순진했다. 아니 산업계전체가 그랬다.
닳고 닳은 월스트리트 하이에나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가뜩이나 월스트리트는 여러 번 규태에게 물려서 손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몰릴 대로 몰린 그들은 더욱 악랄하게 덤벼들 것이었다. 멕시코 만 해도 이전 역사보다 훨씬 타격이 심대했다.
당장 폭동이 벌어지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로 IMF 관리를 받는 멕시코의 치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럼 한국에서는 어떻게 할까요?”
“소사장님은 멕시코로 보낼 직원들을 뽑아 보세요. 황본부장은 경호요원들을 준비하고요. 멕시코로 가보면 앞으로 한국에서 일어날 일이 대충은 예상이 될 겁니다.”
앞으로 2년의 준비 기간 동안 인재를 만들어야 했다.
언제까지 규태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예 IMF 관리체제가 오면 한국의 산업전반을 잡아먹어 버릴 생각이었다.
“준비는 하겠습니다만 사실 사람이 너무 부족합니다.”
“아직도요?”
89년까지 증권시장의 대호황으로 증권회사로 들어오는 인재들의 숫자가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인재는 나오지 않았다.
“학력이야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 우물 안 개구리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