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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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투자펀드
낮 동안 그동안 미뤄뒀던 업무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규태가 자리를 비운사이 기룡증권의 볼륨이 많이 커져서 이젠 상장 대형증권사에 비해서도 밀리지 않았다.
기룡증권의 자기자본금만 4,000억 원에 자산규모는 1조 5천억이 넘었다.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 투자가 대성공을 한 덕분이었다.
기룡증권은 삼정전자의 2번째 대주주이자 이동통신 주식도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었다. 90년대 들어서 두회사의 주가는 상승을 거듭하며 엄청난 투자수익을 거두었다. 평균 매입단가가 35000원인 삼정전자의 주가가 20만원을 넘었고 이동통신은 주가가 30만원을 넘었다.
기룡증권은 상장주식 가운데 15%의 지분을 지속적으로 매입해 선정기업에 이은 두 번째 대주주였고 타이거펀드도 역외펀드를 이용해 10%에 가까운 주식을 사들였다.
부서별 업무보고가 끝나자 소진세와 함께 규태가 즐겨 찾던 종로의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리 예약을 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식사가 곧바로 나왔다.
반주로 나온 소곡주를 마시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갈하게 장식된 실내는 세월이 흘렀어도 크게 변한게 없었다.
아주 가격이 비싼 집은 아니지만 오랜 단골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한정식집이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요.”
“가끔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데 예전보단 손님이 많이 늘었습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가 힘듭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하겠네요. 미국음식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름난 식당에 가도 크게 만족스럽지 가 않더군요. 가끔 여기 음식이 그리웠거든요.”
“한국 사람은 매운맛을 먹어야죠. 모태입맛을 어쩌겠습니까. 오늘은 한번 허리띠를 풀고 드셔보시죠.”
“그래야겠습니다,”
규태가 외국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입맛은 적응이 안됐다.
좋아하는 음식들이 상을 가득 채웠다. 좋아하는 호박죽을 떠먹으며 규태가 물었다.
“식사가 나왔으니 먹으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한국이동통신 인수 작업을 했다가 실패를 했더군요.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오사장에게 보고를 듣지 못했었는데.”
규태는 한국이동통신의 인수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은 짐작했다. 짐짓 모르는 척 소진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년에 기룡증권은 소진세 부사장을 책임자로 민영화 작업을 하는 한국이동통신의 인수팀을 꾸렸지만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한국이동통신은 이미 전부터 주인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쪽은 그냥 정부의 요청에 따라 들러리를 선 것 뿐입니다.”
정부는 말로만 민영화지 이미 주인을 결정해놓고 짜고 치고 고스톱 판을 벌렸다.
“그럼 처음부터 선정으로 주인으로 정해져있었군요.”
“청와대에서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불만을 터트리겠습니까. 하여간 작년에 그 문제로 꽤 시끄러웠습니다. 선정 그룹덩치에 비해서는 너무 큰 기업을 흡수하지 않았습니까.”
“선정은 이미 전에도 한번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사장이 별 말을 하지 않았나 보군요.”
“사실은 오사장님도 회장님께 보고를 드렸다가 한국이동통신을 진짜로 인수하자고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왜요? 제가 정부와 싸울 마음이라도 먹을까봐요?”
“저나 오사장도 사실 속마음으로는 욕심이 나기는 했습니다. 황본부장이 거듭 만류를 해서 포기를 했습니다.”
이동통신 사업은 인수만하면 장기적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규태는 황규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기룡이 진짜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면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것이었다.
“선정 같은 국내정치세력의 후원이 없으면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미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면......”
리처드가 백악관으로 들어가면서 오사장이나 소부사장이 욕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규태의 의견은 달랐다.
“겉으로 보기에 결코 좋은 모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길수도 잇습니다. 기룡증권도 할 일이 많은데 정부하고 부딪혀서야 되겠습니까.”
석유공사의 민영화에서 재미를 보아 선정의 재계순위가 크게 올랐는데 이번엔 한국이동통신을 먹었다.
신문에선 크게 떠들지 않지만 이전 대통령이 선정의 물주란 소문은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돌았다.
“내일 청와대에 가면 특별하게 나올 말이 있을까요?”
대충 배를 채워는 지 부른 배를 두드리던 소진세가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소리야 하겠습니까? 지금 대통령이 OECD가입을 치적으로 삼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회장님께 그 일에 대한 협조를 당부할겁니다.”
“쯔쯔, 아직 정부가 정신을 못 차렸군요. 한국도 이미 무역적자가 점점 커지고 있지 않습니까. 작년 무역수지 적자가 15억 달러였는데 올해 들어서는 1/4분기에 이미 저년도 무역수지 적자규모를 넘었습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경제치적으로 OECD가입을 원한다고 합니다.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끌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GNP를 높이려면 지금처럼 원화를 강하게 만드는 게 제일 쉬운 방법이니까요.”
원화는 강세를 유지하게 내버려 두고 시장개방을 하게 되면 무역수지 적자규모는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규태가 맛있게 먹던 식사를 멈추었다.
“지금 멕시코가 당하는 걸 보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멕시코가 요즘 그렇게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
“한국이야 조용하지만 지금 멕시코는 난리도 아니에요.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는 바람에 멕시코는 망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국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 짝이 날겁니다.”
94년 말에서 95년 2월까지 페소화 투매로 3페소에서 7페소까지 환율이 단기간에 치솟았다. 이에 따라 극심한 물가상승이 발생, 멕시코 정부는 채권금리를 13.7%에서 70%까지 올리는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수많은 은행과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생겨나면서 멕시코 경제는 올 스톱 상태였다.
한국정부가 그렇게 원하는 OECD가입에 성공한지 딱 1년 만에 경제가 절단 난 것이다.
“에이, 멕시코하고 한국이 같습니까?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 튼튼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제조업이 튼튼해요? 멕시코는 공장이 없답니까?”
한국인들이 가진 터무니없는 자만심을 소진세가 드러내자 규태가 코웃음을 쳤다.
“한국의 전자산업과 선박 조선은 세계에서도 알아줍니다.”
극심한 엔고로 한국산업의 해외수출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성장률이 주춤했다.
제품 인지도도 일본 제품에 비하자면 떨어져서 해외시장에서는 20세기의 중국제품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기업의 부채비율도 600% ,700%를 넘는 곳이 대기업의 다수였다.
기업은 은행부채를 최대로 높여서 땅을 사는 게 가장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시대였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던 소진태가 갑작스럽게 생각이 난 듯 말했다.
“구사장이 태국투자펀드를 만들면 자기들도 투자를 하겠다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태국투자펀드라면 어떤 겁니까?”
“일본자금을 끌어다가 태국채권을 사는 펀드라고 합니다.”
하이고!
규태는 속으로 탄식을 터트렸다. 한국을 IMF관리로 끌고 가는 거대한 삽질투자가 인기리에 시작된 것이다.
95년부터 종금사들은 다투어 태국으로 달려가 채권을 사들였다.
일본은행에서 2%대에 단기자금을 빌려 수익률 5%짜리 태국채권을 사면 3%의 차익이 발생한다.
한국에서 금융기관의 해외투자가 허용되면서 종금사들이 새로운 수익창출 활로를 동남아로 정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태국입니까?”
“바트화가 달러에 고정 환율이 아닙니까. 환차손을 볼일이 없으니까 다들 태국투자에 혈안이 된 겁니다.”
규태가 머리를 흔들었다.
“리만브라더스 서울사무소도 지금 열심히 국내 종금사와 증권사에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수수료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일본에서 자금을 빌려와서 태국에 투자하는 단자사들을 유혹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의 대형 투자은행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태국투자 펀드는 그냥 잘 팔리는 신상품이었다. 팔고나서 투자자가 손해를 보건 말건 전혀 안중에 없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단기자금을 빌려서 장기투자로 묶어 두는 게 얼마나 투자이론을 거스르는 바보 같은 일인데요. 한꺼번에 자금 환수요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97년 한국이 결정타를 맞고 IMF관리체제로 들어간 것은 일본은행들이 한국금융기관들에게 빌려준 자금을 일시에 환수요청을 한 게 결정타였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만 그렇다고 해도 갚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금융전문가라 할 수 있는 소진세의 반응을 보자니 전에는 몰랐지만 흘러가는 모양을 보니 벌써부터 월가에서 한국에 작업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정성스럽게 공을 들여 놓았으니 한국이 빠져나갈 구멍이 거의 없을 수밖에.
규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당하는 놈을 눈뜬 바보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타깃은 투자자금이 들어가는 태국이지만 그다음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한국이 될 확률이 높았다.
“내가 한국정부에 해외투자를 규제하라고 한다고 하면 말을 들을까요?”
“아니요, 듣지 않을 겁니다. 지금 한국의 분위기는 해외투자를 많이 하는 게 애국하는 사람 같은 분위기입니다. 정부 실무자들도 실적을 올리느라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때에 해외투자를 자제하라고 한들 들지 않을 겁니다.”
규태는 대통령을 만날 때 경고를 해줄까하다 하다 소진세의 말에 마음을 접었다.
IMF가 터지는 게 규태에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경제가 위기에 닥치면 돈을 가진 놈이 제일 힘 센 놈이 된다.
한국의 IMF처럼 단기간에 짧게 얻어터지는 게 일본처럼 30년 가까이 불황에 시달리는 것보단 나았다.
소진세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가니 그곳 컨퍼런스 룸에 구봉만과 벤처회사의 직원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와우! 기다리시면 내가 내려갈 텐데 이렇게 올라들 오셨네요.”
“정말 회장님이 한국에 들어오시는게 오랜만이라, 다들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임원들이야 가끔 미국에 와서 얼굴을 봤지만 직원들은 5년이 넘는 시간동안 제대로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규태도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젠 이지영과장인가요? 결혼소식은 들었습니다.”
“호호, 올해 초에 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축의금은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이젠 부장이로군요? 축하합니다. 유상무는 작년에 얼굴을 봤으니까 됐고 박필중씨도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필중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규태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예고도 없이?”
“직원들이 회장님 얼굴을 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 정부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있어서 겸사겸사 올라왔습니다.”
“창투사에서 재경원과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까? 어떤 내용입니까?”
“재경원에서 해외투자펀드를 신청하라고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