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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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인상을 대비하다.
월스트리트에선 이긴 놈이 왕이다. 제아무리 좋은 투자전략을 짜고 노벨상을 받은 투자이론을 가져온다고 해도 돈을 버는 놈만이 살아남는다.
무수히 많은 헤지펀드들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가 시들였다. 한때 화려한 명성을 자랑했던 액티브 펀드의 대명사인 마젤란 펀드도 결국 2010년에 문을 닫는다.
그런 와중에 월스트리트에서 최고의 화제는 타이거펀드였다. 만들어진 다음부터 투자에 연이어 성공하면 엄청난 수익률을 기록했다.
정식으로 수익률을 발표하지는 않지만 막대한 현금을 움직이는 투자자들마다 투자하지 못해 안달을 했지만 실제로 투자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타이거 펀드는 오픈된 펀드가 아니라 투자자를 극도로 제한하는 사모펀드다.
자산구조와 지분구조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투자에 대한 논의는 이전부터 많았지만 규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타이거 펀드 지분의 15%가 투자자들에게 배정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중간에서 리처드가 도맡아서 상대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리처드가 워싱턴으로 떠난 후 브래들리 하버만, 조셉 보글과 같은 투자자들이 직접 규태와 만나기를 원했다.
이전에도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규태와 두 사람의 시간이 어긋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은퇴를 했다면 서도 어지간히 바쁜 사람들이었다.
존 해밀턴의 앨런 그린스펀의 지인 명단 가운데 이름 하나가 아주 익숙했다.
“두 분 이름은 리처드에게 여러 번 들었지만 직접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은밀한 공간을 찾다보니 약속장소로 정한 곳은 나파벨리에 위치한 규태의 저택이었다. 타이거 펀드를 만들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대면이지만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리처드가 잘해주었으니까 우리가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었지. 은퇴한 다음에는 같이 낚시를 하러 다니기 바빴거든. 리처드가 우리를 배신을 하고 이곳에 취직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하얀 은발을 한 브래들리 하버만이 사람 좋게 웃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옆집 할아버지처럼 생겼어도 은퇴하기 전까지는 미국 방송계를 주름잡는 거물이었다. 집안대대로 RCA의 대주주였고 브래들리 하버만은 NBC회장을 지냈다.
루드 터너 이전에 미국방송계를 한손에 휘어잡았던 인물이었다.
“그래 그 배신자가 우리한테 와서는 이러더군. 인생최대의 기회가 왔다고 말이야.”
그의 옆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는 조셉 보글은 머리는 많이 빠졌지만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전형적인 북유럽 혈통이었다.
덴마크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데 바이킹의 후예답게 덩치도 장대하고 우람했다.
젊었을 때부터 타운센드 펀드를 운영하면서 부를 쌓았는데 그걸 같이 만들고 운영한 사람이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두사람의 동업은 앨런이 행정부에서 일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그 작자가 자네가 운영한 내역을 보여주는데 믿지 않을 수가 없겠더군. 그래서 투자를 했는데 정말 리처드가 처음에 한말이 거짓말이나 과장이 아니었어.”
“나는 첫해부터 수익률이 너무 높아서 처음에는 폰지 사기인줄 알았다네. 다른 투자자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을걸.”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투자한 내역을 살펴보니 수익률이 정말 미쳤더군.”
오늘자로 계산된 타이거 펀드의 평가액은 3,859억 달러, 그들이 투자한 금액은 78억 달러였다. 투자지분의 평가액은 258억 달러다.
초기투자금을 생각하면 정말 미친 수익률이었다.
“하지만 이젠 수익률이 점점 낮아질 겁니다.”
“당연한 소리, 투자금액이 커지니까 돈을 굴릴 곳이 점점 마땅히 없을 거네.”
“그래서 한동안 절반이상의 자금을 채권으로 돌렸습니다.”
“국채 수익률이야 뻔 하지 않나, 대형주를 산다면 투자가 가능하겠지만 하지 않는걸 보면 당분간 주가도 좋지 않다고 예측했을 테고.”
역시 평생을 투자분야에 종사하고 큰 성공을 거둔 이답게 조셉 보글의 분석이 예리했다.
“맞습니다. 당분간은 현금으로 그것도 엔화나 마르크화로 들고 있을 생각입니다.
“엔화하고 마르크화라? 내년 미국경제를 좋지 않게 보는 이유라도 있나?”
“수출을 늘리려면 달러화를 약세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해가 됐네, 그리고 만난 김에 한마디를 하자면 다른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네를 찾지 않을 걸세. 다들 엉덩이가 무겁거든.”
“그럼 두 분을 투자자대표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둘 이외에도 다섯 명의 투자자가 멋있지만 굳이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않았다.
매해 결산마다 보내주는 보고서를 받아 보곤 수익률에 만족해 할뿐이었다.
“그래, 그 정도가 좋을 거야. 자네도 잘 알다시피 얼굴을 드러내고 싶은 이도 있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
“이해가 됐습니다.”
다른 이들은 투자한 자금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규태도 오랜만에 찾은 나파벨리의 포도밭은 두 노인의 마음에 쏙 들었는지 연신 칭찬을 늘어놓았다.
“여긴 사적인 모임을 하기에 나쁘지 않겠어. 너무 번잡하지도 않고. 몇 에이커나 돼지?”
“6.5 에이커(8,000평) 정도가 됩니다. 돌아가실 때 포도주를 챙겨드리겠습니다. 올해 나온 포도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89년산으로 만든 나쁘지 않았거든요.”
“좋은 생각이야. 여기서 한잔 마셔볼 수 있겠는가?”
“원하신다면야. 어디까지나 가볍게 한잔입니다.”
규태는 미리 준비해둔 포도주를 한 병 땄다.
포도주의 효능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가벼운 음주가 심장에 좋다는 이유로 노인들에게 약으로 처방하는 의사들도 많았다.
“당연하지 주치의 녀석이 너무 잔소리를 해대서 많이는 마시지도 못해.”
“나도 한잔 줘보게.”
대낮부터 술을 마시기가 옆에서 침을 흘리는 두 노인네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는 법.
포도주잔에 붉은 적포도주를 적당히 따르자 익숙하게 향기를 맡고 천천히 음미했다.
“자네 말처럼 나쁘지 않아. 풍요로운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느껴지는 것 같네. 약간 떫은맛이 느껴지지만 크게 단맛이 강하지도 않는 게 나한테는 딱 맞는 스타일이야.”
“난 단맛이 조금 강했으면 좋겠어.”
“자넨 그게 문제야, 너무 단 것을 좋아하니까 당뇨에 걸려서 골골하지.”
“그건 나이 먹으면 당연히 오는 거라고. 자넨 무릎 때문에 고생을 하잖나. 이거나 그거나야.”
“뭐가 이거나 그거나야! 난 등산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다쳐서 그런 거라고.”
비슷한 나이 때문인지 토닥거리면서 친분을 과시하는 두 사람이었다. 한참동안이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브래들리와 조셉은 한잔을 전부 비웠다.
옆에 앉은 규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앉아 들으며 포도주잔을 기울였다.
“그래 바쁜 사람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앨런 그린스펀과 젊은 시절부터 친하셨잖습니까?”
“그래 뉴욕대학 때부터 친구였지 젊을 때는 같이 사업을 하기도 했었고. 요즘도 가끔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어울리곤 하지.”
“요즘 들어서 특별한 건 없을까요?”
조셉 보글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그 친구가 젊은 때는 안 그러더니 공직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입이 무거워졌어. 주변사람들에게도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네. 알지 않나 그 친구 특유의 빙빙 돌리는 화법. 그 친구가 말하는 걸 들으면 도대체가 나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서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니까. 자네한테만 말이지만 난 그 친구가 전생에 일본인이 아니었나 한때는 고민한 적도 있었다네.”
“전생은 무슨, 지금 하는 짓이 딱 일본인이야.”
“브래들리도 앨런과 아는 사이인가요?”
앨런을 잘 아는 사람을 지인명단에 조셉 보글의 이름은 나왔지만 브래들리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었다.
“나야 서부의 대학을 나왔으니 젊을 때는 엮일 일이 없었지만 앨런이 닉슨 행정부에서부터 일하지 않았었나. 그때부터 알게 되었지.”
“무슨 의도로 만나자고 한 건지는 알겠네. 그 친구가 연준의장이지만 절대적인 힘을 가진 건 아니야. 그건 자네도 알지?”
“당연하죠. 월가하고 또 ······”
“그만 그 뒤의 이야기는 해봐야 그렇고. 하여간 복잡한 이해집단의 의견을 조정해야 하니까 쉽게 속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네. 앨런이 요즘 힘들어 하는 건 사실이야. 저금리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역시 친한 지인들에게는 그나마 단편적으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모양이었다.
“그건 좋은 정보네요. 저는 아무래도 앨런이 내년에 금리를 올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
“.......”
이건 두 사람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마를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것은 조셉 보글이었다.
“일리가 있어 앨런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하지. 그런데 금리가 너무 낮으면 연준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거든. 지금 금리가 3%였나?”
“그 정도 됩니다.”
“요즘은 몰라도 예전에는 훨씬 금리가 높았었지. 금리를 낮추는 문제를 가지고 재무부 장관하고 의견차이가 조금 있었네.”
클린턴의 캠프에 참여했던 로버트 루빈이 재무 장관이었다.
“루빈이야 월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금리를 낮추자고 했을 겁니다.”
“그래 그게 문제였어, 연준의 금리결정 권한을 침범한다고 생각해서인지 둘이 사이가 별로야.”
그러면 94년의 금리인상이 이해가 된다. 연준의장인 알렌이 작정하고 재무장관을 들이 받아버리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임기가 정해진 연준의장을 자를 수는 없고 사이가 나쁜 재무부장관을 교체할 수밖에 없다.
“내년에 리처드가 재무장관이 되겠는데요.”
“그럴까?... 하긴 둘이 사이가 좋지 않으면 하나는 물러나야지.”
루빈이 물러나면 클린턴이 믿을 수 있는 경제전문가라면 리처드였다.
“어쩐지 자네가 계속해서 보유자산을 팔더란 말이야. 그래서 어쩌서인지 우리 둘이 한참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금리를 올릴 것 같나?”
“제 예상으로는요. 그런데 제가 자산을 파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흥, 내가 현직에서 은퇴를 했어도 큰 거래가 있으면 소문이 들려온다고. UBS의 회장 놈이 내 악우야 그놈이 자랑질을 하더군. 나스닥에 상장된 기술주를 블록딜로 샀다고 어지간히 자랑을 하더라고. 주식을 판 곳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물량을 블록딜로 내놓을 곳은 월스트리트에서 하나밖에 없지.”
“......”
정말 전직 거물 투자가다운 정보습득과 분석이었다. 규태가 마땅하게 할 말을 찾지 못하자 브래들리가 유쾌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거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 정보지?”
“당연하죠,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이것 보게 우리가 은퇴를 했어도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한둘일 것 같은가?”
“그럼 우리가 손해를 봐야죠.”
규태의 말에 브래들 리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흐음, 그것 고민이로구만. 헤프게 입을 열면 손해를 본다는 말이지.”
“금리인상이 있다고 예상하면 투자를 할 방법이 많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면 곤란하죠.”
“채권시장이라? 당연히 금리선물을 매도 할 테고, 주식은 어떨 것 같나?”
“주식시장도 충격을 받겠죠.”
“자네 생각으로는 금리인상이 조금 가파를 것 같다?”
역시 경험 많은 여우였다. 규태가 한마디를 하자 금세 알아듣는다.
“언제까지 엠바고를 지키면 되나? 투자포지션을 마무리할 시기 말이야.”
“2월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겠네. 그때까지는 철저하게 엠바고를 지키지. 하지만 2월 중순에서부터는 우리도 따로 준비를 하도록 하지.”
규태가 투자 포지션을 잡은 이후라면 전혀 문제될게 없다. 그 후에 따라서 들어온다면 오히려 투자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둘이 약속을 어길 것이라고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타이거 펀드에 들어간 돈은 두 사람의 개인자금이었다. 자신의 투자금액을 손해를 보면서까지 주변을 챙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한테서 주식을 사간 친구 분은 친한 사이입니까?”
“내가 괜히 악우라고 하겠는가? 서로 친구라고는 하지만 업무적인 만나는 사이일 뿐이야. 사적인 친분 따위는 없네.”
“그럼 큰 손해를 봐도 문제없겠군요.”
규태와 조셉 보글은 서로 눈을 마주하고 빙긋이 웃었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