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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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태풍
매덕스를 예우하는 의미에서 1선발의 자리에 두지 않고 2선발의 자리에서 로테이션을 했지만 후반기의 성적을 보면 랜디의 투구성적은 뛰어났다.
게다가 2차전에선 잘 던져 놓고도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해 패배까지 당했으니 승부욕 강한 랜디가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였을 리 만무했다.
어린아이 팬들에게 험악해 보이는 외모를 가린다고 콧수염을 길렀지만 규태가 볼 때는 역효과였다.
경기장에 함께 온 오장우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경기시작을 기다렸다.
현란한 움직임의 슬라이더가 포수의 미트에 빨려들었다. 선두타자로 나선 리키 핸더슨이 휘두른 방망이를 비켜나가듯이 움직이는 공의 움직임은 마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헛스윙으로 삼진을 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하늘을 보는 리키를 향해 다저스의 팬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다음 타자가 삼진을 당하고 3번 조 카터가 타석에 서자 경기장은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미친 타격감으로 토론토를 월드 시리즈까지 올린 조 카터의 감각은 여전했다. 비록 패배를 당한 경기에서도 조 카터는 연신 커다란 타구를 날려댔다.
타자 몸 쪽으로 던진 빠른 볼을 휘둘러 커다란 파울 홈런을 때리자 관중석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때리는 순간 넘어갔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잘 맞은 공이었다.
“FXXX, 저 개자식은 어째 아직도 타격 감각이 죽지도 않나.”
규태의 옆에 앉은 오장우가 투덜거렸다.
“여보 애들 앞에서 그런 말을 쓰면 어떻게 해요.”
아이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히로스에가 일깨워주자 오장우가 커다란 헛기침을 했다.
오장우가 투덜거리건 말건 규태의 신경을 오로지 랜디가 던지는 공에 쏠려 있었다. 7회까지 무실점으로 완벽한 투구내용을 보이고 있지만 경기흐름상 여기서 한방 맞으면 승부를 알 수 없었다. 그만큼 팽팽한 경기가 계속됐다.
다저스가 얻은 5회 라울 몬데시가 때린 홈런으로 얻은 1점이 고작이었다. 1:0으로 앞서고는 있지만 큰 것 한방이면 바로 분위기가 넘어간다.
프랭크 토마스, 브랫 버틀러, 캔 그리피 주니어, 마이크 피아자로 이어지는 강타선도 토론토의 에이스 후안 구즈만에게 철저하게 막혔다.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규태는 조 카터가 랜드가 던진 슬라이더에 룩킹 삼진으로 물러나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됐어!”
조 카터는 전생에서 필라델피아와 토론토의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타격감이 미친 것은 동일했다.
규태가 제일 경계하고 있던 것도 조 카터였다.
8회가 되자 토론토의 투수가 스타드마이어로 교체되었다. 7회까지 108개의 공을 던진 후안 구즈만의 구위가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죽어 있던 다저스 타자들의 타격감이 살아났다.
6번 팀 왈락이 안타를 치고나가자 오늘의 히어로인 라울 몬데시가 다시 한 번 스타드마이어의 패스트 투심을 때려 커다란 타구를 날렸다. 높이 솟은 타구가 쭉 뻗어나가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광란에 빠진 채 환호를 내질렀다.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까지 경기장을 떠들썩하게 만든 함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 후에도 폭죽처럼 안타와 홈런이 터져 나왔다.
교체되어 나온 투수의 공을 때려 담장 밖으로 넘긴 캔 그리피 주니어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베이스를 돌 때 규태는 쌓여있던 긴장감이 풀리는걸 느끼며 몸을 뒤로 깊숙하게 기댔다.
8회 빅이닝을 만들며 7:0까지 점수가 벌어지자 다저스는 불펜을 총동원해서 9회까지 무실점으로 토론토의 공격을 막아냈다.
9회 초 마무리 리베라의 커터가 폴 몰리터의 배트를 박살내며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만들자 경기장을 가득채운 다저스의 팬들은 광란에 빠져들었다.
투아웃을 잡았을 때부터 더그아웃에서 자세를 잡고 있던 선수들이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자 경기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미리 준비한 폭죽이 터지며 밤하늘을 화려한 불꽃으로 수놓았다.
달리듯이 뛰어 내려간 규태는 라커룸에서 벌어진 우승 축하행사에 참가했다. 규태가 들어가자 고글을 뒤집어쓰고 샴페인을 서로에게 뿌리던 선수들의 공격이 규태에게 몰려들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샴페인 공격에 규태는 온몸이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었다.
미리 들어와 있던 제리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우승 축하 파티에 참석한 규태는 신이 나서 오랜만에 알코올을 들이 켰다.
그때부턴 규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
“젠장 이딴 사진을 다 올리고 있어.”
우승 다음날 LA타임스의 일면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규태가 짜증을 냈다.
VIP석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이 펄쩍 펄쩍 뒤며 춤을 추다가 고함을 지르는
규태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 신문일면에 실린 것이다.
그때는 너무 기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사진이 찍히는 줄도 몰랐다.
우승이 확정되고 밤늦은 시간까지 축하파티를 해서 출근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보고를 위해 들어온 오선한이 규태의 투정에 가볍게 웃었다.
“팬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습니다. 구단주가 팀 우승에 광적인 반응을 보였다면서 앞으로도 기대가 된다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뭐, 흠흠, 팬들이 그렇게 생각 하다면야.”
사실 사진이 나쁘게 나온 건 아니었다. 열광하는 규태의 뒤편으로 우승의 열기에 취한 다저스 선수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있어서 한 장의 그림처럼 보였다.
어제 다저스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부터 LA는 광란에 빠져들었다.
다저스의 우승이 확정된 다음 규태는 미친 듯이 기뻤다.
“그동안 너무 힘이 들지 않았습니까? 저도 오랜만에 보스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아부하지 말고요. 아부해도 뭐 나오는 거 없습니다. “
“제가 볼 땐 회사 보유주식의 주가가 가파르게 오르는데도 보스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올라가니까 불안하더군요. 압박을 심하게 느끼긴 한 것 같아요.”
사실 그동안 규태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93년 한 해 동안 나스닥에 상장된 기술주의 상승은 원역사보다 훨씬 가팔랐다.
11월까지도 기세가 꺾이지 않았고 겨울이 다가올수록 더욱 기세를 높였다.
원역사에서는 2,000년이 되어서야 달성하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시가총액 1,000억 달러가 코앞이었다.
델, 인텔, 선마이크로 시스템 같은 주식들의 가격도 덩달아 뛰어서 미국전역이 나스닥 열풍에 휘말렸다.
지켜보던 규태도 너무 빠른 주가상승에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기술주에 투자하지 않기로 유명한 워렌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가 주주들에게 항의를 받을 정도로 미국전역이 기술주 투자에 몰두했다.
“보유 주식의 주가가 올라가면 기뻐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남들이 보면 투자에 실패해서 막대한 손해라도 본줄 알겠습니다.”
“젠장! 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르잖아요. 이러면 버블이 꺼질걸 대비해야 한다고요. 아무래도 기술주 매각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아요.”
대부분의 보유주식을 정리하면서도 장기투자로 생각한 기술주는 계속 보유했다. 하지만 급격한 주가상승은 규태의 마음을 변하게 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보스 예상대로 금리가 인상되면 재무구조가 좋지 않은 기술주들이 제일 먼저 타격을 입을 겁니다.”
IT산업은 아직 제대로 성장을 시작하지 않아서 제대로 수익을 내는 회사가 없었다.
있다면 마이크로 소프트와 야후정도, 나머지는 매출규모에 비해 이익이 작았다.
공장 건설 같은 막대한 자금 수요로 이익보다는 투자가 앞서는 상황, 금리인상의 직격타를 맞으면 절반이상이 휘청거릴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상장되어있는 기업의 숫자가 적어서 2000년 IT버블 같은 충격파는 닥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한참 전부터 고민하던 문제였지만 규태도 그동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결정을 미룰 수는 없는 법이다.
이틀정도 기술주의 매각여부를 고심하던 규태는 결정을 내렸다.
타이거 펀드에서 기술주 담당 책임자인 앤디 도노반이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
“타이거 펀드가 보유하는 기술주가 얼마나 있습니까?”
“오기 전에 확인해 봤는데 오늘 주가로 630억 달러어치를 가지고 있더군요.”
상당한 물량이었다.
“팔 수 있는 만큼 팝시다, 가지고 있는 기술주들도 12월부터는 시장에서 매각을 시작해야겠어요.”
규태의 결정에 타이거 펀드의 기술주 담당 책임자인 앤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량이 제법 커서 막대해서 시장에 판다면 충격이 심할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진 물량을 사겠다고 연락이 온 곳이 많았잖아요. 최대한 블록딜로 넘길 수 있는 물량들은 넘겨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급하게 팔면 제값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동안 야금야금 사들인 물량이 전체 기술주의 1/5에 달했다.
“1월까지만 팔면 됩니다. 전부다 팔 필요도 없어요. 조정이 끝나면 다시 사들여야 할 테니까요.”
기술주의 주가가 추락한다고 해도 조정기간을 거치면 다시 사들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최대한 팔아보겠습니다.”
“외부에 우리의 주식매각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는 건 잊지 말고요.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곳이 많을 겁니다.”
지난번 직원의 비밀유출 시도이후로 회사내부의 보안이 강화되었지만 규태는 여전히 불안했다.
“주식을 외국에 판매하면 정보누출위험이 줄어들 겁니다.”
“어디에 팔려고요?”
“영국의 은행들과 스위스 은행에 팔 생각입니다.”
시장을 통하지 않고 유럽 쪽에 주식을 팔면 확실히 흔적은 거의 남지 않는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 시한은 1월까지로 하고 최대한 매각을 해주세요.”
앤디 도노반이 돌아가자 규태는 오선한을 불렀다.
“홀딩스에서 가진 기술주가 전부 얼마나 됩니까? “
“580억 달러정도입니다.”
“그동안 주가가 많이 오르긴 했네요. “
중간 중간에 추가로 매입했지만 워낙 주가가 쌀 때부터 사서 매입가격은 얼마 되지 않았다.
홀딩스에서 가지고 있는 기술주는 전부 규태의 개인소유 주식이었다.
“이것도 매도할까요?”
“그렇게 하죠. 매매는 지금까지처럼 오이사가 알아서 처리를 하도록 하세요.”
홀딩스의 기술주 담당은 오선한이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익보다는 기밀유지가 우선입니다. 만약 외부에서 우리가 주식을 파는걸 알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요.”
“리만에는 알릴까요?”
“내년 초에 이야기 하죠. 한꺼번에 움직이면 시장에서도 눈치를 채기 십상이니까요.”
투자 기밀유지가 쉬운 타이거 펀드나 홀딩스와 다르게 많은 다수의 고객 돈을 움직이는 리만은 철저한 보안 유지가 힘들었다. 백이면 백, 밖으로 기술주 매각정보가 흘러나간다고 봐야 했다.
되도록 천천히 알릴 필요가 있었다.
“ 그래도 케서린한테는 먼저 연락하세요. 그쪽도 가진 물량이 많을 테니까요.”
“상장후 의무보유기간 때문에 팔지 못하는 주식도 많을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도 이야기는 해둬야지요. 나중에 자기만 뺐다고 펄펄 뛰면 정말 골치 아프다고요.”
“하하, 케서린이 화를 내면 누가 당해내겠습니까. 꼭 전달하겠습니다.”
***
리처드와 전화연락을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당분간은 연락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내년에 금리인하가 생각처럼 이루어진다면 리처드와 연락을 주고 받은 게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이미 사람을 보내 리처드에게도 미리 말을 해두었기에 나중에 섭섭하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새롭게 영입한 홀딩스의 조사국장 존 해밀턴은 재무부출신이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연준의장 그린스턴의 동향파악이었다.
가지고 있는 주식과 채권을 정리하는 건 금리인상을 염두에 둔 것.
만에 하나라도 내년 금리인상이 없다면 미리 준비해둔 것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앨런이 저금리에 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1년 이상 유지되고 있는 저금리 때문에 급작스런 인플레이션이 생각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94년의 급작스런 금리인상은 나중에도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였다.
어째서 93년의 물가상승률이 3%가 넘지 않았는데 금리를 인상했는지는 그린스펀을 제외하면 알지 못했었다.
어디에서도 급격한 물가상승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행정부가 바뀌면서 연이은 금리인하로 경제는 불황을 탈피해서 조심스럽게 활황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업률은 감소하고 투자는 늘었다.
11월에 열린 미연방시장공개위원회(FOMC)에서도 조금의 금리상승 신호도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물론이고 타이거 펀드 내부에서도 금리인상이 있을 것이란 규태의 전망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보유자산 매각을 적극적으로 반대 하지 않는 건 이전까지 규태의 투자실적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