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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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태풍
제리가 규태의 마음을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이방인에게 제약이 많은 동네야.”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제리도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띄워 올려줄 때는 터무니없이 올려주지만 내려올 때는 거침없이 이를 드러낸다.
“피부색을 가지고 차별을 하는 덜떨어진 놈들이 많기는 하지.”
씁쓸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제리가 술잔을 기울였다.
“그만 마셔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잖아.”
“하아! 오늘 할 일이 많기는 한데 다 때려치우고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다. 상장 준비하면서 마음이 바쁘기도 하고, 조금은 지친다.”
쌓였던 긴장이 풀렸는지 제리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그래 그럼 오늘 하루는 아예 다 제치고 어울려보던가.”
“아니 아니야, 내복에 무슨. 이것만 마시고 다시 시작해야지. 끝나면 기다리는 스케줄이 줄줄이야.”
“천천히 해 천천히, 이제 시작이야.”
“그래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앞으로 힘을 내서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되야지.”
조금은 침체했던 제리가 한숨을 쉬더니 술잔을 들어 올리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자, 마시자, 오늘 상장으로 직원들 모두가 부자가 되엇지만 이제 시작이라고. 앞으로 더 큰 부자가 되어보자고! “
“부자가 됩시다!”
“주가가 조금 올랐다고 파는 놈은 바보야!”
직원들도 고함을 지르며 제리의 말에 답을 했다.
잘나가는 회사들처럼 야후직원들은 활기가 넘쳤다. 하나같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직원들이 술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규태는 가볍게 손에 든 샴페인을 비우고 파티 자리를 먼저 빠져나왔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큰일이 지나가면 그 뒤처리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규태처럼 돌아다니는 걸 크게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는 귀찮음이 더욱 심했다.
야후의 상장이후로 밀려드는 인터뷰요청을 대부분 잘라냈지만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요청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규태가 소유하고 있는 워싱턴 포스트나 뉴스위크의 취재요청을 거절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뉴스위크의 경제부기자인 톰 리들리의 질문에 규태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워드 휴즈요? 나하고 전혀 비슷한 접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외부사람을 만나지 않고 언론을 피해 다니는 것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게 하나있죠.”
“여자문제로군요.”
“예, 전 아직 독신입니다.”
“그 문제 때문에 항간에선 KT를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곤하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엄연한 이성애잡니다. 만약에 동성애자라면 당당하게 제 자신을 그렇다고 이야기했을 겁니다만 그 사람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전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
“아마도 내가 여자를 사귀는 걸 조심하는 편이거든요. 사귀는 여자와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릿속에 박혀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여자를 사귀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여자가 나타나면 사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은 여자를 만날 시간도 없습니다.”
“믿는 종교가 청교도신가요?”
“저는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신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현재 사귀는 여자는 없다는 말씀이로군요. ‘
“예, 없습니다.”
규태의 명쾌한 대답을 듣는 톰 리들리의 반응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목줄을 쥐고 있는 사주에게 감히 사생활의 세밀한 부분까지 꼬치꼬치 물을 용기까지 나지 않았다.
“그럼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할 질문으로 넘어가죠? 도대체 재산이 얼마입니까?”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회계사에게 물어봐야겠는데요. 가지고 있는 주식과 부동산의 가치가 변동하기 때문에 회계사도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기는 힘들 겁니다.”
“대략 얼마나 됩니까? 100억은 넘었나요?”
“그 정돈 넘었을 겁니다.”
“저희들의 계산으로는 대표님의 재산이 250억 달러로 빌게이츠에 이어 두 번째 부자로 드러났습니다만. 당신의 뒤를 잇는 부자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공동창업자인 폴 앨런입니다. 180억 달러정도가 되더군요.”
“내가 세계에서 2번째 가는 부자라고요? 빌 게이츠가 첫 번째인 것은 당연합니다.”
의도적으로 놀랐다는 식으로 말은 했지만 250억 달러의 재산은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게인 명의로 취득했던 마이크로 소프트나 오라클 같은 주식들도 급등을 시작하기 전에 다 팔아치우는 식으로 드러나는 재산을 줄였다.
팔아치운 주식의 매수자는 당연히 타이거 홀딩스에서 조세피난처에 만든 역외펀드들이었다.
“당신은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되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부모님의 도움을 받은 것은 처음 투자금을 마련할 때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으니 자수성가했다는 말은 맞는 거 같습니다. 글쎄요, 부자가 된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건 물건을 살 때 가격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 정도랄까요. “
"다음으로 물어볼 질문은......"
리들리와 규태는 그 외에도 이런저런 주제를 가지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2시간이 넘게 진행된 인터뷰는 우호적인 분위기속에 끝을 냈다.
“수고 했습니다. 리들리 기자.”
약속 된 시간이 지나자 녹음기와 펜을 들고 달려왔던 톰 리들리가 조심스럽게 규태와 악수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신문사이나 방송사마다 대표님의 인터뷰를 따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태거든요.”
“내가 번잡한 것을 싫어해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들 조심스럽게 접근들을 하는 거겠죠. 리만의 전회장인······.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습니다. 본보기가 되었겠지요.”
부당하게 쫓겨났다고 언론 플레이를 벌였던 조 클레인은 사방에서 조여 오는 공격을 받고 몰락했다.
가지고 있던 재산도 만만치 않은 부자였지만 엄청나게 많은 벌금을 내고 나면 남은 재산이 크게 없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엄청난데다 언론사들마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겁을 상실한 엘로 페이퍼가 아니라면 감히 규태의 사진조차 지면에 올리지 못했다.
그만큼 규태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니면 하이에나처럼 대표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닐 놈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얼굴이 팔리기 싫어하는 겁니다. 한번 언론의 먹잇감이 되면 사생활이란 게 아예 없으니까요.”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대표님이 소유하고 게시는 언론사가 몇 개인데요. 다만 파파라치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규태는 리들리의 충고를 고맙게 들었다. 젊은 나이에 큰 부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서툴러야 정상이다.
가벼운 담소를 나눈 리들 리가 떠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신문사의 기자가 등장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터뷰의 행렬이었다.
여덟 개가 넘는 신문과 방송과의 인터뷰로 심신이 지친 규태였다.
“다음은 어딥니까?”
“CNN에서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건 LIVE방송입니다.”
“제기랄 루드 씨가 하도 들볶아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기는 했지만 너무 피곤하군요.”
옆에서 스케쥴을 같이하는 오선한에게 규태가 투덜거렸다.
생방송에 맞추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줄줄이 기다리는 방송들이 있었다.
꼬박 일주일을 투자하고 나서야 약속된 스케줄을 모두 끝냈다. 추가로 밀려오는 인터뷰 요청은 모두 캔슬 시켜버리고 규태는 LA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
그리고 옆집에 살고 있는 오장우의 가족들을 초대했다.
“와 여기 방이 몇 개예요?”
“나도 잘 모르겠다. 에리히 여기 방이 몇 개지?”
집사 일을 하는 에리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부 스물 다섯 갭니다. 본채에 일곱 개가 있고 나머진 별채에 있습니다.”
“방이 엄청 많네요! 내가 전부 구경해도 되지요?”
"특별히 들어가지 못하는 곳은 없으니까 에리히가 안내해줄거다."
처음 보는 자리에서 집을 구경하러 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오선영은 활발한 성격답게 에리히를 끌고 집안 이곳저곳을 구경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뒤를 따라서 오진영이 동생을 졸졸 따라다니는걸 보면 겉으로는 토닥거려도 속으로는 어지간히 동생을 아끼는 것 같았다.
"여기 선물입니다."
"포도주네요. 고맙습니다."
"일본에서 보니까 보스가 포도주를 무척 좋아하시더군요. 그래서 준비했읍니다."
"나파산 와인이네요. 에뛰드 나파벨리 까베르네소비뇽이면 마실만 하죠."
오장우가 가져온 술은 큰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와인이었다.
"좋은 술은 여기에 다있는거 압니다."
규태의 취미는 명화를 사들이는 것과 와인을 모으는 것이다. 가까운 오장우가 그걸 모를리가 없었다.
"쓸만한 와인은 아쉽게도 대부분 팔로알토에 있어요. 여기에는 가볍게 마실만한 종류들밖에 없는데요."
"이런 아쉬운 일이로군요."
규태의 와인을 마실 생각에 잔뜩 기대를 했는지 오장우는 진짜 아쉬운 모양이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벽에 걸린 그림에 정신을 팔고 있던 히로스에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김상, 여기 있는 그림들 진짜인가요?”
“경매장에서 사들였으니 전부 진짜일겁니다. 아마도.”
“이거 클림트의 그림이 맞지요? 저기 걸린 건 모네의 루앙대성당인가요? 빛의 밝기에 따라 연작으로 그렸다는 그림이요.”
”이거 대단한데요? 우리 집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 단번에 그림의 작가를 맞춘 사람은 히로스에가 처음입니다. “
벽에 걸린 그림은 클림트의 그림중에서도 장식적이고 화려한 그의 특이한 화풍이 드러나지 않는 가벼운 그림들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클림트의 그림을 전부 사들이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서 좀처럼 클림트의 그림을 외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가지고 있는 에곤 실러의 그림은 없나요?”
“내가 에곤 실러의 그림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요. 막스 에른스트나 르네 마그리트, 호안 미로의 그림이라면 몇 점 가지고 있습니다만.”
에론 실러처럼 적나라하게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그림은 크게 선호하지 않았다.
쉬르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을 좋아하는 규태였기에 다수의 컬렉션을 사들이는 중이었다.
“그 그림들이 여기에 있나요?”
규태와 만날 때면 언제나 가벼운 미소만 띄던 히로스에 이었지만 그림을 이야기할 때는 표정이 달라졌다.
“보스, 잘못 걸리신 겁니다. 히로스에가 다른 건 몰라도 그림에는 남다른 취미가 있어요. 집안의 반대만 아니었다면 큐레이터가 되었을 겁니다.”
이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규태는 조만간에 LA에 작은 미술관하나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곳에 그동안 모아온 작품들을 전시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관리자가 없었다. 히로스에는 규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리자였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그림이 대충 백여 점이 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저택의 지하에는 그동안 규태가 모아온 명화들을 보관하는 수장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