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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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투자
“일단 한번 부딪혀 보겠습니다. 중국정부나 상해시도 푸동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있으니 돈다발을 싸들고 간다면 환대는 해도 박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하고 있는 보잉사의 일은 어떻게 하고요?”
당장 나서겠다며 서두르는 로드릭을 보며 규태가 되물었다.
“제가 나간다고 하면 좋아할 겁니다. 맡은 큰일도 없어서 인수인계도 크게 할 게 없고요. 중국지사를 설치하려고 했다가 자금이 어려워지면서 주춤하고 있는 형편이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빠르게 보잉과 일을 마무리하고 상해에 다녀오시죠.”
규태와의 면담을 끝낸 로드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회사에서 눈치가 보였었다. 군용기는 몰라도 민항기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한 영입이었다.
보잉의 해외영업담당 부사장인 에드워드 제페린과 친분이 있어서 자리를 치고 들어갔지만 예상보다 지지부진한 중국의 경제성장탓에 로드릭의 자리는 위태로웠다.
동방항공과 진행하던 계약도 지지부진해 언제 자리를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잠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임스의 전화를 받고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중국사정을 확인해 보았다.
제임스의 연줄이라 할 수 있는 주룽지는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해 부총리에 올해부터는 중국은행총재의 자리까지 겸임, 아주 잘나가는 중이었다.
“제임스 접니다. 지금 막 이야기를 끝냈어요. 당장 보잉때려치고 중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 잘 생각했네, 그 사람이 보기보다 통이 크더군. 나도 제의받은 연봉을 보고는 깜짝 놀랐네. 자네도 연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거야.
”얼마나 되는데요? “
구체적인 이야기는 실무진과 협의를 하라고 해서 그렇게만 알고 나왔다. 저절로 로드릭의 입에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 하하, 전화로 하기는 그렇고 하여간 100만 달러는 넘어간다고 생각하게. 잘하면 성과급도 두둑하게 지급할거야.
“와우! 듣기만 해도 엄청나네요.”
로드릭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본 100만 보장에 성과급까지. 이건 보잉에 남아있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거금이다.
- 하하, 내가 타이거펀드직원들의 연봉 알아보았거든. 작년에 사원 급이 300만 달러까지 받아갔더군. 임원급은 천만이 넘어가.
제임스의 이야기를 듣는 로드릭의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젠장! 월가 월가하더니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이건 뭐 돈으로 밀어붙이는 거잖아요.”
- 공무원생활에 비하면 그렇다고 봐야지. 자네나 나나 평생을 국가에 바쳤지 않나.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돈도 좀 챙겨야지.
“CIA에서도 중국담당은 언제나 마이너였잖습니까. 푸대접을 받으면서 버텼더니 이런 날도 오긴 하네요.”
CIA의 관심은 언제나 소련이 최우선이었다. 그다음으로 유럽과 일본, 그리고 한참 지나야 중국이다.
관심은 곧 예산과도 직결되고 슬프게도 엄청난 예산을 사용한다는 CIA에 근무하면서 로드릭은 한 번도 자금이 풍족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 우리 한번 잘해보자고.
“알겠습니다. 중국 사람들 좋아하는 접대라면 역시 저 아니겠습니까.”
- 그래 자네가 술 마시는 거 좋아하니까 열심히 해보게.
일주일 만에 다니던 회사의 일을 정리한 로드릭은 중국으로 달려갔다.
낡은 공항에 내린 로드릭은 오랜만에 느끼는 상해의 후덕 지근한 날씨에 잠시 이마를 찌푸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저절로 맺히는 더위였다.
이제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예전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황줘지만 로드릭은 손에 든 투자라는 카드를 손에 들고 있다.
처음에는 미적거리던 황줘와의 약속은 투자라는 말을 꺼내게 무섭게 성사되었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작은 키의 황줘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
“축하해 요즘 잘나간다면서.”
“잘나가기는 그렇지, 요즘 뭐하면서 지내나. 제임스대사가 돌아간 다음에 자네도 중국을 떠났다면서.”
황쥐의 말에 로드릭이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나? ”
자리에 앉아 냅킨을 무릎에 올린 황줘가 가볍게 코웃음 쳤다.
“모를 리가 없지. 자네를 만나면 안전부에서 와서 한참동안 자네하고 대화내용을 꼬치꼬치 묻다가 갔거든.”
“끄응, 나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안전부까지 끼어 들었을 지 몰랐는데.”
“서로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거지. 자네하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모두 나하고 같은 입장이었을 거야.
“하여간 이젠 나도 그곳을 나왔으니까 이젠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한번 그쪽이면 영원히 그쪽이지. 하긴 이젠 안전부 놈들도 감히 나한테 와서 시비를 걸지 못하지만.”
이젠 상해방의 세상이다. 안전부건 공안이건 전부 상해방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황줘의 행동은 예전보다 훨씬 당당했다.
“그나저나 투자라니? 자네가 돈이 어디에 있다고 투자를 한다는 건가? 미국정부의 돈이라면 곤란해.”
“그럴 리가, 나도 이젠 민간에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어. 투자계의 큰손을 하나 물었지.”
“큰손이라면 누구인가? 나도 바쁜 시간을 내서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빨리 솔직하게 털어놔보게.”
“자네 KT라고 들어봤나? 아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모르겠군. 리만의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는 사실은 알겠지. 그 새로운 주인이 KT라고.”
“날 뭐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미국에 대단한 젊은 아시아부호가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 그럼 자네가 물었다는 투자자가 그 사람인가?”
“맞아.”
황줘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투자자금을 만들어내느라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큰손들은 하나같이 발을 빼려고만 들었다. 그러다가 들었던 미국의 젊은 신흥부호이야기에 무릎을 쳤다. 중국인이었다면 투자를 부탁했을 텐데 아쉽게도 한국출신이었다.
“이거 자네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군.”
일이 바쁘다면서 로드릭에게 저녁식사시간을 잠깐 내준 황줘지만 거물 투자자와 만나는 일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마오타이주로 반주를 겸한 저녁식사동안 황줘의 푸념이 이어졌다. 야심차게 출발한 상해개발계획이지만 자금부족은 언제나 황줘의 골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89년에 중국 외환보유고가 얼마였는지 알아? 55억 달러였네. 55억. 믿어지나 인구 14억의 중국정부가 단 돈 55억 달러를 가지고 있었다고.”
술기운이 올랐는지 황줘는 거침이 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중국정부의 비밀유지전통은 유구하잖아. 각종 경제통계는 외부에 발표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제기랄 난 전임 주시장한테 시장자리를 넘겨받고는 신이 났었지. 하지만 실제 자리에 올라보니 진짜 머리가 아파. 95년까지 개발에 들어가야 할 자금이 30억 달러가 넘어 개발공채를 발행했지만 수요가 없다고. 사태이후로 투자자들이 전부 사라졌단 말이야. 제기랄. 이걸 잘해낸 다음에 중앙에 진출하려고 했는데.”
황줘는 돌아가는 상황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금부족으로 개발계획의 진행이 자꾸 멈추어 서면서 실패의 두려움을 강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책임을 맡은 상해개발이 지지부진해지면 상해개발을 멋들어지게 성공해서 그의 큰 꿈은 안개처럼 스러질 터였다. 상해시에서 모시던 상관이던 강 주석이 아예 외면하지야 않겠지만 출셋길이 막히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래 부족한 자금이 얼마인데?”
“올해 집행해야 할 자금이 10억 달러가 넘어 그런데 수중에 든 건 2억 달러가 안 되지.”
술기운이 올랐는지 황줘는 거침없이 시의 재정을 털어놓았다.
“흐음, 내가 한 50억 정도를 투자하면 어떨까?”
“뭐 50억? 달러로?”
마시던 술이 확 깬다는 표정으로 황줘가 로드릭을 보았다.
“그래 50억 달러, 그거로도 부족하다면 추가로 더 투자할 수도 잇고.”
“그게 정말인가? 그럼 나도 더 이상 개발 자금부족으로 고통 받을 이유가 없단 말인데.”
“내가 자네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당장이라도 정부승인만 떨어지면 개발자금을 끌어올 수가 있네만. 자네도 알지? 이쪽도 그냥 퍼줄 수만은 없지 않나.”
“원하는 대가는?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는 건가? 너무 지나치면 곤란해.
“전혀, 푸동이 개발되면 상업용부동산도 병행해서 함께 개발해야 하지 않겠나. 그 일부의 지분을 달라는 거지.”
“흐음, 개발지분이라?”
눈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며 황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발이익이라면 적극적으로 푸동에 건물을 올리겠다는 소리였다.
“자네한테도 나쁜 소리는 아니잖은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기반시설을 갖추어 놓아도 핵심은 부동산 개발 아닌가. 중국기업들에게 맡기겠지만 그게 한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긴 그렇지 시틱그룹 회장이 만날 때마다 나한테 하소연을 하더군. 건물하나 짓다가 회사 파산하겠다고 말이야. 그놈들 죽는소리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진짜 힘들 긴 한 것 같아.”
푸동개발의 성공을 상징하는 고층건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낙점된 곳이 시틱그룹이었다. 산하에 은행을 가지고 있어 큰 자금부담없이 고층건물을 올리겠다 싶어서 정한 건데 들어가는 금액이 엄청나다 보니 만날 때마다 죽는 소리를 해댔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건물 하나 올리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5억 달러가 넘었다.
그것하나만이 아니라 계획하고 있는 고층 건물이 줄줄이 착공대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곳에 나를 소개해 달라고, 상업용 빌딩에도 자금을 투자할 테니까.”
전혀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 정도라면 우방궈 상해시 서기와도 시끄럽지 않게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정도였다. 걸려있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나서는데 제놈들이 어쩌겠는가.
탁자를 손으로 두드린 황줘가 결단을 내렸다.
“좋아, 이걸 거부하면 천하의 바보겠지. 내일 시청사로 오라고 나도 자네말대로 해줄 테니 50억 달러 투자는 잊지 말게.”
“당연하지. 그럼 내가 내일 시청으로 자네를 찾아가겠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달려볼까. 머릿속을 괴롭히던 우환이 사라지니 술맛이 한결 나아지는구만.”
골치 아픈 일이 사라졌다는 생각인지 황줘는 거침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스무 병이 넘는 마오타이 주를 동내고서 새벽에서야 끝이 났다.
상해투자개발 국제컨소시엄은 곧바로 설립허가를 받고 영업을 시작했다. 설립신청후 일주일 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된 과정에는 황줘와 배후의 입김이 강하게 스며들었다.
푸동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투자자가 나섰다는 소식에 당 총서기 강택민도 기뻐하며 빠른 업무처리를 지시했다는 후문이었다.
최초 자본금 50억 달러의 투자금으로 설립된 상해투자개발 국제컨소시엄은 상해시와 협상과정을 거쳐서 10년 만기의 개발공채를 인수했다. 3년에 걸쳐 50억 달러의 개발공채를 인수하는 대신 푸동 부동산개발에 우선권을 주는 이면계약이 달린 채권이었다.
- 이건 거저먹깁니다. 이 사람들 개발공채를 사주니까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상해투자개발 국제컨소시엄의 대규모투자는자금부족에 사달리던 중국정부와 상해시의 입장에서는 빈집에 소들어온 격이다.
“너무 들뜨지는 마세요. 그 사람들 아쉬울 때는 고개 숙이지만 돌아서면 안면 몰수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푸동의 대형 상업빌딩들에 대한 지분 인수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주 저녁마다 술판이에요.
“중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술 마시는걸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문화라니까 어쩌겠습니까.”
- 술자리에서 중요한 일이 대부분 결정이 되니 어쩔 수가 없죠. 이 한 몸 희생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하시고 잘 처리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걸려온 로드릭의 전화를 끊고 규태는 가볍게 혀를 찼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로드릭은 아주 물 만난 물고기였다. 주구장창 저녁이면 술자리에 불려가서 주지육림을 즐기는 중이란 보고였다.
탓할 수도 없는 게 중국에서 술자리 초대를 거절하면 인연 끊자는 소리였다.
적성에 맞는 일을 맡았으니 로드릭도 날아다닐 수밖에. 일을 잘하고 있으니 탓하기도 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