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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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시장
92년부터 자본시장 개방이 시작되었지만 외국인 상장주식 투자비율은 12%를 넘지 못한다. 97년까지 25%선을 유지하던 투자비율제한이 풀린 것은 IMF때였다.
90년대의 한국은 전환기였다. 자본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92년부터 그동안 정부와 은행들이 도맡아 처리했던 외자도입이 가능해졌다.
외국인 투자가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기업들이 외국은행에서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아직 삼정전자 시가총액이 4조 8천억이 안되는군요.”
달러화로 환산하면 원 달러화 환율이 800원을 조금 넘으니 60억 달러 규모였다. 일본 대기업들이나 은행들의 시가총액 1,000억짜리 회사들도 꽤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은 너무 작은 규모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장우사장님은 주식을 더 사고 싶어 했는데 삼정전자쪽에서 부담스러워 해서 매입을 중단했습니다.”
“계열사를 통해 순환출자를 해도 가지고 있는 지분이 절반이 넘지 않을 테니까 부담스럽기는 하겠네요.”
“반도체 투자 때문에 자금소요가 많아서 몇 차례 증자를 해서 지분이 줄었습니다. 기룡증권의 투자 때문에 한동안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오장우 사장이 잘 설명을 해서 넘어가기는 했는데 추가매입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동통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에서 추가매입에는 눈치를 준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이동통신의 지분매입에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게 아무래도······.”
“그거 주인이 정해졌을걸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요. 선강은 대단합니다. 계속 자기 덩치보다 큰 걸 집어 삼키는 군요.”
섬유업종이 주력이었던 선강이 유공을 잡아먹으면서 대기업의 반열에 올랐었다. 기업규모는 비교하기가 뭐할 정도였다.
차기 대통령의 자리를 넘겨주면서 이동통신을 선강에 넘기기로 약속을 받았다는 풍문이 증권가에서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건 나중에 드러난 것처럼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두 회사가 제일 잘나가지 않습니까?”
“저 PER주와 자산주가 꾸준하게 올라가고는 있지만 매매량이 적어서 손을 대기가 까다롭습니다.”
자본시장 개방이전부터 신경을 쓰고 주식을 사들였지만 그 양이 많지가 않았다.
대주주인 규태에게도 연락이 오지만 하여간 한국의 투자는 오장우 사장이 전담해서 맡고 있고 앞으로도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외교부 미주국장이 면담을 요청한건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알아보니 김정기미주국장은 차기 외교부장관 후보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리처드경제정책보좌관이 타이거 펀드출신 아닙니까. 한국정부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도움을 요청 했습니다.”
규태가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한국정부입장에서 보면 보스정도의 힘을 가진 한국 사람도 없습니다.”
“나한테 매달리는 것보다는 로비스트를 고용하는 게 빠를걸요.”
“예산문제 때문에 힘들지 않겠습니까.”
규태는 미 정계에 큰 인맥을 만들지 않았다. 주요 기반이 있는 캘리포니아 상원의원과 뉴욕 주 상원의원은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어절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미국정치에 엮이는 일을 되도록 피하고 있었다.
“일본은 미쓰비시 재단이나 사사키 재단 같은 민간단체들이 행정부와 의회에 로비를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도 이건 배워야 하는데요.”
로비를 하는 재단들이 겉으로는 민간재단이지만 배후에 일본정부가 있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로비스트를 고용해야 한다. 법률적으로도 로비를 인정해서 12,000명의 로비스트들이 행정부와 의회에 정식으로 등록되어있다.
미행정부에서 슈퍼 301조를 들먹이며 연일 대일 강경 경제정책을 펼치자 총력을 기울여서 의회에 무역 규제 완화를 로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규태는 회의적이었다.
“일본이 아무리 의회에 로비해도 큰 효과는 없을 거예요. 이번 건은 진짜 행정부에서 마음 단다니 먹고 시작하는 거라. 의회에서도 반대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독일과 일본을 손봐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디트로이트처럼 제조업이 몰락해버린 주 출신의 정치가들로부터 진작부터 나왔지만 냉전이 지속되면서 큰 힘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소련연방이 해체되어버린 순간 일본과 독일에 대한 특별대우는 사라졌다.
당을 떠나서 의견이 합치된 순간 일본과 독일의 고난은 예고 된 것이었다. 덤으로 한국만 고래싸움에 낀 새우 꼴이 되는 것이다.
사무실로 출근한 규태는 일과를 처리하고는 약속된 만남을 가졌다.
규태를 만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대부분 비서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커트를 당했다.
하지만 규태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정치인이 있었다.
톰 브래들리 시장은 1973년부터 93년까지 장기간 LA시장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했지만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LA폭동에 미흡한 대처를 하면서 중도 사퇴를 해야 했다.
퇴임 후에는 LA 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뛰어난 업적을 자랑했지만 LA폭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한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톰 브래들리를 규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브래들리의 뒤를 이은 후임시장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규태도 친분이 있는 공화당의 리오단이었다.
한국전쟁에 포병중위로 참전한 참전용사 리오단이 LA시장 선거에 나서기 전부터 규태와 한국전 참전용사 모임에서 만나 친분이 있었다.
리오단이 시장선거에 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선거자금도 지원을 해주었다.
참전용사라서 그런지 한인사회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그의 캠프에 참여했다가 시에서 일하게 된 한인 교포들도 제법 있었다.
30년이 넘게 민주당이 시장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LA에서 당선된 리오단은 큰 의욕을 가지고 움직였지만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주당 소속의 의원들과 빈번하게 부딪혀야 했다.
팔로알토의 사무실까지 찾아온 리오단은 자리에 앉자마자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시의회 놈들 아예 나를 잡아먹으려고 한다니까. 시장자리에 올랐어도 하나같이 제대로 되는 게 없어.”
20년 넘게 LA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아왔지만 LA시에 의회에는 기반이 부족했다.
“경찰조직을 손대려고 하니까 반발이 심하죠. 이십년간 브래들리가 시장을 하면서 쌓아온 인맥이 무시할 수 없어요.”
전임자 톰 브래들리는 경찰출신의 시장이었다. 전임자의 손때가 잔뜩 뭍은 조직을 건드리려고 하니 엄청난 반발이 일어낫다.
“그래도 LA폭동때 경찰의 무능이 드러나지 않았나. 이런 조직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야. 무엇보다도 경찰의 숫자가 너무 부족해.”
취임을 하고 첫 번째로 하는 일이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전임 경찰서장인 대릴 게이츠가 LA폭동진압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윌리 윌리엄스가 후임 서장이 되었지만 리오단은 윌리암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이도 좋지 않았다.
리오단은 경찰 특공대 SWAT의 창설에 깊숙하게 관여한 대릴 게이츠가 준군사조직처럼 운영하던 LA경찰을 평범한 경찰 조직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원하는 대로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조직이 게이츠 밑에서 이십년 넘게 그렇게 운영되어왔는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있겠어요.”
“자네가 도와주게.”
“내가요? 어떻게요?”
“자네 민주당 인맥이 많잖아. “
“아이고! 내가 무슨, 민주당에 아는 정치인들도 없는데.”
“그러지 말고 힘을 좀 써달라니까. 미셀이 나서고 있지만 자네가 나서면 모든 게 해결된다니까.”
미셀은 리오단의 캠프에 참여한 재미교포였다. 나중에는 하원의원에 까지 당선이 되지만 지금은 막 정치에 입문한 신출내기였다.
리오단이 볼 때 규태만 잡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젊은 갑부에 민주당이 승리한 대선에도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한 규태였다.
정치이야기를 꺼내면 규태가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기에 리오단도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진짜 입장이 난처하게 만드네요. 차라리 내가 LA경찰 증원을 위한 기부금을 내는 걸로 하죠.”
경찰의 증원은 규태도 필요성을 인정하는 바였다. 소수정예를 주장하는 전임 서장 게이츠 탓에 LA경찰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치라면 질색하는 규태를 아는 리오단이 빙긋이 웃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해. 최대한 많이 부탁하네.”
능글맞은 리오단의 반응에 규태가 이마를 쳤다.
“이런! 처음부터 목적이 기부금이었군요.”
“그럼, 나도 자네가 정치에 끼어드는걸 싫어하는 건 아는데 진짜로 정치에 끼어들라고 할 리가 없지 않나. 게다가 자네 어차피 기부금을 낼 것 아닌가. 작년과 올해 수입이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잇는데.”
“회계사가 기부를 권하긴 하더군요.”
“기부는 미국에서 최고의 절세수단중 하나지.”
규태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내가 이래서 정치인들을 마나지 않으려고 하는 건데.”
“그게 쉽겠나? 당장 자네를 만나려고 정치인들이 줄을 설 텐데.”
“정치인들은 아예 만나지를 않네요. 시장님이 특별대우인겁니다.”
“하하하, 정말 자네는 정치인 혐오가 심한가봐.”
“도움이 안 되잖아요. 도움이. 시장님만 해도 내 주머니의 돈을 털어갈 생각만 하지 않습니까.”
“적당한 선에서 만나기도 하고 그래야지. 너무 정치인들과 거리를 두려고만 해도 적이 생길걸 세.”
“적이 되면 밟아버리면 그만이죠.”
심드렁한 규태의 반응에 리오단이 헛웃음을 웃었다.
“하하, 자네 정말 못말리겠군.”
리만 브라더스의 회장이 규태에게 이를 드러냈다가 이빨 째로 뽑혀나갔다는 소식정도는 리오단도 들었었다.
사실 규태 정도의 거물이 LA시장인 자신과 만나서 이렇게 상대를 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시장이 되기 전에 친분을 쌓지 못했다면 어림도 없는 일.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 고생을 했었는데.
그해 겨울의 살을 에일 것 같이 매섭던 추위가 다시 한 번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무실까지 찾아와 들러붙었던 리오단이 목적을 달성하고 떨어져 나가자 사무실의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선한이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기부금을 요청하는군요.”
“공약을 달성하기에는 제일 쉬운 방법이잖아요. 예상문제로 골치 아픈 시의회에 들볶이지 않아도 되고.”
“리오단시장이 원하는 걸 얻어냈으니 돌아가서 큰소리 좀 치게군요.”
“큰 소리를 치라고 원하는 대로 밀어주는 거 아닙니까.”
한국전 참전용사는 대접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조금 더 키워주고 싶었지만 정치인으로 그의 자리는 LA시장이 한계였다.
“아쉽군요. 조금 더 친화력을 갖추었다면 더 큰 정치인이 될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정치인으로 대성을 하려면 뛰어난 친화력을 갖추어야 한다.
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도, 그 뒤를 잇는 조지 부시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단번에 빨려 들어가 지지자가 되어버린다.
빌 클린턴은 여자문제, 조지 부시는 마약복용 전과등 커다란 문제가 있었음에도 극강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자리까지 올랐다.
리오단은 60이 넘은 나이에 LA시장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많은데다 정치 기반까지 부족했다.
무엇보다 호불호가 너무 분명해서 사람을 많이 가리는 게 큰 약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