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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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의 봄
이런 조 토리의 불만은 선수들과 인사를 마친 구단주와 감독 실에서 마주한 자리에서 그대로 터져 나왔다.
마침 단장인 제리까지 함께 있으니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한 것이다.
“아니 왜? 내야 보강을 안 해주는 겁니까? 2루 데이브와 3루 팀은 식물타자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8번과 9번 타자로 나서는 두 사람의 작년 타율은 2할을 간신히 넘는 수준. 수비실력은 그럭저럭 이지만 타율이 저 정도면 그냥 구멍이라고 봐야했다.
조 토리의 불만에 규태는 제리를 보았다.
“토리 감독님한테 말 안했어?”
“아직은, 지켜보다가 여름쯤에 말하려고 했지. 유망주가 왜 유망주겠어. 터질지 안 터질지 모르니까 유망주지.”
유격수자리에 역대급 재능을 가진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작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픽으로 뽑았다.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선수인 블라디미르 게레로는 원래 포지션이 외야수였지만 더블 A에서 3루수로 훈련을 받고 있어서 가을 로스터 확장때 불러올릴 계획이었다.
지금 계획으로는 가을이면 1루에 프랑크 토마스, 2루에 오퍼만, 유격수에 로드리게스, 3루에 게레로라는 올 스타급을 넘어 명전급의 내야진을 갖추게 된다.
역대급 재능을 가진 유망주들이 마이너리그에 있는데 어설프게 선수를 트레이드 해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망주는 유망주, 여름까지 둘을 마이너리그에서 굴린 다음에 상황을 보며 결정을 내릴 계획이었다.
“알렉스라면 작년 드래프트 1픽 아닙니까? 확장 로스터 때에 그 친구를 콜업하려고요?”
조 토리는 너무 빠른 콜업이 아닌가 했다. 최소 2년은 마이너에서 굴린 다음에 메이저로 올리는 게 관례 아니었던가?
“역대급 재능이 아닙니까. 수비도 수비지만 방망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더군요.”
“그런데 그 친구 유격수 아닙니까? 유격수엔 오퍼만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수비의 핵심인 유격수는 말 그대로 수비를 잘하고 타율이 2할 5푼 이상을 기록할 수준이면 준수한 실력이다. 지금 유격수를 맞고 있는 오퍼만의 수비와 타율이 그 정도였다.
지금 다저스의 구멍은 2루였다. 2할을 간신히 넘는 타율을 기록하며 타선의 구멍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오퍼만을 2루로 보내고 알렉스를 유격수로 쓸 계획입니다.”
이건 단장인 제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
“그 친구가 그 정도로 뛰어납니까? 오퍼만을 밀어낼 정도로요?”
계약을 마치고 인스트락터를 붙여서 수비와 타격을 조율한 제리였다. 구단에서 신인에게 이정도로 신경을 쓰는 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다는 소리.
“수비는 골드 글러브, 타격은 MVP급 재능이랍니다.”
“어허! 그건 어디 괴물이랍니까?”
“아지 스미스가 확인해 줬어요. 수비가 아주 기본이 탄탄하다고. 조금만 트레이닝을 하면 몇 년 안에 골드 글로브를 받는 선수가 될 거랍니다. “
아지 스미스가 누구던가? 메이저리그에서 유격수 수비라면 역대 첫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통산 타율이 2할 6푼 8리에 불과했지만 괴물 같은 수비로 13년 연속 골드 글로브를 휩쓴 명유격수가 아니던가.
“그 친구 아직 은퇴도 하지 않았지 않나요?”
“그게 무릎부상 때문에 지금 재활중입니다. 저랑 친분이 있어서 잠깐 봐달라고 했지요.”
“에잉, 인조잔디는 그게 문제라니까요. 아지도 카디널스의 인조잔디에서 뛰지만 않았어도 무릎이 그나마 멀쩡했을 텐데.”
조 토리가 투덜거렸다.
다른 팀 감독인 조 토리조차 실력을 인정하고 오래 뛰기를 바랄정도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의 수비는 예술에 가까웠다.
“하여간 아지가 확언을 했어요. 자기보다 뛰어난 유격수는 못되겠지만 오마 비스켈보다는 나은 선수가 될 거라고요.”
오마 비스켈은 아지 스미스의 뒤를 이을 스타 유격수란 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로 감독이라면 당연히 탐을 낼 선수였다.
“아지가 그렇게 말했다면 엄청난 포텐을 가졌다는 말일 텐데.”
“그래서 여름까지 지켜보다가 가을에 올릴 생각입니다. 블라디미르도 같이요.”
블라디미르 게레로가 더블 A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리포트는 받은 적이 있었다. 너무 어린나이 때문에 메이저리그에 올리지 못했을 뿐이지 루키리그에서부터 시작해서 더블 A까지 치고 올라온 블라디미르의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블라디미르가 3루를 본다고요?”
“외야에는 자리가 없지 않습니까? 블라디미르의 반사 신경이 남다르고요. 작년 말부터 3루 수비를 시켰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어요. 어깨가 아주 강견이랍니다.”
“허참! 어린아이들에게 구단의 미래를 거는 꼴이로군요.”
구단주와 단장은 어린아이들을 너무 좋아했다.
“가을까지 녀석들이 메이저리그에 뛸 실력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때 트레이드를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가을 야구를 하지 못하는 팀들에게서 선수를 트레이드로 받아오겠다는 소리였다.
젊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진 단장이 큰소리를 쳤으니 믿고 기다릴 수밖에.
“가을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못 기다려요.”
다시 한 번 다짐을 받는 조 토리였다.
“야야! 이거 진짜로 맞는 거냐? 둘 다 콜업이 너무 빠른 거 아냐?”
규태가 내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감독실에서 나오는 제리가 투덜거렸다. 자칫하면 역대급 재능들이 이른 콜업으로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릴 우려도 있었다.
예전에 그런 경우가 없던 것도 아니고.
“둘 다 믿어봐.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어서 빨리 키워야지. 위기가 닥친다고 시들어 버릴 정도의 재능들이 아니야.”
규태는 두 사람이 성공하는 미래를 알고 있기에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이건 뭐, 하여간 구단주님께서 지시를 하신일인데 단장이야 따라야지.”
불안하면 구단주 핑계를 대는 건 여전했다.
제리와 함께 시범경기를 지켜본 규태는 조용하게 팔로알토로 돌아왔다.
***
팔로알토의 저택은 엄격하고 사무공간과 분리되어 조용했다. 건축할 때부터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쓴 탓에 밖에서 저택 내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숙면을 취한 규태였다. 터가 좋은지 팔로알토의 집이 벨에어보다는 잠을 자는 게 편했다.
규태의 고질병중의 하나인 불면증이 팔로알토 저택에서는 한결 덜했다.
아침을 준비했다는 소리에 부스스한 몰골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뜨거운 커피한잔과 가벼운 샌드위치로 아침식사를 하는 규태였다.
무겁게 식사를 하면 머리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커피 한잔 더하시겠습니까?”
집사장 유르겐이 어느 사이 빈 커피 잔을 보고 물었다.
“아니요, 충분해요. 어차피 출근하면 한잔 더 할 텐데. “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하루에 세잔정도가 좋습니다. 그이상은 홍차가 좋습니다.”
뉴욕 롱아일랜드의 저택에 규태가 머무르는 시간이 없게 되자 고용했던 집사장 유르겐 브라터가 팔로알토로 건너왔다.
확실히 경험 많은 유르겐이 팔로알토의 저택을 관리하면서부터 어수선 했던 집안의 기강이 잡혔다. 이따금 나오는 한식의 맛도 한국에서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녁에는 설렁탕이 어떨까요? 재료가 좋은 게 들어왔다고 스테파니가 추천을 했습니다.”
재미교포이자 한식전문가인 스테파니 리는 팔로알토 교외에서 식당을 하면서 이따금 규태의 식사를 맡아 주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나오는 스테파니의 한식은 규태가 향수병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마법의 치료제다.
특별히 까다롭게 굴지 않는 식성을 가진 규태지만 집에서도 계속해서 외국 요리를 먹다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집에서는 화려한 요리보다 가정식을 즐겨 먹는 규태였다.
“그 말을 들으니까 입맛이 도는 거 같네요.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까 집에서 먹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준비를 하도록 하겠읍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제몫도 있습니까? “
규태와 비슷한 부스스한 몰골을 한 오선한이 식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에서 사귄 여자 친구와는 잘되지 않았는지 슬그머니 팔로알토 저택의 별채로 들어와 살았다.
“이사님의 식사도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는 커피로 할까요?”
“예, 진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소리 없이 걸어가는 유르겐을 보며 오선한이 혀를 내둘렀다.
“유르겐 집사장님은 언제 봐도 한결 같으시네요.”
“그만한 경륜이 있으니까요. 집사 일도 쉬운 게 아닙니다.”
자유분방한 오선한도 유르겐에게 꼼짝을 못했다. 상대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넘지 않게 조율하는 모습이 역시나 경험 많은 집사였다.
“건물들은 쓸 만한 게 있던가요?”
가지고 있는 현금을 놀려서 어디에 쓰겠는가. 팔로알토와 산호세의 건물과 땅을 구입하려고 알아보는 중이었다.
오선한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직장상사와 함께 있는 사람치고는 자유로운 행동이지만 규태도 오선한도 서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은 마땅한 게 없네요.”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으면 나오는 매물들이 있을 겁니다.”
“확실히 일본자금이 빠지는 모습이더군요.”
한때는 침공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미국부동산을 사들이던 일본자금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 불황이 시작되면서 견디지 못하고 부동산을 파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자금들은 앞으로도 계속 팔고 나갈 겁니다. 일본시장이 앞으로도 좋지 않을 거니까요.”
“흠, 그럼 기다려야겠네요. 나오는 매물이 많아지면 가격조정도 쉬울 테니까요.”
“그렇게 하세요.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미국경제가 바닥을 찍고 서서히 올라가고는 있지만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빠르게 먹은 오선한이 한국사정을 브리핑했다.
아침식사시간에 전반적인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도 오선한의 일이었다.
“요즘 한국은 우루과이 라운드 문제로 꽤나 시끄러운 모양이던데요. 보조금 문제로 농민들이 위기를 엄청나게 느끼는 모양입니다.”
"계속 시끄럽겠네요. 그거 정치적인 문제라 해답이 없을텐데."
우루과이 라운드는 농산물 시장개방이란 악재가 걸린 협상이었다. 공산품의 수출대신에 농산물 시장을 개방해야 하는 문제로 한국이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우루과이 라운드는 한국에 유리한 협상이지만 농산물수입은 정치적인 부담이 컸다.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끝이지 않는 듯 한국 신문마다 헤드라인은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한 것이었다.
“삼정전자의 주식이 많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작년에 64M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올해에는 세계제일의 반도체 업체로 올라갔다고 야심이 대단합니다. 이동통신도 꾸준한 주가상승을 보이고 있읍니다.”
한때는 그룹의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주식시장에서도 반도체 투자를 위해 증자를 거듭해서 자본금도 늘어낫지만 주가도 상승세였다.
기룡증권은 지속적으로 주식을 매입해서 삼정전자의 12%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18%를 보유했다. 벌써 두 종목의 주가가 10만원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