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
다저스의 봄
“어차피 2년 정도는 마이너에 처박혀 있어야 하니까. 선수들의 몸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천호는 재능 있는 선수니까 잘 하면 선발진에 큰 힘이 되겠지. 물론 팀 마케팅에도 큰 도움이 될 테고.”
박천호를 달래는 자리에 규태와 함께 한 제리였다. 그 역시 박천호의 장래를 어둡게 보지 않았다. 선발진에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아시아 마케팅으로 구단 수익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거기에 눈치를 보니 규태가 마음먹고 키울 모양이었다.
아무리 구단주인 규태와 친하게 지낸다고 해도 구단주의 의견을 단장은 존중 할 수밖에 없다.
구단주와 단장이 함께 기회를 주겠다며 설득했으니 박천호도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차분하게 준비를 할 것이었다.
“마이너 리그가 오래 버틸 곳이냐? 내가 말한 건 준비했어?”
“그거? 그거 진짜로 해야겠냐?”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보수적인 스포츠다. 야구 규칙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 불문율을 책으로 발간해서 교육까지 시켰다.
선수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반드시 마이너 리그에 처박아 놓고 굴려댄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고는 성공해도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하나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이너 리그에서의 생활이란 게 엄청나게 고역이었다.
급여는 쥐꼬리만큼 주면서 먼거리까지 이동하는 원정경기에 타고 가는 버스는 썩어가는 고물이다.
덩치 큰 선수들은 제대로 다리도 뻗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창 자라야할 어린선수들에게 제공하는 식단이라고 해봐야 딸기잼과 빵이 고작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들에게 제공하는 식단은 케이터링 서비스가 기본이다.
한마디로 대접받고 싶으면 메이저리그로 올라오란 소리였는데 규태가 보기에는 이건 뭐도 아닌 착취였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에게 하는걸 보면 이건 뭐 선수학대가 아닌가 싶다니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야 성공의 달콤함도 아는 법이야.”
30대의 젊은 단장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구닥다리 같은 소리였다.
“개소리하지 말고 전부 뒤집어엎어.”
메이저리그는 산하에 루키리그에서부터 트리플 에이까지 7개의 단계로 마이너 리그 팀을 운영한다. 다저스도 각각의 리그 팀들과 계약을 맺고 선수들을 공급했다.
“네 말대로 하면 다른 구단들의 반발이 심할 거야. 구단의 재정부담도 상당하고.”
제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규태의 지시는 마이너 리그 소속팀의 시설을 개선하고 선수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작업이었다.
“지금처럼 인스트락터를 고용해야 제대로 코치를 받는다면 뭐 하러 마이너 리그 팀을 운영 하냐? 가난한 마이너리그선수들이 개인적으로 인스트락터를 고용할 비용이나 가지고 있겠냐?”
이건 제리도 인정하는 딜레마였다. 시설과 대우도 열악하지만 근본적으로 마이너리그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놈만 위로 올린다.
마이너리그에서 코치들도 선수들을 하나하나 코치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라도 주어진 선수들을 고치고 다듬어서 실력을 끌어올리는 한국이나 일본야구에 비하자면 선수방목에 가까운 시스템이다.
높은 순위로 지명을 받아 많은 계약금을 받고 계약을 한 선수들은 충분한 기회를 받고 개인적으로 고용한 코치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실력을 쌓는다.
반대의 경우에는 낮은 순위로 지명된 선수는 마이너리그에 소속되어있으면서 2만 달러수준의 낮은 급여를 받아먹고 살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규태는 산하 마이너 리그 팀들의 시설을 대폭 개선하고 코치들의 숫자를 대폭 늘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네가 말한 대로 예산내역을 뽑아보니까 대략 1,800만 달러가 추가로 소모되는데? 이건 투자라고 할 수도 없어. 돈을 허공에 뿌리는 거라니까.”
마이너리그팀은 다저스의 소유가 아니라 3년에서 5년 정도 계약에 의해 정해진다. 계약이 잘못되면 언제라도 산하의 마이너리그 팀이 바뀔 수 있다는 소리였다.
구단소유도 아닌 곳에 이렇게 대규모 투자를 한다는 게 효율적인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특급선수를 사오는 게 구단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었다.
제리의 반발에 규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저스의 재정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그런걸 알 리가 없잖아. 내가 사장도 아닌데.”
팀을 운영하는 전권을 쥐기는 했지만 구단운영에 관련된 사항을 전부 아는 게 아니다. 제리는 규태에게 받은 자금 내에서 팀을 운영하고 재정에 관련된 사항은 규태가 관할하고 처리했다.
“작년에 다저스의 자금으로 펀드에 투자한 이익이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하고 2억 5천만 달러가 넘었다.”
규태가 다저스를 인수한 후 구단재정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시도한 게 투자였다.
개인적으로 다저스에 3억 달러를 빌려주고 이걸 투자자금으로 삼았다. 타이거펀드에서 이를 운영해서 기술주에 투자하는 펀드를 만들었다.
마이크로 소프트와 델, 인텔에 집중 투자한 펀드는 대박을 냈고 올해 평가수익만 4억 달러가 넘었다.
“하하하, 그게 정말이야?”
처음 듣는 소리였는지 제리의 반응은 정말 극적이었다. 하긴 구단의 회계담당자인 이안은 입이 무거워서 구단의 재정상황을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기에 단장인 제리도 구단의 투자이익소리는 처음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구단의 운영으로 돈을 벌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주주들이 이 사실을 알면 난리를 치겠는데.”
규태가 오말리가문에게서 구단을 인수했지만 100%주식을 사들인 건 아니다. 규태가 72.4%의 주식을 보유한 최대주주이지만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나머지 주식을 가진 주주들도 있다는 소리였다.
야구를 사랑해서 구단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투자로 생각하고 장기로 보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대한 구단주식을 매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하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많이 사용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올해는 배당을 많이 해서 나도 부자가 될 테니까.”
회계 상으로는 흑자이니까 쓰지 않으면 세금만 많이 나온다.
“투자이익이라면 현금도 아니잖아? 당장 투자금을 회수할 것도 아니면서.”
“예리한데 그건 내가 가진 자금에서 처리를 할 거야.”
추가로 규태가 구단에 현금을 빌려주는 방식이다. 규태의 말에 제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 정말 네가 부자긴 부자구나. 그 정도 현금을 거침없이 쓸 수 있다니 말이야.”
“이번에 현금이 많이 들어와서 말이야.”
“어디에서? 아! 이번에 회사하나 팔았지?”
규태가 마이크로 소프트에 넷스케이프란 회사를 팔아서 거금을 챙겼다는 소식을 떠올린 제리였다.
일부분 마이크로 소프트의 주식으로 받고 현금으로 받은 금액만 해도 20억 달러가 넘었다.
“가을에 내가 가진 회사가 상장을 할 예정이거든. 이것도 만만치 않게 현금이 들어올 거야.”
규태가 가진 야후 주식 중에 20%의 주식이 공모로 넘어가면 추가로 24억 달러의 현금이 들어온다.
“와우! 정말 미칠 노릇이네. 야! 나도 네가 투자할 때 끼워달라니까.”
“내가 개인적인 투자는 받지 않는다니까. 지난번에 내가 타이거 벤처펀드에 투자하라고 하지 않았었나?”
타이거펀드는 사모펀드의 형식이라 적은 금액을 받지 않지만 타이거벤처펀드는 소액투자도 받았다.
“흠, 그게 오만달러는 투자를 했는데 오년짜리 장기 투자라고 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전화로 확인해봐. 이익이 얼마나 나왔는지 말이야.”
벤처펀드의 특성상 장기투자는 기본이지만 해마다 연말이면 결산을 해서 투자이익을 알려준다. 중간에 돈을 찾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래? 어디 한번 내 돈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아볼까?”
잠시 자리에 앉아서 제리가 준 서류를 살펴보던 규태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친놈처럼 갑자기 허공을 향해 어퍼컷을 내지르며 고함을 지르는 제리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와우! 50만 달러요? Yes Yes.”
시범경기는 경기 결과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아서 인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규태가 홈경기시작 전에 일찌감치 경기장을 찾았을 때 아는 얼굴들이 가득했다. 가볍게 감독인 조 토리와 악수를 하고 친분이 있는 선수들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켄, 테이린은 잘 크죠?”
켄 그리피 주니어의 막내딸인 테이린이 태어났을 때부터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선물까지 보낸 터였다.
“랜디, 올해는 일 한번 내야지.”
“마스터, 올해도 작년처럼 잘 부탁해요.”
“허사이저, 어깨는 괜찮아요. 몸 관리를 잘해서 다시 장기계약을 해야죠.”
돈 잘 쓰고 선수 개개인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 붓는 구단주를 싫어할 선수는 없다.
구단주들 사이에서 또라이라고 불리는 구단주가 정확하게 구단 사장이자 구단주 대행이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힐끔 훔쳐본 감독 조 토리였다.
그에게 작년 초반은 진짜 악몽이었다.
갑작스럽게 장수감독인 라소다의 자리를 물려받아서 다저스의 감독 자리에 올랐지만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팬들은 감독을 자르라고 난리를 쳐댔고 연패를 거듭하다보니 선수들의 사기도 바닥으로 내몰렸다.
흔들리는 조 토리를 잡아준 건 단장인 제리였다. 신임감독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초짜단장인 제리는 전혀 흔들림 없이 구단의 중심을 잡았다.
처음에는 뭘 믿고 저러나 싶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제리는 구단주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팬들이 제아무리 난리를 쳐도 구단주가 아무 말도 않고 지지해주는데 자신이 잘릴 염려는 전혀 없었다.
계약기간 3년 동안은 절대적으로 보장해 주겠다는 계약당시의 약속처럼 제리도 성적을 가지고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적의 반등이 시작됐다.
올스타전후로 다저스의 성적이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마지막에 초반의 연패로 쌓인 경기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2위에 머물렀지만 다저스의 암흑기가 시작될 것이란 전문가들의 의견을 뒤집는 멋진 한해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새해 새롭게 보강된 전력은 여러 팀의 감독을 했던 조 토리도 혀를 내두를 만큼 강했다.
지난 해 구축된 선발진은 빈틈이 없이 강했고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마무리는 더블 A를 초토화 시키고 올라온 도미니카 출신의 리베라를 기용하면서 메꾸었다.
리베라는 처음 선발을 원했지만 구단주의 지시로 인스트락터까지 고용하면서 꾸준하게 돌본 덕분에 마무리실력이 일취월장했단 소리를 들었다.
제리가 스토브리그에서 에릭 캐로스와 맞바꾼 프랑크 토마스도 괴물이었다.
왜 제리가 그토록 프랭크 토마스를 원했는지 스프링 캠프에서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언제라도 3할에 홈런 30개는 넘길 수 있는 타격도 타격이지만 선구안이 진짜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다.
발 빠른 우익수 브렛 버틀러의 뒤에서 2번으로 기용하면 3번 켄 그리피 주니어, 4번 마이크 피아자, 5번 라울 몬데시로 이어지는 타선은 언제라도 30개의 홈런을 넘길 수 있는 강타자들이 포진된 지뢰밭이 된다.
전체적으로 팀 전력이 안정되었지만 아쉬운 건 내야수비였다. 특히 2할 타율을 조금 넘는 팀 왈락이 보는 3루 수비와 2루는 구멍이 나있었다.
오퍼만이 보는 유격수자리도 수비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건 이런 약점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겨울동안 보강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제리가 손을 써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