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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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타이거펀드의 얼굴인 리처드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자신이 직접 앞으로 나설까하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규태가 실리콘 벨리에 틀어박혀서 월스트리트와 거리를 두는 것은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기 위해서다.
블랙먼데이에서 커다란 피해를 본 것은 일반인뿐만이 아니라 거대은행들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연기금과 뮤추얼펀드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이란 남의 다리가 잘려도 꿈쩍하지 않지만 자신의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내도 원한을 갖는다.
더군다나 금전에 관련된 손해는 엄청난 원한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월스트리트에서 자신에게 이를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92년 11월 3일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는 역사처럼 흘러갔다. 한때 20%까지 격차가 벌어져서 부시가 온갖 네거티브전략을 사용해도 백약이 무효했다. 빌 클린턴이 내세운 세대교체론과 국방예산 대규모 삭감, 중산층에 대한 조세 인하, 외국 기업에 대한 조세 인상 같은 경제공약들이 유권자들에게 먹혀들면서 손쉬운 승리를 가져갔다.
거기에 상하원 선거 결과도 민주당이 상원 100석 중 58석, 하원 485석 중 259석을 차지했다.
“리처드, 축하해요.”
“뭘, 이제 시작인데. 가야할 길이 멀어.”
“이제 한자리하겠네요. 클린턴이 어떤 자리를 제안하던가요?”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사무실로 돌아온 리처드의 얼굴은 밝았다. 12년만의 백악관 탈환이었다.
“국무장관 이야기가 나와서 내 전문이 아니라고 거절했네. 경제정책보좌관 자리를 달라고 했지.”
국무장관은 행정부의 넘버 2자리다.
“좋은데요. 리처드를 그만큼 신임한다는 소리잖아요.”
“하하하 아마 그럴걸. 클린턴하고는 주지사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거든. 대선 캠프까지 열정적으로 참가를 했으니 그만큼 대우를 해준다는 거지.”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며 규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양키답게 뒤로 빼는 게 없다.
“그런데 걱정이야. 미국경제가 어려워서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가 고민이야.”
지금까지야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 고민했지만 이제부터는 바닥인 경제를 살릴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1992년 미국대선에서 클린턴의 경제공약은 제조업의 부활이었다. 이를 위해서 슈퍼 301조를 무기로 휘두르며 일본과 독일에 미국상품을 팔려는 시도가 계속된다.
곁다리로 한국도 많이 두드려 맞았다.
“고민할 것도 많아요. 앞으로 미국경제는 바닥을 찍고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정말 그럴까? 아직 지표상으로는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야. 새로운 행정부가 만들어지면 당장 슈퍼301조를 이용해서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거든.”
“그거야 당연하죠. 행정부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리처드는 규태의 경제전망에 반색을 했다.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저성장 고물가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가 새로운 행정부의 화두였다.
“그렇게 해도 수출이 실제로 늘어날지가 고민이야.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형편없이 떨어져서 말이야.”
“자동차와 철강의 수출이 늘어나는 건 힘들거에요. 미국시장을 지키는 것도 버거울걸요. 경제의 중심축이 바뀌고 있거든요. 지금까지는 제조업 같은 굴뚝 산업들이 미국의 경제를 이끌어왔다면 앞으로는 컴퓨터와 IT산업 같은 첨단 기술 산업이 미국경제를 이끌어 나가게 될 겁니다.”
“과연 그럴까? 시장규모가 아직 터무니없이 작은데?”“시장이야 시간이 필요할 뿐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제가 뭐 하러 실리콘 벨리에 틀어박혀 있겠어요.”
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컴퓨터, IT산업의 성장세는 시간이 갈수록 가속이 붙어 시장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투자 쪽이라면 뒤지지 않는 감각을 가진 자네 같은 사람이 실리콘 벨리에 회사를 만드는 걸 보곤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네만. 아직은 시장규모가 너무 작아서 반신반의 하고 있었네.”
“인텔이나 마이크로 소프트의 성장을 보면 알잖아요. 델 컴퓨터나 HP같은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고요. 올해 세계 최고부자가 빌 게이츠잖아요”
포브스에서 발표한 세계최고부자 1위가 빌게이츠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마이크로 소프트의 주식의 규모가 180억 달러였다.
포브스가 추정한 규태의 개인재산은 120억 달러로 8위였다. 규태의 재산은 대부분 비상장회사인데다가 역외펀드와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한 투자라 밖에서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자네 재산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으니 그 정도로 추정한 거겠지. 상장주식에 개인적으로 투자한 금액만 표시가 될 테니까.”
“부동산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투자한 재산의 주식 포트폴리오가 대부분이 IT산업에 연관된 주식들이니까요. 앞으로 이쪽 주식들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질 겁니다.”
석유업체와 철강, 자동차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해도 컴퓨터와 연관업체들의 주가는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다.
지금 보유하고 있는 주식들을 듣고만 있어도 계속 가격이 오르니 팔 생각도 없었다.
“타이거펀드가 투자한 성장주들의 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네만. 그 정도까지 성정을 한다고?”
성장주의 주가전망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게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IT산업을 보는 투자자들 가운데 시장크기가 조만간 정체되고 거품이 꺼질 것이란 견해도 많았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기술주의 그래프를 보면 선뜻 투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IT산업에는 엘 고어가 신경을 많이 쓰더군. 상원의원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군.”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엘 고어는 부통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보통신에 관련된 부분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힘 있는 부통령이란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IT라? 내가 볼기에도 성장세가 무시무시한건 사실이지. 조만간 엘 고어와 자리를 한번 마련하겠네. 자네가 만든 넷스케이프에도 관심이 많더군.”
IT와 환경에 관심이 많은 엘 고어와 만남이라면 규태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와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시간이 나면 한번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그보다는 루빈의 움직임은 어떤가요?”
“재무장관 자리를 노리는 것 같은데 무난하게 차지할걸. 현업에 있던 사람이라 누구보다 실무에 밝기도 하고. 반대가 있기는 하겠지만 월스트리트에서 지원을 하고 있으니 무난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야.”
“법을 바꾸는 걸 노리겠죠?”
루빈이 클린턴의 선거캠프에 들어온 건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다. 그쪽의 숙원이라면 글래스 스티걸 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뭐, 아마도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겠지. 나도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야.”
투자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글래스 스티걸 법은 타이거펀드와 규태에게도 유리할게 없었다.
반대로 법의 존속을 바라는 의견도 만만치가 않다.
“굳이 리처드가 앞에 나서서 총알을 맞을 필요는 없으니까 저쪽에서 나서주겠다면 그냥 동조만 하세요.”
“그래야겠지. 후임사장은 어떻게 할까요?”
“외부에서 데려오기도 그렇고 그냥 내부에서 올리는 것으로 하지. CEO로 샨이 어떤가? 아라타는 타이거 제펜의 사장으로 하고.”
리처드의 후임자 추천은 타이거 펀드에서 외환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샨 나링햄이었다.
“샨이라? 나쁘지 않네요. 그리고 회장 자리는 지금처럼 비워둘게요. 나중에 행정부를 그만두고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고맙긴 한데 이제 월가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백악관에서 나오게 되면 은퇴해야지. “
리처드가 손을 내저었다.
임기를 마치면 많은 나이 때문에 규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지는 남겨두었다.
“그래도 모르죠. 돌아갈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하잖아요. ‘
“그래 그정도라면야.”
굳이 리처드도 더 이상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아닌가.
대통령 추임식이 끝나고 원했던 대로 리처드는 백악관의 경제정책보좌관의 자리에 올랐다.
엘 고어의 초대를 받은 규태가 백악관을 찾았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규태를 맞이했다.
취임식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없을 대통령이 부통령 실에서 규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우리 큰 후원자님이 오셨구먼. 전화통화만 몇 번하고 얼굴한번 내비치기가 그렇게 힘이 드는 건지.”
“하하, 뭐 여기저기 벌려 놓은 일들이 많아서 바쁩니다.”
선거자금을 지원한 다음에 클린턴에게 전화로 감사인사를 받았지만 이렇게 백악관에서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는 일이 많기는 하더군.”
“많지요. 아주 정신이 없어 죽겠습니다.”
빌 클린턴에게도 규내는 나쁘지 않은 후원자였다.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하면서도 얼굴한번 내비치지 않은 게 서운하지는 했지만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리처드를 보내주었으니 크게 따지기도 뭐했다.
“내가 이렇게 이 자리에 찾아온 건 자네가 후원해준 덕에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서야. 대통령 취임식에 불렀는데 시간이 없다고 자네가 참석하지 않았잖아.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규태가 멋쩍게 웃었다.
“제가 사람 많은 곳에 나서는 걸 싫어해서요.”
“앞으로는 자주 참석해야 할 걸세. 앞으로 자주 보자고.”
바쁜 일정 탓인지 잠시 규태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빌 클린턴은 금방 자리를 비웠다.
“하하하, 예상하지도 못했던 만남이네요.”
“빌이 자네를 무척이나 궁금해 했거든. 막대한 선거자금 지원하면서 얼굴한번 못 봤다고 서운하다면서. “
이번에는 이번 약속의 주인공인 엘 고어가 나섰다.
“엘 고어요. 리처드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던데요.”
“크게 재미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필요한 게 있어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미국산업의 중심축이 IT같은 첨단 산업으로 바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걸 행정부에서 어떻게 지원하면 되겠소?”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클린턴과 달리 엘 고어의 말투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교수처럼 딱딱했다.
“정보고속도로가 필요합니다.”
“정보고속도라? 아주 좋은 말이로군.”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란 말은 원래도 엘 고어가 썼던 말이다.
“IT산업의 기반은 누가 뭐래도 빠른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을 타고 많은 정보가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올라갑니다.”
첨단의 광(光)케이블 망으로 연결하여 음성자료, 영상 등 다양한 대량의 정보를 초고속으로 주고받는 최첨단 통신시스템이다.
평소에도 관심을 가졌기에 규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금방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엘 고어는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가 없었다.
규태는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이 재미없는 정치가와 나누는 이야기는 아주 중요했다. 정보고속도로 사업이 시작돼야 규태가 시작한 넷스케이프와 야후 같은 IT기업들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규태의 설명이 계속되자 엘 고어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