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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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세 논의
“연봉 총액을 한정하고 이를 초과하는 금액에 벌금을 때리는 겁니다. 연봉총액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걸 억제하는 효과도 있고 이 벌금을 전체구단에 배분하면 중소형 구단을 지원하는 의미도 있고요.”
듣고 보니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셀러리 캡을 도입하자는 것도 중소형구단이 지불할 수 있는 금액에 한계가 있으니 한두 명의 선수들에게 너무 큰 연봉 지급을 못하게 막자는 것이다.
셀러리 캡이라면 중소형 구단주들이 돌아오는 게 있으니 만족할 만한 제안이다. 선수들을 설득하기에도 쉬었다.
하지만 왜 굳이 반대편 입장일 다저스의 사장이 이걸 제안하는지 의문일 뿐이다.
“어째서 사치세를 도입하면 손해를 볼 다저스의 사장인 당신이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대신에 커미셔너 대행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걸 해준다면 구단주 회의에서 사치세에 대한 안건을 정식 제안으로 올릴 의사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귀를 쫑긋 세우는 버드셀릭을 보며 규태가 쓴웃음을 웃었다. 프로야구가 약물리그로 전락한 책임의 90%는 눈앞의 버드 셀릭 탓이었다.
약물이건 뭐건 어떤 수를 사용해도 MLB의 인기만 올리면 된다는 식으로 커미셔너가 행동했기에 선수들도 약물을 서슴지 않고 사용한 것이다. 이건 방조가 아니라 조장이었다.
“약물을 규제하는 전담기구를 강화하고 검사를 엄격하게 시행하죠. 경기가 끝난 다음에 불시에 검사를 해서 걸리는 선수가 나오면 엄격한 제제를 가하는 겁니다.”
지금도 약물을 전담하는 기구가 있지만 형식적으로 만들어서 배치된 인원은 소수였다.
“그건 흐음.”
버드셀릭도 뜻밖의 제안인지 선뜻 대답을 못했다.
“이걸 확실하게 합시다. 사치세 도입을 하자는 제안에 도움을 받으려면 약물을 엄격하게 규제하자는 제안도 받아야 합니다. 타협은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사실 약물이건 뭐건 성적이 나오면 야구 판의 인기가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굳이 그걸 막을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 약물로 기록을 내면 뭐합니까? 이제부터라도 검사강화를 하지 않으면 선수들이 전부 약물로 빠진다니까요.”
“그건 과장된 걱정입니다. 지금 하는 검사로도 충분합니다.”
규태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버드 셀릭은 이미 충분하다는 말을 하지만 속셈이야 뻔했다. 약물이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선수들의 경쟁을 유도해서 MLB의 인기를 올리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완강한 버드 셀릭의 태도를 바꿀 말이 규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형평의 문제입니다. 약물로 성적을 올리면 나머지 선수들이 박탈감을 느끼고 약물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행크 아론의 홈런 기록을 약물중독자가 깬다고 하면 그걸 팬들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행크 아론의 기록 이야기가 나오자 버드셀릭이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버드셀릭은 행크아론의 광팬이었다. 행크아론의 말년에 밀워키 브루어스에 2년 정도 머문 것을 가지고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지정할 정도였다.
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구단주들은 기본적으로 야구를 좋아해서 구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버드 셀릭도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잔뜩 흥분했던 버드셀릭이 진정하자 규태는 차분하게 그를 설득했다. 약물에 관대했다는 걸 제외하면 버드셀릭은 2015년까지 장기간 커미셔너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엄격하게 약물을 규제하자는 소립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야구에 약물중독자들의 마수가 뻗어오기 전에요. 약물로 기록을 만들면 뭐합니까.”
“알겠습니다. 심각하게 제안을 고려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약물 검사를 강화하자는 제안에 완강하던 버드 셀릭도 행크아론의 이야기가 나오자 순순하게 수긍을 했다.
이야기가 부드러워지자 버드 셀릭과 여러 가지 이야기와 나눈 끝에 돌아가는 차안에서 규태는 마음을 놓았다.
샐러리캡은 다저스 왕조건설을 꿈꾸는 규태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안건이고 사치세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깟 벌금이야 웃으면서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약물의 문제를 미리 막으면 꼴 보기 싫은 놈들이 약물의 힘을 빌려 홈런왕 경쟁이라고 날뛰는 꼴을 보지 않아 좋았다.
약물로 오염된 메이저리그 최대의 피해자는 이젠 다저스의 선수인 캔 그리피 주니어였다. 매해 40홈런이상을 기록하며 행크 아론의 기록에 근접했지만 결정적으로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왕 경쟁이후로 매스컴의 관심도 멀어졌다.
물론 둘 다 약쟁이들이었다. 이걸 처음부터 막아버리면 캔 그리피 주니어의 인기가 떨어질 염려도 없었다.
‘자식이 안 그런 척 하더니 행크 아론 기록이 나오니까 입에 거품을 무네. 이걸로 캔 그리피 주니어의 문제도 해결이 되겠지? 부상만 안당하면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깰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귀여운 테이린이 보고 싶네. 이제 막 기어 다닐 텐데 사진이라도 보내 달라고 할까?’
규태는 캔 그리피 주니어의 막내딸이 태어나자 선물공세를 퍼부으며 극진하게 대했다. 19살에 사고를 쳐서 첫아들을 낳은 캔 그리피 주니어였다. 아버지 캔 그리피가 캔 그리피주니어를 낳은 것도 19살에 사고를 처서였는데 부전자전이라고나 할까.
버드 셀릭이 행크 아론의 광팬이라고 욕했지만 사실 규태는 캔 그리피 주니어의 광팬이었다.
규태가 구단주 대행으로 구단주 회의에 참석해서 제안한 사치세 문제는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제일 펄쩍 뛴 사람은 역시 양키스의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였다.
감독과 단장 자르기를 밥 먹듯이 하고 스타선수들을 막대한 연봉으로 유혹해서 끌어들인 막장 운영의 대가였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구단운영에 관여할 때는 우승을 하지는 못했다.
하여간 양키스를 악의 제국으로 만든 그였기에 사치세 제안은 충격이라면 충격, 그것도 양키스와 돈을 쓰기로는 쌍벽을 이루는 다저스의 구단주 대행이 한 제안이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다저스는 구단주가 바뀐 다음부터 FA가 되는 선수들에게 막대한 연봉을 거침없이 지불했다. 조만간 다저스가 계약하는 FA선수들은 연봉 천만 달러도 넘을 거란 예상이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사치세라니! 그걸 왜 도입해! 게다가 자네가 이일에 왜 앞장서는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자진해서 벌금을 내겠다니!”
잠깐 가지는 휴식시간에 스타인브레너는 규태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거친 그의 성격에 욕을 퍼붓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럼 처음 이야기가 나온 대로 셀러리 캡을 받아들일까요?”
“그것도 미친 소리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소리야!”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사무국과 법정다툼까지 생각하던 스타인브레너였다.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내는 스타인브레너 저편에서 역시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는 컵스의 구단주와 레드삭스의 구단주의 모습도 보였다.
하나같이 규모가 크고 열광적인 팬들을 보유한 구단주들은 규태의 제안에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확실하게 의사를 표시해야 했다.
“셀러리 캡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사치세는 다릅니다. 벌금 좀 내고 원하는 대로 연봉을 지불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반대해도 구단주 대다수는 셀러리 캡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메이저리그에 소속된 구단의 숫자는 26개, 여기에서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구단주들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셀러리 캡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힘이 있고 부자라고 하지만 구단주회의에서는 소수라는 의미였다.
“그럴수록 여기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하나로 모아서 반대를 해야지!”
“반대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저들의 말도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돈질을 해서 선수를 수집하고 우승을 하면 뭐합니까. 상대팀도 뛰어나서 치고받아야 인기가 올라가지요.”
“돈질을 하는 게 뭐가 나빠! 선수들도 좋아하는 일이야.”
스타인브레너의 고함에 규태가 쓰게 웃었다. 작은 동네에서 힘 좀 쓴다고 자랑하고 살더니 감각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한번 해볼까요? 전 페이롤이 1억 아니 1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해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규태의 말에 스타인브레너가 얼어붙었다. 아니 그와 스타인브레너를 지켜보던 구단주들이 전부 하나같이 얼어붙어 버렸다.
“전 자신 있습니다만 앞으로 FA로 나오는 선수들을 전부 긁어모아볼까요? 돈질로는 제가 어디 가서도 뒤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구단주들이야 정보가 빼꼼하다.
투자은행인 리만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가지고 있는 개인재산이 추정불가라는 소리를 듣는 젊은 부자였다.
그가 입에 담는 금액은 듣기만 해도 헉 소리가 나오는 거금이다.
양키스가 돈을 많이 쓴다고 해도 구단가치가 3억 달러를 넘지 않는다. 그것도 규태가 다저스를 3억 달러라는 오버페이로 구입해서 그렇게 오른 것이다.
그런데 연봉 페이롤로 10억 달러?
이건 앞으로 FA로 나오는 선수를 건드릴 생각도 말라는 소리였다.
“그... 그건 미친 짓이야!”
스타인브레너가 알아주는 부호라고 해도 전 재산이 10억 달러로 추정됐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야 그보다 한참 적었고.
그의 전 재산을 일 년 페이롤로 사용하겠다고 협박을 내뱉다니!
“제가 가진 재산은 저도 얼마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 재산에서 일 년 페이롤로 10억 달러를 사용한다고 해도 크게 표시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웃으면서 하는 규태의 말에 구단주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크기가 작은 물고기들이 자기가 잘났다고 아웅다웅하던 연못에 거대한 고래가 끼어들은 것이다.
“흐음, 생각해보니 좋겠네요? 레드삭스에서 모 본을 데려오고 양키스에서는 지터와 포사다를 데려오면 되겠네요. 투수는 앤디 페티트가 있군요.”
레드삭스에서 절망적인 타선을 이끄는 모 본이었다. 그가 빠지면 가뜩이나 약한 레드삭스의 타선은 멸망이었다. 그리고 양키스의 희망인 유격수 데릭 지터와 포수 호르헤 포사다는 절대 내줄 수 없는 핵심전력이었다.
하나같이 팀의 핵심을 입에 담는 규태의 말에 구단주들의 모골이 서늘해졌다.
“절대 내줄 수 없어! 입에 담지도 말아.”
스타인브레너의 고함에 규태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당장 빼오겠다는 게 아니라 FA가 되면 데려오겠다는 소립니다. 돈질을 하면 선수들의 마음도 움직이겠지요. 돈, 더 많은 돈이 여러분이 해오던 방식 아닙니까?”
냉정하고 차가운 규태의 시선을 느낀 구단주들이 고개를 돌렸다. 규태의 말이 이루어질 때를 생각하면 정말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은 규태의 말이 절대로 거짓이 아니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구단주 회의에서 사치세 제안이 부결되면 규태는 정말 내년에 나오는 FA를 모조리 끌어 모을 작정이었다.
돈질로 흥한 자 돈질로 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