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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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미국대선
92년 미국대선은 로스 페로의 열풍이 불었다.
고인 물처럼 썩어버린 양당정치를 바꾸겠다며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로스페로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행진을 계속하자 초반 압도적인 지지율 격차 속에 여유롭게 재선행보를 보이던 부시대통령 진영에 폭탄이 떨어졌다.
재선은 당연히 가능하고 얼마나 많은 표차로 이길 것이냐는 따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설마 하던 로스 페로의 대선출마가 현실화 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이게 사실인가? 어떻게 지지율이 이렇게 나올 수가 있어!”
화를 내는 부시를 캠프 책임자인 베이커가 달랬다.
지지율의 변화를 보여주는 분석표를 보며 조지 부시는 이마를 움켜쥐었다. 로스페로가 출마하면서 표를 깍아 먹는 건 클린턴이 아니라 자신의 표였다. 이라크전의 압도적인 승리를 기반으로 50%를 넘어서 6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라 당선도 달랑달랑했다.
조지부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리가 살아있어야 했는데.”
“그 작가 살아있었다면 방법을 찾아냈겠지.”
리 애트워터는 전설적인 악명 높은 선거 전략가였다. 조지부시가 민주당 후보였던 듀카키스를 물리치고 41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데 엄청난 힘을 발휘한 네거티브전략은 전부 그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90년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쩔 수가 없네. 로스 페로를 깎아내려야지. 애송이 클린턴은 약점이 많아 파면 팔수록 나오는 게 많으니까. 로스 페로는 자네와 이미지가 겹쳐서인지 그 작자를 꺾어야 이길 수가 있네. 최선은 로스 페로가 중도에 포기하게 만드는 거야.”
“이번에도 또 그 짓을 해야 하는 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네거티브전략을 써먹었지만 이 방식은 패자만이 아니라 승자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캠프를 맡고 있는 제임스 베이커를 보며 하소연을 했지만 이기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법이다.
“사람들을 동원하겠네. 자넨 눈감고 있어. 이럴 때는 알면서도 모른 채 하는 게 득이야.”
“......”
침묵은 승낙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베이커의 뒷모습을 보며 조지 부시의 얼굴이 굳어졌다.
***
‘진짜 엄청나네’
아침에 출근해 아침 정례회의를 하던중에 야후의 정치 뉴스를 보던 규태가 탄식을 했다. 말로만 들었던 로스 페로 열풍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거센 바람이었는지 이러다가 설마 당선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로스 페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개혁당이란 걸 만들었지만 지지하는 의원하나 없는 로스페로였다. 최초로 무소속 대통령이 나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따져보는 기사들이 쏟아질 정도로 그의 인기가 높았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로스 페로를 저격하는 기사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건 누구 작품인지 알 것 같고.
“정말 로스 페로가 되는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저번에 선거운동 하는걸 본적이 있는데 열기가 엄청나더라고.”
호들갑을 떠는 마크와 가능성이 높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리였다.
세상 변화에 둔감한 곰팅이들마저 로스 페로를 알고 열기를 느낄 정도였다.
“로스 페로가 그렇게 인기가 좋은가요?”
규태의 사무실에서 하는 아침정례회의에 참여멤버가 늘었다.
뉴욕에 머물던 오선한이 팔로알토에 머물면서 회사 일을 도왔다. 믿을 만한 사람이 부족하던 규태에겐 천군만마였다.
“흠, 국민당을 창당한 정주영 회장 알죠?”
“한국 사람이 그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죠.”
“로스페로하고 똑 같다고 보면 되요.”
정치자금으로 뜯기는 돈으로 내가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정주영이나 양당체제속에서 고인물이 되어버린 미국정치를 개혁하겠다고 나선 로스페로의 구호는 비슷했다.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하며 대선에 나가서 얻은 지지율도 판박이처럼 같았다. 대선에서 로스페로의 득표율은 18.9%, 정주영의 득표율은 16.3%였다.
“아!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이해가 되네요.”
미국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로스 페로 열풍을 오선한도 규태의 설명에 금방 이해했다.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한국에도 로스 페로와 비슷한 사람이 대선에 나온다고 해서.”
제리의 질문에 규태가 대답을 해주었다.
“오호! 그래?”
“한국에서도 재벌출신이 대통령 선거에 나온다고?”
대만출신이라 관심을 가지던 제리가 물었다.
“어딘데?”
“현대라고. 한국에서 가장 큰 기업집단중 하나의 수장이지.”
“아! 거기. 나도 알아. 한국도 미국이랑 정말 비슷하네? 그런데 정말 당선될까? 미국은 바람이 너무 거세서 당선될 것도 같은데.”
제리의 말에 규태가 코웃음을 쳤다.
“될 리가 있겠냐? 양당체제가 얼마나 뿌리가 깊은데 바람은 그냥 바람일 뿐이야. 불 때는 거세 보여도 지나가면 그뿐이야. 지지율 20%가 한계야. 정치판에 무소속으로 나와서 당선되려면 1차 대전 패배 같은 악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히틀러와 같이 정치판에 기반이 없는 신인이 정권을 잡으려면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도 대공황이 일어나는 것 같이 바닥을 기어야 한다.
“그나저나 리처드가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 인줄은 몰랐어요.”
“저도 몰랐습니다.”
선거운동을 하는 빌 클린턴의 옆에 착하고 달라붙어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리처드의 사진을 발견하고 규태가 머리를 내저었다.
마크와 제리는 리처드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뉴욕사무실에서 일했던 오선한은 종종 리처드를 보았었다.
사무실에서 서류만 읽고 있던 리처드와 선거판을 누비는 리처드의 모습은 비교가 되었다.
“애초에 직업을 잘못 잡았었나 보네요.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워싱턴에서 일을 했어야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죠.”
“가업 아니었습니까. 리처드의 집안사람들 대부분이 투자 쪽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클린턴 옆에 있는 저 할아버지가 지난번에 규태를 찾아온 사람이지?”
“그래 클린턴 캠프에 참여한다고 찾아왔었지.”
“선거자금 엄청나게 냈겠네.
“엄청나게 들고 나가셨습니다. 이기지도 못할 선거에 지원하는 금액이 너무 크다고 회사에서 불평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타이거 펀드와 빌 클린턴 캠프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오선한의 말에 규태가 피식 웃었다.
“이제는 그런 말이 쑥 들어갔겠네요?”
“예, 당연하죠. 이기면 한자리 차지할거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월 스트리트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로버트 루빈이라고 골드만에서 회장하던 사람이 캠프에 있습니다.”
“그쪽에서 한발 늦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리처드에게 밀려서 구석에 처박혀 있답니다.”
한발이 아니라 두발은 늦은 셈이다. 리처드가 불리하던 초반부터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 것은 물론이고 선거자금도 풍족하게 들고 갔다.
뒤늦게 참여를 하고 선거자금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는 로버트 루빈에 비해 리처드의 발언권이 높은 게 당연했다.
들을수록 속이 시원했다.
“정치이야기는 그만하고 사업이야기나 하자. 야후의 방문자 숫자는 그대로지?”
“일일 방문자 숫자가 백만에서 넘어가지를 못하네.”
“그걸 유지하는 게 중요해. 아직 그 이상은 시스템의 한계야.”
“그러지 말고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를 내보내면 어때? 자금은 충분하잖아.”
제리의 말처럼 야후에는 실탄이 충분했다.
어지간한 벤처회사라면 들어오는 자금은 없고 나가는 자금만 많아서 회사가 돈을 구하느라 뛰어다니기 바쁘지만 규태의 회사는 달랐다.
이미 충분한 자금을 확보해 여유가 있었다. 모자라면 규태의 개인돈으로 증자를 하면 된다.
제리의 제안에 규태는 잠시 망설였다.
생각보다 야후의 성장속도가 빨랐다. 93년은 돼야 인터넷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았는데 이전보다 빠르게 인터넷이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로스페로 열풍의 상당부분도 인터넷 사용인구의 증가와 궤를 같이했다.
“그래 제리말대로 한번 대대적으로 광고를 때려보자. 신문광고보다는 TV광고가 효과가 좋을 것 같다.”
“정말? TV광고비가 많이 나올걸?”
“이런 규태의 현금을 무시하는 거야? 너 진짜 재산이 얼마야? 얼마 전에 포브스에서 나온 기사를 봤을 때는 잘모르겟더라고?”
“남의 재산에 관심을 가져봤자지. 나도 잘 모르는데.”
규태의 재산은 비상장회사들이 대부분이라 추정이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투자한 기술주들이 상승하면서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포브스 기자도 추정하면서 골머리가 아팠을 것이었다.
“기사를 보니까 너 마이크로소프트 대주주라면서?”
나스닥에 상장된 마이크로 소프트의 주가 상승률은 탄탄했다. 해마다 두 배에서 세배정도의 주가가 올랐다.
“최대주주는 당연히 빌 게이츠지, 나는 아마 두 번째나 세 번째정도될걸.”
2대주주인 폴 앨런이 얼마나 주식을 팔았는지 모르지만 규태는 25%의 마이크로 소프트 주식을 들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 정도는 계속 유지할 생각이었다.
“거기에서 넷스케이프를 팔라고 연락이 오던데 어쩔 거야?”
처음에는 인터넷을 무시하던 마이크로 소프트였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인터넷을 무시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들이 노리는 첫 번째 표적이 넷스케이프였다.
막대한 현금을 가지고 기업을 사냥해서 뒤처진 시간을 보충하겠다는 전략이지만 주인인 규태가 아직 팔 마음이 없었다.
“아직 이야. 제시하는 가격이라고 해야 10억 달러도 안될 텐데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라고.”
“와아! 역시 부자의 포스. 10억 달러를 고작이라고 하네.”
“넷스케이프를 들고 있으면 얼마가 될지 몰라. 야후의 성장에도 필요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야.”
넷스케이프를 마이크로 소프트에 파는 건 당연했다.
인수하면 제일 잘 사용할 수 있는 회사였으니까. 반대할 것으로 예상했던 마크도 규태의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전부터 몇 번이고 넷스케이프를 어째서 마이크로소프트에 파는 것이 최선인지를 설명했었으니까.
마크는 넷스케이프 주식 5%를 가지고 있는 주주였다. 비싼 가격에 팔릴수록 부자가 된다.
“그러고 보니 마크도 부자네? 5%를 가지고 있잖아? 10억 달러만 해도 5천만? 그런데 이걸 싸다고 규태는 안 판다는거 아냐.”
“적어도 50억 달러는 받아야지. 그것도 내가 대주주라 세일한 가격이야.”
“와아! 부럽다. 둘에 비교하면 나는 정말 거지네.”
아직 제리의 야후 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제리가 마크를 부러워할 이유가 충분했다.
“걱정하지마라 너도 알아서 챙겨 줄 테니까.”
“역시 믿고 있었다니까.”
규태가 이런 말을 하기를 노렸는지 제리가 빙긋하고 웃었다.
규태가 신경을 써주어서 자리를 잡은 마크와 달리 제리는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분사를 하면서 야후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실적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