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
92년 미국대선
“OK 제법 쓸만한데.”
새로 바꾼 포맷을 한참동안 시험해본 규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옆에 서있던 제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규태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퇴자를 맞은 게 몇 번이었던가.
개발에는 젬병이지만 훨씬 발달한 인터넷을 사용해본 유경험자였기에 부족한 부분이 나왔을 때 매섭게 질책을 퍼부었다.
“아우! 오늘은 집에 갈 수 있겠다.”
“아직 포기 못했냐? 여기가 네 집이라니까.”
슬프게도 벤처회사는 직원을 잡아 갈아 넣는 것으로 실적을 만든다. 월화수목금금금이 근무 일자였다.
퇴근시간이란 것도 따로 없으니 직원들 대부분이 월세가 아깝다며 살던 아파트 계약을 해지하고 회사에 둥지를 틀었다. 개중에는 제리처럼 퇴근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도 존재했지만.
“나는 포기 못한다.”
한 달에 한번 들어갈지라도 집은 집이란 생각이었다.
“그래봐야 오가는 시간만 아깝지.”
비싼 월세 탓에 회사에서 먼 곳에 스튜디오를 구해서 지내느라 제리의 출퇴근시간이 길었다.
“그래도 그게 내 유일한 낙이라고. 집까지 자동차 몰고 가면서 음악 듣는 게 내 유일한 휴식이야. 그것까지 포기하면 내 머리가 터질 거야.”
구글의 창업자 레리 페이지가 사용해 검색엔진을 만든 페이지랭크는 이론적으로는 크게 복잡하지 않다. 기본적인 개념은 더 중요한 페이지는 더 많은 사이트들의 링크를 받는다는 사실에 기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걸 실제로 적용해서 정확한 검색엔진을 만드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레리는 뭐라고 해?”
“레리가 천재기는 하지만 아직 학부 1학년생한테 너무 기대가 큰 거 아니야? “
이전 생에는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미시간대를 다녀야 할 레리가 어쩐 일인지 스탠포드의 학부과정에 다니다가 회사에 들어왔다. 어쩌다 쓸려들어 왔는지 몰라도 당연히 만든 당사자니까 기대를 하는 것이다.
“이쪽 바닥에 나이가 중요하냐? 천재인지 아닌가가 중요하지.”
“그래, 나는 천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제리가 머리가 뛰어난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투덜거렸지만 규태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말을 해봐야 야후를 만든 제리도 어디 가서 뒤떨어지지 않는 인재다.
“몰라, 작업 끝냈으니까 애들한테 오늘은 식당에 모이라고 해. 바비큐나 굽자.”
회사주변에는 식당이 없다. 식사한번 하려면 한참을 나가야 해서 회사에 식당을 만드는 건 필수였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도 멀리나 갈수가 없는 벤처의 한계 탓에 술을 마시려면 식당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고기를 구워 먹으며 작은 파티를 벌였다.
직원들과 맥주를 들이키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규태에게 예고 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리처드였다. 조금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나타난 리처드의 모습에 규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걱정이 앞섰다.
“음악소리가 요란한걸 보니까 파티라도 하고 있었나보군. 자네가 골짜기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으니까 젊은 사람이 움직여야지 나이 먹은 내가 이렇게 바쁘게 움직여야 하나.”
“바쁘긴 뭐가 바빠요. 하긴 요즘 주말마다 낚시 다니느라 바쁘긴 하겠네요. 여기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너무 시끄러우니까 사무실로 가죠.”
시티은행의 지분인수 작업으로 진이 빠진 것 같더니 워싱턴포스트지의 지분매매에 얼굴을 내민 것 말고는 한가하게 사무실을 지킨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여기는 월가하고는 확실히 많이 다르기는 하군. 직원들이 입고 있는 옷하며 사흘은 잠을 못잔 듯한 부스스한 몰골들 하며 말이야. 월가에서 저런 몰골이면 당장 회사에서 쫓겨나.”
한눈에 보아도 비싼 정장을 차려입은 리처드의 방문이 신기한지 직원들이 파티도중에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여긴 실리콘 벨리잖아요. 너드들의 성지죠.”
“자네 옷차림을 보면 그나마 낫군. 다들 청바지를 입었는데 자네만 캐쥬얼슈트 차림이니 말이야. 여기 같은 분위기는 대학졸업하고 처음이라 조금 어색해.”
정장을 입고 월가에서 평생을 보낸 리처드의 눈에 비친 자유분방한 실리콘 벨리 벤처회사 직원들의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나야 달라붙는 청바지보단 캐쥬얼슈트가 편하니까요. 그런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예요?”
“대선이 가까워지고 있지 않나? 클린턴 대선 캠프에 참가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네. 고민끝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사주의 허가는 받아야지.”
“이번에도 민주당인가요?”
“당연하지. 나도 그렇지만 월가는 전통적으로 민주당후보를 지지한다네. 이번에도 가능성이 높지 않아서 문제지. 하필이면 선출된 후보가 빌 클린턴이라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면 캠프에 참여하기로 한 리처드도 빌 클린턴의 당선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는 모습이다.
“빌 클린턴의 당선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나보군요?”
“당연하지 않나. 아칸소주지사를 오래했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무명에 불과한 젊은 정치인이야. 이번에 떨어지면 타격을 크게 받을 텐데. 다음 대선에 나와 줬으면 가능성이 높았을 텐데 말이야.”
빌 클린턴은 예일대를 졸업한 다음 아칸소주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78년 32살의 나이에 주지사가 되어 역사상 제일어린 나이에 주지사의 자리에 오른 기록을 세웟다. 중간에 한번 떨어진 2년을 제외하고는 92년까지 아칸소주지사를 지냈다.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주지사라고 대답해야 할 사람이었다.
92년 대선은 이라크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부시의 재선 가능성을 높게 보아서 민주당 후보는 다들 버리는 카드로 여겼다.
골수민주당원인 리처드가 보기엔 아까운 젊은 인재하나가 이길 가능성 낮은 대선에서 소모되는 꼴이었다.
“글쎄요 내가 보기엔 이번이 기회인 것 같은데요? 부시가 정치는 잘했을지 몰라도 경제는 엉망이잖아요.”
전임인 레이건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지키느라 이라크 전에 쏟아 부은 전비가 얼마인가. 쌍둥이 적자로 대변되는 미국경제의 침체는 시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민주당에서도 이럴 때 거물이 나와서 한번 제대로 붙어줘야 하는데 말이야.”
“거물 누구요?”
“......글쎄?”
리처드도 딱히 생각나는 인물이 없는 모양이었다. 레이건이 연임하고 부시가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12년이 넘는 기간을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다.
민주당에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후보가 사라진 것이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죠. 그러니 빌도 나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세상이 변하고 있는 타이밍에 맞춰서 나왔으니 운이 좋다고 봐야겠죠.”
“그럼 자네는 클린턴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건가?”
규태가 투자만이 아니라 정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는 리처드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태어난 베이비부머들은 딱딱하고 엄숙한 정치에 질려있어요. 관심도 정치보다는 경제구요, 빌 클린턴은 미국사회의 주축으로 자라난 그들의 욕망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존재니까. 이번 대선의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죠. 거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까지 함께 출마하잖아요.”
“도움을 주는 사람? 로스 페로? 그자는 오히려 민주당의 표를 깎아먹을 거라고 정치 전문가들이 예상을 하던데?”
양당제를 개혁하겠다면 새로운 당을 만들고 후보로 나선 로스 페로는 큰 인기를 끌면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개혁적인 성향으로 페로가 출마하면 민주당의 표를 잠식하는게 아닌가 해서 골머리를 아파했다.
로스페로는 EDS를 제너럴모터스에 매각해서 큰돈을 번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79년 이란혁명당시 자사 직원 2명이 피납되자 전문가인 아서 시몬스대령을 고용해서 인질구출에 성공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미국의 양당제도를 비판하면서 92년 대선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해서 바람몰이를 하는 중이었다. 양당체제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은 정도로 민주와 공화, 양당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대단했다.
“반대죠. 로스페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화당 지지자일 겁니다. 민주당의 표를 깎아먹는 것 보다는 공화당 쪽의 표를 잠식하는 부분이 클걸요. 로스 페로 바람이 이어지면 부시대통령이 타격을 받을 겁니다.”
“흠, 확실히 로스 페로는 전쟁영웅의 분위기가 나지. 그래서 자네는 이번에는 민주당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건가?”
전통적인 양당 체제에서 돌연히 튀어나온 로스 페로라는 미국정치계의 이단아는 전문가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예, 이길 가능성이 크긴 한데. 문제는 다른데 있죠.”
규태가 말하는 것을 이해한 리처드가 혀를 찼다.
“그래 부시 그 작자는 진흙탕 싸움을 좋아하지. 상황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악의적인 흑색선거전을 시작할 테지.”
부시가 중앙정보부 국장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지난 대선에서 부시진영은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도 엄청난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을 겁니다. 빌 클린턴은 젊지만 약점도 많잖아요. 그걸 이겨내야지요.”
빌 클린턴은 정치인으론 젊다 못해 어린 32살의 나이에 주지사자리에 올라서 여자문제가 많았다.
“여자문제는 잘 피해가야지.”
“문제는 경제입니다. 부시가 아무리 진흙탕을 만들어도 클린턴은 끝까지 이점을 밀고 나가야 승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알았네. 나도 자네가 말한걸 캠프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해보지. 그런데 정치자금은 어떻게 할까? 관례적으로는 200만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돈 문제를 입에 담으며 어울리지 않게 리처드가 규태의 눈치를 보았다.
정치자금의 기부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 연방선거위원회는 요청이 있을 때 200달러 이상의 기부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선거에 금권이 작동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는데 이게 잘 돌아갈 리가 없다.
후보에게 직접 주는 하드머니는 정치자금 규제를 심하게 받지만 정당에게 주는 소프트머니는 연방선거위원회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았다.
“리처드가 민주당 캠프에 들어간다는데 200만 달러로 되겠어요. 1,000만으로 지르죠. 그리고 부족하다면 1,000만을 더해도 되요.”
“그렇게나? 너무 많지 않을까?”
“나중에 한자리를 차지하려면 남들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 크게 질러야죠. 이번에 페로가 중도포기를 하지만 않고 크게 정책적으로 실책을 하지 않으면 이길 거예요. 이제 냉전도 끝났는데 부시는 너무 옛날 사람 같아서.”
“하긴 그렇지! 자네 말을 들으니까 승산이 보이는구만. 그래 나도 한번 적극적으로 나서보겠네.”
클린턴 대선 캠프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승산이 높지 않아 보였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왔던 리처드였다.
규태의 설명으로 클린턴의 당선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느낀 데다가 선거자금까지 충분하게 지원해주겠다는 말에 한결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클린턴이 이기면 리처드를 재무장관으로 올릴까?
뉴욕으로 돌아가는 리처드를 배웅한 규태는 갑작스럽게 든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선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클린턴 대선 캠프의 참가가 저조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지원한 선거자금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면 리처드는 핵심적인 자리를 맡게 될 것이다. 클린턴 정부의 경제정책은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인 로버트 루빈이 힘을 발휘했다. 클린턴 정부 초기에는 경제정책보좌관을 지내고 95년부터 재무장관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리처드가 그와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로버트 루빈은 한마디로 말해서 월가의 앞잡이였다.
재무장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97년에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외환 위기에서 월가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했다. 한국의 외환위기로 죽어라 고생했었던 기억을 가진 규태가 로버트 루빈을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클린턴의 실책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글래스 스티걸 법안의 해제도 그의 작품이었다. 이게 은행들의 목줄을 풀어서 2008년의 경제위기를 불러오는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규태는 고개를 갸웃했다.
2008년의 경제위기 때 투자은행들을 먹어치우며 한몫 잡을 생각이었기에 그게 일어나지 않으면 곤란했다. 한국의 외환위기 때는 천천히 자신이 개입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테고.
한참동안 어떤 게 자신에게 유리할지를 고민하던 규태였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굴러갈 테지. 고민은 닥치면 그때 가서 하면 그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