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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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
케빈이 지금이 최고 정점이라면 톰은 이제부터 시작인 사람이다.
이제 자신을 버리는 거냐고 징징거리는 케빈을 뿌리치고 파티장의 구석에서 톰과 마주한 규태가 인사를 나누었다.
“톰,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죠?”
“아! KT,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톰형도 젊은 시절에는 폭풍 같은 세월을 보낸 사람이지만 한번 이혼한 후에 다시 만난 그리스 출신 여자배우와 결혼을 하더니 여자관계가 많이 젊잖아졌다.
“요즘 걱정이 많죠?”
“하하, 뭐 그렇죠. 이번 작품이 할리우드에선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작품이니까요.”
톰이 92년 개봉하기 위해 준비하는 작품은 필라델피아였다. 톰이 동성애자 변호사로 나오는 작품이라 보수적인 할리우드에선 이마를 찌푸릴 작품이었다.
“한번 잘 만들어보세요. 대본을 보니까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이던데요.”
영화이야기가 나오자 조금은 어두워졌던 톰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영화사 내부적으로 굳이 이 작품을 해야 하느냐며 반대가 나오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영화제작사의 주인이 제작승락을 해준 것이다.
“아시아 사람들은 보수적이라고 하던데요. 내가 잘못 알았나 보죠?”
규태가 동양인이라 작품제작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영화는 영화로만 이해를 해야죠. 영화제작을 한답시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 들어봐야 작품만 망칠뿐인걸요.”
제작에 큰 참견을 하지 않겠다는 말에 톰 행크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번 작품도 기대를 하고 있지만 다음 준비 작품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더군요. 그 작품까지 잘 만들어 보세요.”
규태가 허락했으니 톰 행크스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들에 대한 제작의 걸림돌이 사라진 것이다. 파안대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하는 톰 행크스와 즐겁게 작품이야기를 나누던 규태가 느닷없이 나타난 여자를 보고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어이쿠! 이런 얘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샤를로트 트론,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는 아가씨가 그의 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만히 그녀의 연혁을 기억해낸 규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때쯤이면 런던에서 모델 일을 하고 있을 꼬마 아가씨였다. 꼬마라고 부르기엔 키는 너무 컸지만.
넋을 잃고 파티 장에 나타난 젊은 여자를 바라보는 규태의 모습에 빙긋이 웃은 톰이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누구인지 알지? 여기는 KT라고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자지.”
이미 할리우드에서 이름 높은 배우가 아는 척을 하자 바싹 긴장했던 샤를로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이름 알아요! 원초적 본능을 제작한 사람이잖아요.”
이런 제길! 규태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보디가드도 있는데 하필이면 그 영화의 이름을 대다니.
“그거 R등급 영화일 텐데?”
“나를 뭐로 보고 그래요! 그 다음등급 영화도 볼 수 있다고요.”
“그래 많이 커서 좋겠다. 영화배우 지망생?”
“에헴, 영화에 출현할 예정이에요. 오디션보고 합격했다고 해서 런던에서 날아왔거든요. 친구가 파티에 참석한다고 해서 한번 와봤는데 놀답네요. 이렇게 톰 행크스도 보고.”
생각보다 앳된 아가씨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옆에서 지켜보던 톰이 흐뭇하게 웃었다.
샤를로트는 키가 180에 가까운 장신이다. 거기에 하이힐을 신고 있으니 더욱 커보였다.
“보나마나 B급 영화일테고 어떤 역할이지? 지나가는 행인?”
“여주인공의 친구요, 그래도 대사도 있다고요.”
자신만만하게 콧대를 세웟던 샤를로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런! KT, 어떤 대배우라도 단역을 맡아서 고생하는 시절이 있기 마련이야. 이제 막 시작하는 아가씨의 기를 죽이는 것 좋지 않은 버릇이야.”
“그렇죠? 역시 대배우는 인간성이 달라요. 그런데 KT는 듣던거와는 다르네요.”
“듣던 것 뭐? 친구도 비슷한 나이란 건가?”
“뭐 어떤거겠어요.”
보나마나 뻔한 소리였다. 이제 꿈많은 할리우드를 동경하는 어린 여자애들이 할 소리란 너무나 뻔했다.
풀이 죽은 앳된 외모의 샤를로트를 보는 규태의 가슴 한쪽이 조금은 아렸다. 언제나 세상에 당당하던 여자가 이런 힘빠진 모습이라니.
“나도 초반에는 고생을 많이 했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캐리어 초반에 배역을 따내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럼 톰이 아가씨에게 기회를 줘보시죠.”
“내가 지금 제작에 들어간 영화는 이 아가씨가 맞을 만한 역할이 없는데? ‘
“그거 말고 다음 작품이요. 그것도 대본이 나왔잖아요.”
필라델피아는 동성애변호사의 이야기라 그렇지만 다음 작품인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은 달달한 멜로물이다.
여주인공까지 맥 라이언으로 내정된 작품이라서 영화사에서도 기대를 하고 있었다.
“흠.”
나지막한 소리를 낸 톰이 턱에 손을 댄 채 샤를로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나쁘지 않아. 맥과 둘이서면 어울리겠는데.”
“그 정도가 아닐걸요. 제가 볼 때는 딱 맞은 배역이에요. 군소리가 나오면 내가 밀어 넣었다고 하세요.”
“그래? 그렇다면야.”
영화사의 실질적인 주인이 밀어 넣었다면 다른 의견이 나올 리가 없었다. 뒷말이야 나오겠지만.
“어머나! 어머나! 진짜죠? 나중에 다른 말하면 안 돼요. 농담이었다거나 이런 말 나오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샤를로트가 입을 막고 작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스타인 톰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다. 그리고 제작은 KT.
이건 절대로 작은 판이 아니었다. 할리우드 초짜인 샤를로트도 보통 기회가 아니란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불편한 옷을 입고 파티 장을 전전하는 여배우 지망생이 한둘도 아니다. 몸을 던져서 배역을 따내는 것은 이야기 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느닷없이 기회가 주어지다니!
“이건 내 명함이야. 대본을 보내 줄 테니 나중에 시간을 맞춰서 오디션을 보도록 하지.”
톰의 명함을 받은 샤를로트의 표정은 실신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한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간신히 수습하고는 친구를 찾아 떠나는 샤를로트의 뒷모습을 보며 규태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규태의 옆구리를 톰이 툭 쳤다.
“이봐, 너무 어린 아가씨 아니야?”
“훗,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오지랖이라고 하죠. 저 아가씨 나중에 범상치 않은 캐리어를 가지게 될 거에요. 힘든 초반에 도움을 주면 나중에 이쪽에도 도움을 주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 진짜로 망작에만 출현하지 않는다면 크게 되기는 할 것 같아.”
수많은 스타들을 봐온 톰 행크스지만 샤를로트는 확실히 달랐다. 한눈에도 앞날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규태의 말에 순순히 명함을 건네지 않았던가.
입에는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규태의 속마음은 달랐다.
이건 선물이었다. 전 아내에 대한.
샤를로트와 규태는 결혼을 했었다. 그녀와의 결혼생활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성격차이로 삼년 만에 이혼을 해야 했다.
샤를로트는 정말 규태도 감당하기 힘든 성격이었다. 그 외에는 정말 나쁘지가 않았었다.
이혼 후에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이전 생의 전아내에게 규태는 작은 선물을 준 것이다.
전 아내를 만나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돌아온 팔로알토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가볍게 마신 술기운을 빌려 오랜만에 깊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
술기운이 채 빠지지 않아서 대충 차려입고 출근한 사무실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보스, 어제 할리우드 파티에 갔다면서? 미녀들도 많이 봤겠네?”
“진짜 나빴다. 나도 데리고 가지.”
밤을 새웠는지 떡진 머리를 하고 부스스한 몰골로 그런 말을 지껄이는 모습을 보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라는 거야? 이 너드들아! 거울을 보고 이야기해라. 네놈들을 데리고 가면 내가 무슨 말을 들을 게 뻔한데. 네놈들이 미녀를 얻으려면 그저 죽으라 일해서 부자가 되는 길 밖에 없어.”
“말도 안 돼! 내가 여자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모니터에 나오는 여자들 말고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여자를 본게 언제냐?”
“.......”
양심 있는 놈들이라면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던진 규태의 말에 사무실의 직원들 입이 다물어졌다.
“네놈들은 그저 죽어라 일을 하는 거다. 일을 해라 노예들아.”
“악덕 경영주.”
“물러가라! 물러가라! “
자신을 악덕 경영주라 부르는 직원들에게 규태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는 악덕 경영주다.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까 이제 네놈들은 퇴근도 없이 일해야 한다.”
“만세! 이젠 출근도 없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
“뭐가 이상해 퇴근하지도 못하면 출근도 없는 거지.”
“맞긴 한데 뭐가 이상하다. “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진지하게 떠드는 모습을 보며 규태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놈의 너드들이 친숙하게 느껴지는걸 보면 규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마크가 서류를 들고 왔다.
“이번에 검색엔진 개발팀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명단이에요.”
명단을 살펴보던 규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시로 직원들을 뽑아대다 보니 규태도 알지 못하는 이름들이 많았다.
“처음 보는 이름이 많은데?”
“제리가 추천한 사람들이거든요. 실력은 확실하다니까.”
파트장을 맡을 제리가 책임지겠다며 추천한 이름들을 보던 규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글을 창업한 인물들의 이름도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규태가 회사를 창업한 이후로 실리콘 벨리의 인재란 인재는 모두 회사로 몰려들었다. 그 쏠림에 유니콘을 넘어서는 규모로 회사를 키운 벤처창업자들도 같이 딸려 들어왔다.
이제 미래의 야후도 구글도 모두 규태의 회사에 잡아 먹혔으니 회사의 규모가 얼마나 커질지는 규태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명단을 살핀 규태가 고개를 끄떡였다.
다행스럽게도 마크는 개발진을 총괄하는 업무를 부드럽게 소화했다. 그가 전면에 나선 넷스케이프는 자생력이 없는 관계로 언젠가 마이크로 소프트로 넘겨야 했다.
마크가 자리를 잡는다면 웹브라우저를 넘겨도 회사에서 자리를 잡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포탈은? 이제 오픈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테스트를 조금 더 하고 올려도 되지 않을까요? 마무리단계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정식으로 이름도 정해야 하고요.”
그러고 보니 아직 정식으로 명칭도 정하지 못했다.
“그건 고민을 해보기로 하고, 스톡옵션을 나누워 주어야 할 것 같네요.”
"벌써요? 회사 설립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습니까? “
“급하게 성장을 하다 보니 분사도 해야 하고. 당장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규정을 정해 두면 직원들도 좋아할 테니까. 팀을 만들겠지만 개발진의 의견도 들어야 하니까요.”
“직원들이 좋아 하겠습니다.”
마크도 회사의 주인인 규태가 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규태가 설립한 회사 넷스케이프는 엄청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주인인 규태는 엄청난 부자였다.
크게 관심 없는 직원들도 회사주식을 받으면 돈이 된다는 사실정도는 깨닫고 있었다.
마크가 나가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와! 이젠 나도 부자다!”
“많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주식같은거 필요 없어! “
“야! 저거 입 막아 보스가 듣고 마음이 바뀔지 몰라.”
이상한 소리도 들렸지만 규태는 그러려니 했다. 여긴 너드들의 소굴. 머리가 이상한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동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