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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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
월가에서는 리만의 인수후유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지만 규태는 이미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주총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달려온 마사요시를 저택에 초대했다.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대접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일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아서 어깨도 으쓱했고요.”
매스컴의 관심을 주로 규태에게 쏠렸지만 마사요시도 일본 자본의 미국침공으로 신문과 방송에 시달려야 했다.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성공적인 데뷔였다.
“일본의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대주주님 덕분에 자금 걱정 없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 지사에 남아나는 게 자금이다. 회사채 인수를 주로 하다 보니 소프트뱅크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내년에 소프트뱅크를 도쿄주식시장에 상장할 생각입니다.”
예전보다 1년 빠르지만 1차 걸프전의 여파가 잠잠해지는 시기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기적으로 괜찮을 것 같네요.”
규태가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자 마사요시의 얼굴이 밝아졌다.
“상장으로 자금을 확보하면 앞으로는 저도 미국시장에 투자를 늘릴 계획입니다. 특히 앞으로 기업의 미래는 인터넷에 있습니다. 인터넷에 대한 투자를 집중해야 합니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인터넷 기업에 대한 마사요시는 관심이 자주 많았다. 역시 첨단 기술을 선호하는 마사요시다운 선택이었다.
93년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야후에 투자를 했고 2000년엔 알리바바에 투자한다. 성공하는 기업을 보는 눈은 확실했다.
“나도 동감합니다. 미래는 인터넷 기업들에 달려있지요. 앞으로 성장을 거듭해서 유니콘이 되는 기업이 많이 나올 겁니다.”
규태가 만들어지기를 노리는 기업은 넷스케이프와 야후였다.
억지로 직원인 복일모를 스탠포드에 입학시키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보면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연락이 뜸한 동생의 소식도 궁금했다.
건강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마사요시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리만 인수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 전화를 참 자주한다.
오랜만에 연락을 했더니 삐진 동생을 달랬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바빴잖냐.”
- 그래 내가 봐도 바쁘긴 하더라. 신문하고 방송에도 얼굴이 자주 보이던데.
“몸은 어떠냐? 엄마가 전화로 네 걱정을 많이 하던데.”
- 내가 아프겠냐? 건강하니까 걱정은 하지말고. 성적은 나왔다. 주립대학은 갈 것 같으니까.”
준비하던 토플과 SAT 성적이 제법 나왔는지 자신 만만한 목소리였다. 한국에서 바닥을 기던 성적을 생각하면 환골탈태였다.
비싼 값을 치르고 마크를 동원한 보람이 느껴졌다.
“마크에게 절해라.”
- 빠뜩, 그래 고맙다고 절한다. 내가 그 인간들한테 붙잡혀서 고생한 생각을 하면.
원한이 쌓였는지 이를 가는 동생에게 규태가 나무랬다.
“쯔쯔, 이래서 검은 머리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마크가 널 그렇게 안 가르쳤으면 넌 칼리지행이야 인마.”
- 누가 몰라! 그래도 가둬놓고 잠도 안 재운 건 학대야! 학대라고. 인권유린 몰라! “
“잔말 말고 집에 전화나 자주해라. 요즘은 전화도 뜸하다면서. 이게 시간이 많아졌다고 빠져서는.”
“알았어. 잔소리 그만해. 누가 잔소리꾼 아니랄까봐.”
이런저런 잡다한 일상을 이야기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동생하고 통화를 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
승리를 자축하며 마사요시를 롱아일랜드의 저택에 초대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규태가 신경을 쓰는 분야는 영화제작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예정인 작품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크게 성공할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디가드는 케빈과 이야기를 해봤나요?”
호출을 받고 뉴욕으로 달려온 MGM/UA의 사장인 카를로 레알리는 규태의 눈치를 보았다.
느닷없이 새로운 오너인 루드 터너에게서 연락이 와서 마주한 사람이 뉴스지면을 떠들썩하게 달군 KT이었으니 가득이나 자금이 달려서 고전중인 회사형편을 생각하면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워너 쪽과 이야기가 되고 있어서 우리가 제작하겠다고 해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다.”
“지금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디가드의 제작은 우리가 해야 해요.”
답답한 마음에 규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제작에 성공하기만 하면 성과가 얼마나 달달한 영화인데 다른 평범한 영화를 다루듯 한단 말인가.
“워너에서도 제작에 회의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스토리가 너무 평범해서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저도 이게 과연 흥행에 성공할지 회의적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이런 스토리의 영화를 제작한 게 한두 번인가. 비슷한 영화가 넘치다보니 식상한 것도 사실이다.
열의가 보이지 않는 카를로에게 맡겨놨다가는 그대로 놓칠 판이었다.
“안되겠네요. 이걸 맡겨만 두니 엉망이네요. 지금 케빈은 어디에 있나요?”
제작비를 충분히 지원하겠다는데도 이 모양이니! 이러니 영화사가 망하기 일보직전이었지! 규태는 속으로 울분이 치솟아 오르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 일 때문에 LA에 자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나고 싶으시다면 연락처를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그리고 원초적 본능의 투자는 어떻게 됐나요.”
“그건 처리를 했습니다. 총제작비의 절반을 저희가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것마저도 제대로 처리를 못했으면 그대로 카를로를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절반이상은 힘든 가요?”
“감독으로 예정된 폴 버호벤 때문에 프랑스의 카날플러스와 캐롤코가 끼어들었습니다. 추가적인 투자를 하기는 힘듭니다.”
“끄응, 알겠습니다.”
지켜볼수록 못마땅하지만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다보니 엠지엠의 제작은 엉망이었다. 그나마 유나이츠 아티스트의 제작이 조금 나왔는데 그것도 경쟁사에 비하면 부족했다. 시간을 두고 유능한 인물들을 영입해야했다.
지금 같으면 남아있는 유능한 사람들도 도망을 칠 판국이었다.
케빈의 설득이 끝나면 영화제작부분을 한번 완전히 들어 엎어버릴 계획을 세우며 규태가 이를 악물었다.
로빈훗에 출연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케빈은 우연히 본 보디가드란 대본에 꽂혀서 출연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늑대와 춤을’ 처럼 자신이 제작과 감독을 한꺼번에 해버릴까 싶었지만 투자자금을 구하는 일이며 영화배급에 엄청나게 고생을 한 기억 때문에 포기했다. 로빈훗의 제작사인 워너에 말해보았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에 나타난 엠지엠의 투자제의에 솔깃했지만 기존에 관련된 워너를 조금 더 설득하던지 아니면 자신이 제작할 생각으로 거절을 했다. 그래도 자택까지 직접 찾아온 인물을 박대할 수가 없었다.
신문과 방송을 연일 뜨겁게 달구고 했을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사생활을 중시해서 휴가기간에는 집에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던 케빈이라 할지라도 차마 거절을 하지 못했다.
규태는 눈앞에 앉아있는 케빈이 참 신기했다.
아무도 제작해주지 않아서 스스로 제작을 하고 감독까지 한 ‘늑대와 춤을’ 이란 영화로 흥행에 성공하기 전까지 얼마나 할리우드에서 많은 조롱을 당했는지 모른다.
4천만 달러를 투자해서 결국 영화제작사인 캐롤코를 파산시킨 전설적인 망작 천국의 문 이후로 두 번째로 망할 영화가 될 것이란 혹평을 들은 ‘늑대와 춤을’이 전 세계적으로 4억 달러가 넘는 흥행에 성공하고 90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지만 할리우드에서 케빈은 이방인이었다.
워터월드란 영화를 찍게 되지만 역시 망작으로 조롱받았다. 실제로 워터 월드는 제작비를 회수했으니 망한 영화도 아니었다. 그만큼 할리우드에서 케빈이 망하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였다.
인디언 혼혈의 피가 섞인 혈통, 배우주제에 감독과 제작까지 손을 뻗는 것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케빈을 괴롭혔다. 잘나가는 지금도 그런데 삐끗하는 미래에는 그런 미움들이 복합적으로 폭포물처럼 쏟아진다.
“이번 보디가드 영화의 제작을 나에게 맡겨주었으면 합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워너와 지금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케빈의 말에 규태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희들이 들은 정보로는 워너 쪽에선 영화의 흥행여부를 불투명하게 보고 있어서 제작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끄응, 역시 정보가 빠르시군요.”
“이 영화의 제작에 참가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저와 친분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설마 저와 친분이 있는 케빈을 신문과 방송에서 함부로 씹을 수 있겠습니까? 루드가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루드라면? 루드 터너를 말하는 겁니까?”
가뜩이나 악의적인 신문과 방송에 시달리던 케빈에겐 꿀처럼 달콤한 소리였다. 미국 메스미디어 업계의 거물인 루드와 연관을 가질 수 있다면 그동안 시달리던 매스컴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었다.
케빈의 말에 규태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제자랑은 아니지만 루드와 친한 사이입니다. 게다가 사업적으로 루드에게 조금 투자를 했고요.”
“생각이 많아지네요.”
“고민해 보십시오. 나는 충분히 시간을 두고 기다릴 마음이 있습니다.”
케빈과 만나기 위해 LA로 달려왔으니 처리할게 많았다. 할 일을 처리한 다음에 규태는 해롤드가 만든 정보보고서를 읽었다. 보고서에는 이번 영화의 두주역인 케빈과 휘트니의 정보가 빼곡하게 담겨있었다.
월가가 정글이라면 여기는 동물의 왕국이다. 아내가 있는 남자들이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일이 너무 흔했다.
할리우드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두 다리 세 다리를 걸치는 정도는 평범한 관계일 정도였다. 해롤드가 가져온 케빈의 정보를 본 규태가 이마를 찌푸렸다. 예상대로 젊은 애인과 은밀하게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제기랄 이건 뭐 동물의 왕국이로군.”
규태의 전생도 비슷하게 살았기에 케빈을 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휘트니의 정보 보고서는 규태가 알던 역사그대로였다. 사귀는 애인인 바비 브라운은 중증의 마약중독자였다.
“이걸 어떻게 잘라내지?”
마약중독으로 40대의 나이에 요절하는 휘트니를 기억하는 규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화의 성공을 위해선 조금의 방심도 허용할 수가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케빈의 연락을 받고 약속장소로 달려간 규태였다.
“저도 여러 가지로 알아봤습니다만 하신 말씀이 전부 진실이더군요. 루드 터너 CNN사장과 친분이 깊으시다고요.”
전작 로빈훗을 워너와 작업을 마친 케빈이지만 규태의 제안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보디가드의 제작비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말에는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케빈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얼른 규태가 밀어붙였다.
“저는 다른 사기꾼들과는 다릅니다. 전에 말한 대로 나와 손을 잡으면 앞으로 여러 가지로 편한 점이 많을 겁니다. “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규태가 이마를 찌푸렸다.
“저도 영화제작에 참여하면 안 되겠습니까? “
그 정도라면 웃으면서 허락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케빈 코스트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배우생활을 시작해서인지 제작에도 관심을 보였다.
늑대와 춤을, 로빈훗이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음에도 할리우드에서 주류에 끼이지 못하는 것은 이런 성향 때문이다.
제작자들이 제 밥그릇을 노리는 사람을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그 정도쯤이야. 걱정하지 말고 투자를 하세요.”
자신의 조건을 규태가 가볍게 받아들이자 마음이 한결 놓이는지 케빈이 물었다.
“여자주인공은 누구를 선택할 생각입니까?”
대본상 세계적인 탑급의 여자 흑인가수가 필요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휘트니 휴스턴 아니겠습니까? 머라이어 캐리도 생각을 해봤는데 아직은 조금 약해요.”
머라이어 캐리는 90년에 데뷔하자마자 빌보드에 1위로 곡을 올리는 쇼킹한 성공을 거두지만 아직 대중적인 이미지는 신인이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하지만 휘트니의 소속사가 허락을 할지가 의문입니다. 워낙 탑스타라 스케줄이 빡빡할 텐데요.”
휘트니는 1980년대를 관통하는 스타였다. 85년 데뷔 앨범 휘트니 휴스턴으로 시작해서 발매할 때마다 2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앞으로 몇 년간의 공연 일정이 잡혀있을 터였다. 그런 스타가 쉽게 촬영기간을 맞출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안되면 되게 해야지요. 그건 내게 맡겨두세요.”
진짜 안 되면 그녀의 소속사인 아리스타 레코드를 사버릴 생각이었다.
규태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휘트니도 스케줄을 조정해서 보디가드의 여주인공을 맡는 것에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