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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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주식수 42%의 찬성과 37%의 반대로 회장과 경영진의 해임안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와아아!”
“이런 빌어먹을! 이건 폭거야 폭거.”
찬성측의 함성과 반대편의 탄식이 주총장을 가득 채웠다.
충격을 받은 것은 월스트리트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큰 잘못이 없는 한 임기를 마치고 조용히 퇴진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처럼 주총에서 쫓겨나는 일은 극히 보기 드문 일이다. 게다가 쫓겨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도 없었다.
“가만이나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괜히 미친개를 건드렸다가 피를 본거 아니야. ‘
월스트리트의 관례적인 신참 길들이기를 넘어서 이를 드러냈다가 잘못 걸려서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한다.
이 바닥은 원래부터 정글이다. 약한 놈은 잡아먹히는 곳이다. 역사나 전통이란 말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인가?”
월가의 투자은행의 소유권이 넘어간 일이다. 의결권을 위임받은 주식을 제외하면 35%가 넘어가는 주식이 한곳으로 몰려들었으니 당연히 연준의 규정을 위반한 것이지만 법률적으로는 한 개인이나 단체의 명의로 된 주식들이 아니니 따지기가 힘들었다.
“주가는 또 왜 안내려가?”
120달러에서 시작한 주가가 랠리를 거듭한 끝에 500달러까지 올랐다. 이후 한풀 꺾여서 300달러까지 내려왔지만 그 아래로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경영권의 이슈가 사라졌으면 예전가격으로 회귀하는 게 정상이지만 여전히 리만의 주가는 꼿꼿하게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만의 쿠데타 과연 정의는?」
「자본의 폭거! 연준의 바른 결정을 기대한다.」
주총에서 진 조 클레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건을 이슈화시키려 했다. 연준의 결정으로 초과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이 제한된다면 주총결과가 무효화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다.
“연준 쪽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조 클레인이 징징거리고 있지만 법률적으로 하등 문제가 없으니까 연준도 난감한 입장입니다.”
굳이 규태가 여기저기 사람들의 손을 빌리면서 지분을 쪼갠 게 아니다. 투자은행의 지분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사들여서 경영진을 교체한일이 근래 들어서 없었기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문제가 생겨서 법률공방으로 간다면 압도적으로 규태가 이긴다.
그러려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변호사들을 동원한 게 아닌가. 법률적인 검토를 수차례 걸쳐서 한 것이기에 하등 꼬투리를 잡을게 없었다.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신임 리만의 회장 레온 헤스는 이제 예순이 넘어간 노장이다.
리만출신으로 조 클레인과 회장 자리를 놓고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던 관계다. 조 클레인이 회장이 되면서 쫓겨나다시피 은퇴를 해야 했지만 규태의 제안을 받고 신임회장으로 나서는 것을 심사숙고 끝에 받아들였다.
“연준이라고 특별한 수가 있겠습니까. 소송을 해봐야 법원에서 내려질 결정도 뻔하고요.”
“조 클레인이 매달릴게 지금으로선 그곳밖에는 없으니까요.”
“신경 쓰지 마시고 내부정리에 신경을 쓰세요. 조 클레인이 10년 넘게 회장으로 있으면서 요소요소에 심복들을 박아 놨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일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부분입니다. 조 클레인은 너무 공격적인 투자를 좋아해서 리스크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막대한 일본투자 대표적인 실패지요.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주가하락 위험에 대한 대비도 전혀 되어있지 않더군요.”
나중에는 투자은행들도 투자에서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 파산하는 경우가 많이 나오면서 위험관리를 철저하게 하지만 이 무렵만 해도 위험관리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한국기업과 기업들만 대마불사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도 덩치가 큰 투자은행이나 은행의 파산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95년 베어링스의 파산으로 내부통제의 강화가 시작되지만 아직은 미래에 비하면 초보단계였다.
“일본자금의 투자조정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주식을 꽉 움켜쥐고 팔지 않고 있으면 계속 손해가 쌓여갈 겁니다. 롱 포지션을 전부 숏 포지션으로 바꿔야 합니다.”
“현물은 팔고 선물을 매도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앞으로도 환율문제까지 겹쳐서 일본의 주식시장은 바닥을 길겁니다.”
“일본이 상당히 주가가 떨어지지 않았나요? 이정도 낙폭이면 반등이 나올 법도 한데요?”
“그게 일본은 앞으로 힘듭니다. 너무 큰 버블이 끼었다가 터져서 앞으로도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반등이 나올 때마다 매도하는 전략으로 가야 합니다.”
일본시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규태의 말에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본 담당자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측하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제각각이지만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레온은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잘 모르겠으면 잘하는 놈의 뒤를 쫒아가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레온이 아는 한 주식을 제일 정확하게 보는 사람은 규태였다. 신임회장과 정식으로 만난 자리에서 규태는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내가 미쳤다고 손해를 보겠냐?’
내려가려는 리만의 주식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은 규태였다. 진짜 앞만 보고 달리느라 리만의 평균매입단가가 높았다. 주가가 300달러 밑으로 가면 큰 손해가 난다.
경영권 분쟁이란 커다란 이슈가 소멸되면서 폭락할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주식을 매도 했지만 규태는 야금야금 주식을 계속 사들였다.
주가가 계속 강세를 보이자 매도세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이렇게 주식을 계속 사들이는 규태가 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새해가 되면 시작될 일본부동산 가격의 폭락으로 촉발되는 일본주식시장의 하락이고 다른 하나는 걸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상승을 시작할 미국주식시장이다.
일본의 주식은 매도 포지션을 유지하고 미국주식은 사들이는 매수전략이 규태가 쓸 투자전략이었다.
리만이 수익을 내면 크게 오른 주가를 지탱하면서 오히려 상승시장에서 추가로 상승할 여력도 만들 수 있다.
타이거펀드의 주식담당자들인 앤디와 셜리에게 공격적으로 미국 주식매입과 선물 매수를 주문했다.
***
그동안 고생한 루드 터너를 위한 식사자리였다. 루드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루드터너의 무용담을 들었다.
“역시 루드밖에는 없어요.”
“하하, 내가 마음먹고 나서면 말이야. 이런 일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월가의 샌님들 정도는 가볍게 식후 디저트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
가볍게 섀도복싱을 하는 흉내를 내면서 주먹을 붕붕 휘두르는 터너의 모습을 보며 규태가 헛웃음을 웃었다.
“ABC에서 여럿 잘랐다면서요?”
“자식들이 말이야. 내가 말을 하면 곱게 알아먹지를 못해. 시범삼아 몇 놈 잘라 버리니까 그제야 제대로 굴러가더군.”
다행스럽게도 터너의 손을 탄 인물들은 대부분 뉴스부문의 사람들이었다. 드라마 제작 쪽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역시 블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루드를 한편으로 만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거칠 것 없이 밀어붙이는 루드란 존재는 적군에겐 재앙이지만 아군에게는 천군만마였다.
함께 식사를 하며 흥겹게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루드의 말을 들어주던 규태가 루드 터너를 만난 본론을 꺼내 들었다.
“MGM말인데요? 요즘 제작은 하지 않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를 인수해서 그쪽에서 하는 것 같던데요?”
“그렇지 영화사가 제작해서 말아먹기만 했지 이익을 본 게 없어요. 그러니까 회사가 휘청거리지.”
필름 라이브러리가 탐이 나서 영화사를 인수를 했지만 제작은 큰 문제였다. 자금을 투자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만드는 족족 말아먹는 꼴이 가관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이후로 흥행작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찰리채플린이 설립에 참여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를 인수해서 제작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88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레인맨을 제작했지만 그 정도 흥행으로는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기 역부족이었다.
“내가 기가 막힌 대본을 몇 개 봤는데요. 이걸 영화로 만들었으면 해서요.”
“하하, 자네가 영화대본을? 어디 한번 보자.”
규태가 내민 대본을 잠시 읽어본 루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흔하디흔한 보디가드와 여가수의 사랑이야기였다.
“이거 이야기가 너무 평범하지 않나? 확 당기는 게 없어.”
루드의 말처럼 92년 상영되는 보디가드는 너무나 평범한 스토리 때문에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오죽했으면 주역을 맡은 케빈 코스트너가 일부 제작자금을 투자해서 만들게 된다.
“주역으로 케빈 코스트너하고 여자 주인공으로 휘트니 휴스턴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요?”
“흑인여자를 주인공으로 써서 백인남자하고 사랑이야기를 만든다고 망하기 딱 좋군. 스토리는 진부하고 ”
흑백남녀의 사랑은 이당시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아직은 금기시되는 이야기였다.
“하여간 이 작품을 만들면 크게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이 바닥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자네 여자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제작하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꽂아주고 한번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럴 것 같아요?”
“하긴 흑인여자가수를 여주인공으로 쓸 생각이라면 그럴 리는 없는 것 같고. 하여간 자네가 제작을 꼭 하고 싶다면 내가 말은 해줄 수 있지만, 자네도 알지 이 바닥이 얼마나 웃긴 놈들이 많은지?”
돈 많은 투자자가 끼어들어서 개판을 치는 것이 할리우드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아예 영화사를 인수해서 말아먹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저는 투자만하고 제작에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알아서 할 사람이 있거든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잘 알아서 해보게. 내가 이야기를 해놓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규태가 내민 대본은 원초적 본능( Basic Instinct)이었다.
“오호! 원초적 본능이라? 이건 마음에 드는군.”
마이클 더글러스와 샤론 스톤 주연의 영화는 MGM에서도 제작사로 참여를 해서 이름을 올리지만 워낙 많은 제작사들이 힘을 합쳐서 만드는 작품이라 제대로 수익을 배분받지 못한다.
잡다한 제작사를 제치고 제일 많이 투자하는 제작사로 만들 생각이었다.
보디가드는 2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92년 추수감사절에 상영되어 전 세계적으로 4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작품이다. 또 하나 원초적 본능은 이보다 못하지만 92년의 흥행작이다.
두 영화의 제작에 성공하면 망해가는 MGM에 산소 호흡기를 달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인수한 디즈니야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한다. 지금쯤이면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시스터 액트와 알라딘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이 두 개를 만들어 보죠. MGM쪽에는 루드가 미리 연락을 해주세요. 제작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그게 뭐가 어렵겠나. 자네가 예감이 좋다고 한 영화를 제작해서 얼마나 좋은 성적이 거두는지를 봐야겠군. 자네 감이 주식투자만이 아니라 영화제작에도 적용이 되나 나도 관심을 가져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