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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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 터너를 만나다
“아하하, 이거 생각보다 거물이 왕림하셨군. 크게 금액을 부르는걸 보면 여유자금이 그만큼 많다는 소린가?”
타이거 펀드는 국채를 인수하고도 여유자금이 많았다. 주식시장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한 요소가 많아서 대부분 회사채에 투자하고 상당금액을 현금으로 손에 쥐고 있었다.
시티뱅크에 대한 투자금액이 계획보다 줄어든 것도 자금여유에 영향을 주었다.
“원하는 금액을 부르면 그만큼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루드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정말인가보군.”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엔 규태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100억 달러? 듣기만 해도 강심장이라 자부하는 루드도 심장이 떨렸다.
루드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정도 자금이라면 ABC, NBC, CBS 같은 3대 방송국도 당장 살 수 있다. 루드 터너가 TBS를 세워 케이블 방송으로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공중파를 따라잡으려면 까마득했다.
“여러 생각이 있을 텐데 저는 디즈니나 컴캐스트의 인수를 추천합니다.”
방송국이 아닌 다른 기업의 추천에 루드가 이마를 찌푸렸다.
“왜? 돈이 있다면 차라리 ABC, NBC의 인수가 낫지 않을까?”
“루드가 인수하겠다면 방송국 주주들이 순순히 팔까요?”
“많은 돈이 들어가겠지만 높은 가격을 부른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다른 곳은 몰라도 워렌 버핏이 대주주로 있는 ABC라면 협상에 응할걸.”
여기서 워렌의 이름이 나오다니? 낯익은 이름의 등장에 규태가 조금 충격을 받았다.
“워렌 버핏이 ABC의 대주주인가요?”
“내가 알기로는 아마도 15%정도를 가지고 있을 걸? 저번에도 인수이야기가 나왔을 때 매각의사를 밝히기도 했지. 물론 가격은 엄청나게 비싸게 부르더군. 86년에 NBC를 캐피탈 시티스가 35억 달러에 인수했는데 세배를 부르더군. 나도 악당이지만 그녀석도 만만치가 않다니까.”
“돈이 있다고 해도 루드가 다이렉트로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울걸요. 직원들이 반가와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규태의 말에 턱을 괴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루드도 납득했다. 케이블을 운영하는 루드와 공중파 3대 방송국과 사이가 썩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주주들도 영향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루드가 나서기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디즈니하고 그 뭐?”
“컴캐스트요. 케이블방송이죠. 지금쯤 가입자가 100만 정도일걸요.”
나중에는 지구가 멸망하면 바퀴벌레와 컴캐스트가 남을 것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악명 높은 블랙중의 블랙기업이지만 컴캐스트를 거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되니까.
기업합병을 거듭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케이블방송으로 거듭나는 컴캐스트는 이때만 해도 나스닥에 상장된 조그만 회사에 불과했다.
“그래 그 쥐콩만한 회사는 자네가 직접 사면 될 테고 나보고 놀이공원을 경영하는 회사를 인수해서 뭐하라는 건가?”
디즈니는 나중에는 세계제일의 콘텐츠기업으로 성장하지만 이때만 해도 쥐가 주인공인 만화영화와 놀이공원을 경영하는 회사정도로 알려졌다. 컴캐스트는 뭐 이름이랄 것도 없는 상태.
“디즈니는 일정하게 들어오는 돈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도 현금으로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놀이공원이용하면서 현금을 사용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막대한 캐시카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러다할 방향을 잡지 못하던 디즈니가 크게 성장하게 된 계기는 96년 ABC방송국을 190억에 인수하면서부터였다. 이후에 픽사와 마블을 인수하면서 굳건한 아성을 만들어내지만 이 당시만 해도 성장의 모멘텀을 찾지 못해서 주가가 바닥을 기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막대한 현금이라? 확실히 나쁘지 않지.”
터너의 고민은 CNN의 성장세가 가팔랐지만 들어오는 돈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즈니를 인수하면 그런 약점이 사라진다. 거듭 생각할수록 디즈니는 확실히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자네가 직접 디즈니를 인수하지 그러나?”
루드 터너로선 당연한 물음이다. 굳이 루드가 중간에 낄 필요가 없어보였지만 규태의 입장은 다르다.
“전까지 경제동물들이 너무 설쳐놓아서 내가 나서면 기겁을 할걸요.”
규태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유였다. 소니가 컬럼비아영화사를, 마쓰시타가 MCA를 인수하면서 할리우드가 공포심에 빠져있는 때였다.
규태가 나서면 동일선상으로 찍혀서 인수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을 터였다. 리처드를 앞에 내세워도 날뛰는 기자들에게 인수의 주체가 되는 타이거 펀드의 진짜 주인이 파헤쳐지는 건 한순간이다.
규태가 그리는 그림은 루드 터너를 앞세워서 디즈니를 인수하고 그 다음으로 공중파의 인수를 노리는 것이다.
유명인사인 터너를 앞세우고 규태는 뒤에서 조용히 지분을 인수하면 된다.
터너를 내세우면 경계는 하겠지만 인수협상에 장애물이 등장할 가능성은 적었다. 복마전 같은 할리우드에서도 입 거친 터너와 직접 싸울 용기가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규태의 제안은 성미가 급한 루드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원하는 지분은 어느 정도인가?”
“내가 제안하는 건 TBS의 지분 20%를 1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고 연락해주세요. 그리고 기업인수 투자자금은 지분인수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해보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제안을 받은 탓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터너에게 폭탄을 던진 규태는 그렇게 면담을 가장한 협상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뉴욕으로 돌아온 규태는 시티의 지분인수 협상으로 진이 빠졌는지 쉬고 싶다며 한사코 빼는 리처드를 잡아서 회의를 시작했다.
“별장에서 지내면서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회의는 무슨 회의야.”
“그게 급한 게 아니라니까요. 터너와 ABC방송이야기를 하다가 누구이름이 나왔는지 알아요.”
“워렌이겠지.”
당연하다는 리처드의 말에 규태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게 아니라니까요. 신문과 방송 여기저기 워렌이 발을 걸치고 있더라고요.”
터너의 말에 ABC의 주주명부를 살피니 워렌은 13%를 가진 대주주였다. 워렌은 규태가 염두에 둔 또 다른 기업인 워싱턴포스트의 지분도 비슷하게 소유했다.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나? 자네도 돈이 생기니까 신문과 방송의 지분인수를 하려고 하지 않나? 워렌이 자네보다 일찍 시작한 거지. 워렌이 신문사에 투자하기 시작한 게 74년부터였나 하여간 그때부터 여러 신문사의 주식을 사들였네. 아마 방송국은 내가 알기로는 80년대부터일걸.”
리처드는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려면 신문과 방송에 투자하는 것이 거부가 당연히 거쳐야 하는 단계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확실히 워렌은 다르네요.”
“많은 돈을 벌고 영향력이 있으니 주변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지 않나. 그게 다 일찌감치 신문과 방송에 투자한 덕분이야. 대주주를 욕할 수 없으니 알아서 편집부에서 걸러주지.”
“장기투자라서 머리가 복잡할 일도 없고요.”
확실히 닮고 싶은 투자였다. 한번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면 쉽사리 바꾸지 않는다. 바꾸는 경우는 막대한 이익을 보았을 때가 대부분. 당연히 워렌도 실패를 한다.
“워렌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고 싶네요. 어떤 종목들로 투자를 하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규태의 말에 리처드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자네 같으면 보여주겠나? “
미치지 않는 한 당연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래서 상대의 포트폴리오를 알아내려고 갖은 수를 쓰는 것이다.
“아마도 터너는 지분투자를 받을 겁니다. 거절하기엔 제가 너무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왔거든요.”
“디즈니 인수라면 나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네. 터너를 통해서 한다면 할리우드의 거부감도 줄어들겠지.”
리처드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인간의 됨됨이를 떠나서 터너가 유능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회투자를 하는 대상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컴캐스트는 뭔가? 이건 케이블방송국이 아닌가? 평판이 아주 바닥을 기던데?”
“터너와 회사인수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난 건데.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케이블 방송국입니다.”
“컴캐스트라?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전히 엉망으로 경영을 하는 곳인데 진짜 괜찮겠나?”
“그래도 소비자는 어쩔 수 없이 가입을 하거든요. 지역독점아닙니까?”
케이블 시장이 넓어지면서 수요는 늘어나는데 가입할 수 있는 케이블은 한곳이다. 법적으로는 독점이 아니지만 사실은 소비자가 선택을 제약받는 독점 아닌 독점이었다.
서류를 살피던 리처드가 작년의 실적을 보며 혀를 찼다.
“24억 매출에 2억 적자? 이거 망하는 회사 아닌가?”
케이블 설비를 설치하느라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 탓에 전년도 기업실적은 썩 좋지 않았다.
주가도 바닥이었다.
“투자금액이 막대해서 그래요. 그걸 제외하면 1.5억 흑자입니다.”
“흐음, 앞으로도 막대한 자금이 계속 투자된다면 흑자가 나기 힘들지 않을까?”
“이건 사실상 독점이나 마찬가지예요. 법이 개정이 되지 않으면 계속 가입자가 늘어나고 흑자규모가 커질 겁니다. 지금 가입자가 100만인에 시간이 흐를수록 가입자가 늘어나게 된다면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회사가 될 겁니다. 앞으로 가입자가 1,000만 2,000만이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도시에서 케이블을 시청하는 가구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런 추세는 점점 가속화 될 것이다.
아직은 공중파의 위력이 크지만 케이블의 지분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독점 시장에서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으로 시장을 석권하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투자해야 한다.
워낙 소비자의 불만을 개 무시하는 기업이라 대주주가 되면 욕은 조금 먹겠지만.
아니 생각해보니 많이 먹을 것 같았다.
“시가총액이 25억 달러라? 이거 너무 작은 회사 아닌가?”
나중에는 시가총액이 2천억 달러가 넘는 기업이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최대한 담아보지요. 살 수 있을 만큼 사는 겁니다.”
펀드의 자본금을 동원해서 매입해서 장기간 보유해야 하는 주식이었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돈을 긁어 들이는 회사가 될 테니까. 하지만 경영권을 간섭하지 않는 주의를 이 회사만큼은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규태도 인간인지라 욕을 먹기는 싫었다.
큰 기다림 없이 루드 터너의 연락을 받은 규태는 변호사들과 함께 애틀란타로 날아갔다. 지분투자금액은 큰 무리 없이 협상이 타결되었다.
20%에 10억 달러의 지분인수금액은 규태의 제안은 후하다 못해 호구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금액이다.
루드 터너의 두툼한 손을 마주잡은 사진을 찍고 투자지분 인수금액이 넘어오면서부터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귀찮게 여러 번으로 나누어 달라고 하지 말고 한 번에 투자하죠.”
“오호! 정말 자네 말처럼 회사에 자금여력이 충분한가보군. 아주 마음에 들어. 남자라면 당연히 좀생이처럼 굴지 말고 질러야지.”
루드터너가 어깨동무를 하며 단번에 규태에게 호감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