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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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 터너를 만나다
오래 끌 것 같았던 시티은행의 지분투자는 금세 결론이 났다.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5%의 지분을 23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한 것이다. 지분투자와 함께 100억 달러의 자금을 8%이자율로 대여해서 유동성 부족을 해소 시켜 주기로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리처드는 워싱턴에서 돌아와 규태에게 그동안의 협상과정을 밝혔다.
“역시 자네말대로 기름부자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모양이었어. 우리가 요청한 지분에서 사우디의 왈리드왕자와 절반씩 투자를 하기로 했네.”
아쉬워하는 리처드를 규태가 달랬다.
“중동부자들이 투자를 한다면 은행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갈 곳 잃은 자금들이 쏟아져 들어올 테니까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여파는 중동에서도 컸다. 아랍은 하나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해야 한다는 아랍민족주의는 쇠퇴하고 자국을 우선으로 하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거기에 쿠웨이트의 왕족들이 이라크군에 죽임을 당하고 가지고 있는 부를 강탈당한 것에 대한 공포가 아랍기름부자들이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사우디의 왕자가 대주주로 있는 은행이라면 이런 자금들을 유치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내 생각에도 그러네. 시티의 대주주들도 여러 가지를 두고 생각한 것 같아.”
“장기투자처로서는 괜찮은 곳입니다.”
시티의 투자는 여러 가지 목적이 병행된 것이다. 하나는 월가의 텃세를 뚫고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이고 다른 하나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자금을 투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제기랄! 다 죽어가는 은행인데! 망하기 일보직전인 은행하나 가지고는 조건을 덕지덕지 붙이다니!”
투덜거리는 리처드를 달래며 규태가 슬며시 리처드의 전직장인 웰스파고를 들먹였다.
“웰스파고도 요즘 상태가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미국의 4대 은행가운데 멀쩡한 곳이 드물었다. 그나마 체이스 맨해튼이 양호한 상태였다.
전직장이야기가 나오자 리처드가 쓴 입맛을 다셨다.
“미국 부동산경기가 좋지 못해서 그러네. 고위험대출비중이 높아서 하나같이 그 모양이야.”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지표상으로 침체의 마지막 시기일거 같습니다.”
“그것도 그것지만 다저스의 성적은 예상대로군. 이거 내년에 살아날 수 있겠나? 허사이저는 아예 드러누웠다면서.”
웰스 파고 이야기가 나오자 슬그머니 주제를 다저스로 바꾸는 리처드였다. 아무리 사직을 하고 나온 곳이지만 30년가량 다녔던 직장의 안 좋은 이야기를 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다저스의 처지는 한마디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 에이스 허사이저는 수술, 2선발 역할을 했던 발렌수엘라는 스크루볼을 던진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트레이드 되었다.
한마디로 투수진이 붕괴된 상황이다. 거기에 점수를 내지 못하는 타선의 상황도 심각해서 시즌중에는 이러다가 꼴찌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어깨부상으로 드러누운 그의 몸 상태는 심각해서 수술이후 예전의 위용을 살리지 못하고 내리막을 걷는다. 한마디로 이젠 그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마지막 경기를 마친 다저스는 서부지구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그래도 내년에는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랜디도 점차 폼이 올라오고 있고요. 매덕스와 그래피 주니어의 트레이드도 마무리에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투타의 핵심이 될 선수들이 자리를 잡으면 내년부터는 반등에 성공 할 겁니다.”
“캔 그래피 주니어는 믿을만한 타자지. 내가 보기에도 성공적인 트레이드가 될 것 같아. 그리고 자네가 직접 나서서 계약했다는 그 이름이 뭐더라?”
“페드로 마르티네스입니다. 라몬 마르티네스의 동생이지요.”
“투수치곤 체구가 작아 보이는데 메이저에서 버틸 수 있겠나?”
마르티네스의 문제는 덩치가 작아서 메이저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점수를 깎아먹었다. 공식적으로 180Cm에 83Kg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작았다.
다저스가 계약하고도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한 것은 작은 덩치를 가지고 경기수가 많은 메이저에서 버티기 힘들 것이란 선입견 때문이었다.
“페드로는 매덕스가 트레이드 되어오면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 작은 체구 때문에 힘으로 타자를 압도적으로 누르지 못할 테니 제구력을 갖추어야지요.”
“트레이드 해오는 매덕스가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구속이 느려서 롱런할 타입은 아니지 않아? 거기에다 FA도 얼마 남지 않았지 않나. 팜을 거덜 내면서 데려오는 투수로선 조금 부적합 하지 않나?”
파이어볼러가 아닌 제구력 투수로서 매덕스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쌓는지를 모르는 리처드로선 당연한 불만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아는 규태였다. 25살의 이제 막 전성기를 시작하는 레전드 투수를 영입했으니 은퇴하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매덕스와 랜디가 원투펀치로 나서고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제 구실을 하는 94년 이후부터 다저스는 무적의 투수진을 보유하게 된다.
거기에 이번에 마이너리그에서 뒹굴고 있는 피아자가 원래대로 성장해준다면 타격도 큰문제가 없었다.
“매덕스가 등판해서 칼같은 제구력으로 삼진을 잡는 모습을 보면 지금 하신 말씀을 취소해야 할걸요. 저랑 내기를 하실래요? 전 매덕스가 다음시즌에 15승은 한다고 봅니다만.”
규태가 자신 없는 일에 내기를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리처드였다.
“자네가 그렇게 자신을 한다면 지켜보지. 어차피 연봉을 주는 사람은 자네니까. 애송이 단장에게 다저스의 페이롤 이야기를 듣곤 엄청나게 놀랐네.”
규태가 페이롤로 제시한 5천만 달러는 돈을 아끼지 않고 써서 악명 높은 양키스의 1.5배였다.
자신은 바지 구단주라며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리처드였지만 어린 시절 응원한 팀이라서 그런지 세세한 것 까지 꿰고 있었다.
“제리가 돈을 잘 쓰는 타입이 아니라서요. 그렇게 페이롤을 던져줘야 빅네임을 영입하려고 합니다.”
제리는 철저하게 세이버메트리스들을 닦달해서 출루율이 높은 선수를 골라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면 대규모 트레이드를 시작할 예정이다. 감독도 라소다 감독에서 조 토레로 교체가 확정이 되어있다.
90년대의 다저스는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절이다. 빅네임을 가진 에이스도 강타자도 존재하지 않아서 고만고만한 팜 출신의 선수들로 연명해가면서 버티던 시절이다.
지구우승도 가뭄에 콩나듯이 몇 년에 한번 정도였고 디비전에 가면 광탈이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갈아엎은 다저스는 달랐다. 내후년쯤이 되면 왕조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선수단이 만들어진다.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마무리는 리베라 업어오기까지 성공하면서 빈틈이 없어졌다. 지금 마이너에서 한참 마무리 투수로 전환하는 훈련에 여념이 없을 리베라였다.
‘와! 이거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네, 1선발이 매덕스고 2선발이 랜디 존슨, 3선발 페드로 마르티네스에 마무리 리베라. 3번이 캔 그리피 주니어에 4번이 마크 피아자라? 이렇게만 되면 만사 제쳐놓고 경기를 보러 쫒아 다녀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천만 달러라니. 너무 돈을 많이 쓰는 것 아니야.”
“YES방송국과 중계권 계약을 하면 제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없습니다.”
YES방송국은 지역케이블을 인수해서 바꾼 이름이다. 원래는 양키스가 쓰던 이름이었는데 아예 그것까지 훔쳐왔다.
“오른쪽 주머니냐 왼쪽 주머니냐의 차이지. 그게 어떻게 다른가. YES방송국도 자네가 만든 거 아닌가. 지역방송권을 가지고 있어봐야 그게 돈이 되겠나. 전국방송계약도 크게 돈이 되지 않는 판국에.”
“올해가 지나보면 알겁니다. 그게 얼마나 돈이 되는지를요.”
규태의 큰소리에도 리처드는 못 미더워했지만 어쩌겠는가 실적이 나오는데. 리처드와 이야기를 하면서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방송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루드 터너를 아십니까?”
“입 큰 개구리 말인가? 안면은 있지만 친하진 않아. 자네도 알다시피 그 친구 말이 보통 거친 게 아니야. 친하게 지내기엔 껄끄러운 사람이야.”
CNN의 창립자인 루드 터너는 방송계의 거물이지만 행동이나 말이 거칠어 신문의 가십란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앞으로는 언론과 친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루드라면 친하게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인간 상종 못할 망나니야. 여자관계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고. 주변사람들도 하나같이 머리를 내젓는 다고. 나는 반대일세.”
“여자가 많다니 부러운 사람이네요.”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 이런! 자네 정말로 그 인간하고 친하게 지낼 생각인가.”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던 리처드였지만 규태가 진심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애틀랜타에 있겠지. CNN본사가 그곳에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네. 친하게 지내봐야 좋을 게 없어.”
리처드가 거듭 만류했지만 규태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규태에겐 앞에 나서서 싸워줄 파이터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규태를 대신해서 전면에 나서는 리처드는 전형적인 월가의 사람이다. 싸움판이 벌어질 것 같으면 멀찍이 돌아서 가버린다.
리처드와 반대되는 사람이 바로 루드 터너였다. 이 사람이 얼마나 괴짜인가하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인수해서 감독을 휴가 보내고 감독을 해버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은 거침없이 디스를 하는데 거기에 가장 크게 당한 사람이 폭스의 주인인 머독이었다.
루드를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당기면 편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거기에 장래가 창창한 회사인 터너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의 지분을 인수하면 더 좋고.
루드 터너와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방송국에 틀어박혀서 산다고 하는데 뭘하는지 의문이었지만 하여간 비서실을 닦달한 끝에 간신히 약속을 잡았다.
CNN은 80년, 하루 종일 24시간 뉴스를 방송한다는 특이한 콘셉트로 출발하여 성장을 거듭하다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실감나게 보도 하면서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마디로 잘나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 더욱 크게 성장한다.
CNN 본사에로 찾아간 규태를 만난 루드 터너는 초면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루드 터너요. 어떻게 찾아온 거요?”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이 찾아와서 괴롭힌다는 짜증 섞인 말투에 규태가 조심스럽게 대응을 했다.
“타이거 홀딩스의 대표 자리에 있는 규태 김이라고 합니다. 다저스의 사장이기도 합니다.”
타이거 홀딩스라는 회사는 정보가 밝은 루드 터너도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규태가 밝힌 또 다른 직책인 다저스의 사장이란 소리에 루드의 얼굴색이 달라져다.
“자네로구먼. 자네가 범인이었어.”
“네? 뭐가요? “
“내가 매덕스를 노리고 있었는데 자네가 낚아채갔단 말일세. “
“매덕스는 아직 FA도 아닌데요?”
“내후년의 FA때 내가 지를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트레이드로 낚아채 가버리다니. 혹시 다시 트레이드 생각 없나?”
어쩐지 지금부터 노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터너가 구단주로 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톰 글래빈과 존 스몰츠, 그렉 매덕스의 삼인방 투수진을 앞세워 한 시대를 풍미한다.
“전혀 없습니다.”
규태는 단숨에 터너의 제안을 잘라버렸다. 아니 남의 팀의 에이스를 욕심을 내다니 애틀란타의 선발투수진도 만만치 않으면서.
“쩝, 아쉽구만. 그래 어쩐 일로 나를 만나고 싶어 한 건가?”
이제 본격적으로 규태가 그를 만나고자 한 이유를 설명을 해야 할 차례였다.
“TBS에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만?”
“일없네.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네. 나도 돈 많아.”
터너가 단칼에 잘랐다. TBS와 자회사인 CNN의 성장세가 거칠 것 없이 가팔라지면서 투자를 하겠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터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루드 터너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금수저 출신인데다가 사업에도 성공해서 부족함이 없었다.
“돈이 많은 건 압니다만 투자를 하고 싶은 대로 할 정도로 많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루드 터너는 96년에 타임워너에 회사를 판다. 욕심대로 할 수 없는 사업 확장에 한계를 느껴서였다고 봐야했다.
규태의 말이 가소롭다는 듯 루드가 피식 웃었다.
“자네 돈이 많은가 보구만, 그래 얼마나 투자를 할 수 있나? 자네 회사인 타이거 홀딩스에 자금이 많은가봐?”
불러봐야 10억 이나 20억 정도를 예상했던 루드 터너였지만 크게 나오는 규태의 말에 얼어붙어버렸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100억, 200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