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
시티은행 지분투자
시티의 지분인수에 연준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했다. 연준의 제1대주주가 시티였으니까.
시티은행은 1955년 뉴욕내셔널시티은행과 퍼스트내셔널은행이 합병하면서 만들어진 은행이다. 이들 은행의 대주주가 록펠러 가와 모건 가였다는 점으로 보면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아직도 이들 두 가문이 가진 주식의 수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분인수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리처드가 자책했다.
“자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군.”
월가의 어두운 이면에서 결정되는 사안들은 평생을 월가에서 보낸 리처드라고 해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다.
대주주가 유동성이 메말라가는 은행의 위기를 못본척하는게 이상한일이다. 뒤에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제 짐작으로는 아마도 석유자본을 끌어들이려는 것 같네요.”
전생에서는 왈라드 왕자가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된 이후로 석유자본이 시티로 밀려들었다. 단순하게 망해가는 은행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지만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미리 대주주와 협의된 계획된 투자자였다.
“리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모르는 척 할 수도 있고 진짜로 모를 수도 있지요.”
모른다면 시티은행의 임원들도 모르는 내용이 외부에서 결정되었다는 소리였다.
“연준이 계속 결정을 미룰 수만은 없으니 아무튼 지켜보자고 석유자본을 끌어들이던 우리에게서 투자를 받던지.”
이 정도 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리처드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 안되면 시장에서 매입을 하면 됩니다. 어차피 이번 기회에 시티를 인수하려는 계획도 아니었으니까요.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돈이 되니까 사는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혹시라도 리처드가 부담을 가질지도 몰라서 하는 규태의 말이었다.
“그건 당연한 소리네, 지분을 인수한다고 해도 경영에는 참가하지 못할 걸세. 이유는 자네도 잘 알지?”
“압니다. 그곳에서 뒤에서 보고 있지만 않을 테니까요. 시티은행은 연준의 제일가는 대주주 아닙니까.”
“이젠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도 좀하게. 늙은 나만 부려먹지 말고. 주변의 시선도 사라졌을 테니까.”
“그럴까요?”
“저쪽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나.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계속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그때는 할 수 없지.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전면전을 해야지. 이곳은 정글이야, 너무 약하게 보여도 잡아먹으려고 덤벼드는 놈들이 한가득 이야.”
오히려 젊은 규태보다 나이를 먹은 리처드가 공격적이었다.
“리처드는 그들이 무섭지 않으세요?”
“흥, 이젠 그자들도 나이를 먹어서 이빨이 빠져가는 중이야. 숨어서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고 있는 세력 따위는 두렵지 않네.”
“정말요? 그럼 한번 붙어볼까요?”
규태의 말에 리처드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 아니 조금은 두렵긴 하지만.”
딴청을 피는 리처드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한 저녁까지 먹은 리처드가 돌아가자 규태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랜만에 회사 사무실로 출근을 하자 그동안 비어있던 공간이어서인지 썰렁하게 느껴졌다.
“보스, 오늘은 출근을 하셨네요.”
“오랜만이에요. 제니퍼, 커피한잔 부탁해요.”
비서인 제니퍼가 홀딩스 사무실에 등장한 규태를 반가워했다. 홀딩스는 타이거 펀드와 타이거 벤처, TK타이거스포츠의 지주회사다.
커피를 가지고 온 제니퍼가 오늘 특별한 약속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회사사람들과 식사약속을 많이 잡는 편이었다.
“오부장은 출근했나요? 확인하고 출근했으면 내방으로 오라고 하세요.”
“미스터 오는 요즘 바쁠걸요, 예쁜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지난번까지는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번 달 들어서 사귀기 시작했나봐요. 여기저기서 데이트하는걸 봤다는 소리가 들리네요.”
사내에서 제일 소식이 빠른 제니퍼였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좋죠. 부탁해요.”
규태가 오선한을 출근하자마자 찾은 것은 오선한이 사무실을 자주비우는 규태를 대신해서 홀딩스의 전체적인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부동산 매입에 주력하던 오선한이었지만 이젠 업무가 한가해지면서 홀딩스로 근무지를 바꾸었다.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책상위에 놓인 서류들을 점검하면서 회사 일을 처리하면서 규태는 투자 상황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대부분 자체적으로 사장들이 결정을 내리지만 규태도 돌아가는 사정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규태가 제일먼저 본 투자내역은 펀드의 일본투자에 관련된 사항이었다. 이미 대략적인 투자결과를 보고 받았지만 자세한 내용을 서류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320억을 투자해서 공매도와 선물투자로 250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 일본 증권거래소에서 타이거펀드의 선물 매도에 대한 까다로운 조건을 거는 바람에 투자금액과 이익금이 줄어들었다.
일본주가지수 선물지수거래가 제일 활발한 곳은 역시 도쿄주식거래소였다.
일본정부의 눈에 일본 주가하락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겨가는 외국펀드가 곱게 보일 리 없다.
결국 일본지사에서 300억 달러에 달하는 일본 국채를 인수하면서 일본정부의 불만을 잠재웠다. 국채 이자율은 3.5%로 형편없지만 엔화가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일 것이라 규태도 고민 없이 승인했었다.
대충 서류들을 전부 살피고 나니 제니퍼가 전한 오선한의 데이트 소식이 다시 생각났다.
규태가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를 만나도 설렘이나 이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여자를 사귀고 싶다면 제일 쉬운 방법은 파티에 참석하면 된다. 그게 싫으면 돈을 주고 에스코드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바쁜 일들이 생기면서 뒤로 밀려났었다.
모처럼 시간이 나고 정신적으로 한가해지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출근한 오선한이 서류를 들고 찾아오자 대뜸 물었다.
“뉴욕의 콘도는 내 집이 아니라, 오 부장 집이네요. 요즘 재미가 좋다면서요?”
규태가 벨에어와 롱아일랜드의 저택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빈 맨해튼의 콘도는 오선한 부장이 혼자 사용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면 내 집이라도 함부로 찾아가기가 그랬다.
규태의 말에 오선한이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소문이 벌써 났습니까?”
오선한이 욜로생활만 즐기는 줄 알았는데 슬며시 배신감까지 들었다.
180이 넘는 큰 키에 훤칠하게 생겼으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줄은 알았지만 어디에서 만났는지가 궁금했다.
“여자친구는 어디에서 만났어요?”
“센트럴파크에서 산책하다가 만났는데요.”
“공원에서요?”
“아침마다 조깅을 하더군요. 몇 번 스쳐지나가다가 인사를 나누게 돼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증권사에 근무한다고 해서 이야기도 잘 통하고 해서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축하해요. 잘됐으면 좋겠네요.”
“보스는 어떻게 여자를 사귀지 않으실 겁니까?”
규태는 외부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도 극히 한정되고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혼자살 사람처럼 보였다.
“인연이 되면 만나겠지요.”
저절로 규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전생의 규태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였다.
살아보니 사랑의 유통기한이 3년이란 말이 실감나게 와 닿았었다. 결혼하고 헤어지고, 이혼은 한번은 어렵지만 두 번째부터는 쉬워진다.
사랑을 믿지 않으니 사랑에 빠지기가 힘들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지은 규태가 가장 큰 관심사항인 일본투자부터 보고를 들었다.
“히로시는 뭐라고 하던가요?”
“당분간은 주식보다는 채권을 인수해서 들고 있겠답니다.”
이제부터 일본경제가 장기불황의 시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규태가 유일했다. 하지만 일본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일본지사장인 히로시도 같은 생각이라는 소리였다.
“생각처럼 똑똑한 사람이네요. 당분간 일본시장은 믿고 맡겨도 될 것 같네요.”
95년까지 일본엔화의 강세가 지속된다. 채권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큼 이익을 본다.
“리처드는 오늘도인가요?”
요즘 리처드는 사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워싱턴에 계십니다. 오늘 연준의장과 미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규태는 투자내역을 다시 살폈다. 시티은행의 시장매입지분이 1.6%, 타이거 펀드가 매입을 멈추자 강세를 보이던 주가도 약세를 보였다. 거기에 시티의 적자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10달러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시계를 본 규태가 한마디를 했다.
“잘됐으면 좋겠네요.”
정 안되면 추가적으로 시장에서 매입을 해서 3%선에서 끝내면 그만이다. 시장 매입하는 지분까지 연준에서 간섭을 하지는 못한다.
“유능한 분이니 잘하실 겁니다.”
***
10월이 되자 브렌트유의 선물가격이 40달러를 돌파했다.
패닉에 빠진 투자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시장의 전망은 50달러를 금방 넘어설 것 같다는 예상치마저 나오는 상황에서 규태는 전화를 걸어 원유선물의 청산을 지시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원유선물시장이 시카고상품거래소(CME)다. 오장우는 7월말부터 유가 선물 투자를 위해 시카고에 머물렀다.
- 지금 청산이요? 전문가들이 50달러는 기본이고 70달러까지는 간다고들 전망을 하는데요?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 말들이 다 맞으면 이 세상에 부자가 아닌 사람이 없겠습니다. 유가가 이렇게 요동을 치는데 미국정부가 가만히 있겠어요. 경제가 파탄 나게 생겼는데요. 조만간 조치를 취할 겁니다. 급격한 상승에 따른 큰 하락이 있을 테니 포지션을 바꿔요. 전에 말한 대로 당분간은 20달러에서 40달러 사이에서 유가가 등락을 거듭할 겁니다.”
원유의 가장 큰 수입 국가는 미국이다. 유가급등이 지속되면 미국경제에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어떻게든 유가 상승을 진정시켜야 했다.
미리 40달러까지를 상한선으로 보고 투자계획을 잡았지만 급등하는 유가는 사람의 마음을 혼동 시켰다.
이렇게 오장우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다시 한 번 확인하기를 잘했다 싶었다.
- 알겠습니다. 지시한대로 처리를 하겠습니다.”
오장우와 통화를 하고 다음날이 되자 미국정부가 전략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비축유를 푼다는 발표가 나오고 거짓말처럼 유가가 급락했다. 42달러까지 급등했던 유가가 하루만에 24달러가지 하강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오장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어휴, 죽다가 살았습니다.”
“죽기는요. 유가가 많이 떨어져도 이익은 남는 거죠. 이익이 줄어서 그렇지.”
선물 매도단가가 14달러인데 호들갑이었다.
- 그래도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까. 정부발표로 유가가 급락하는걸 보고는 아찔했습니다. 들고 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포지션을 정리했습니까?”
- 대표님 말씀대로 40달러를 상한으로 보고 인근으로 오면 매도하고 20달러에 근접하는 가격까지 내려오면 매수하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이런 움직임을 계속 보일 것 같습니다.”
“이제 유가도 조금씩 안정세로 접어들겠군요. 들려오는 정보로는 미군이 전쟁에 개입할 준비를 하는 것 같더군요. 늦어도 내년 초에 전쟁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전쟁준비였다. 전쟁물자의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군수업체들마다 공장을 돌리느라 불야성을 이루었다.
해롤드의 정보팀이 분석한 내용대로라면 전생과 비슷한 시기인 새해 초반에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동안 커다란 수요가 없어서 곤란을 겪던 군수업체들은 쌓여 있던 재고를 털어내고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었다.
- 전쟁이 시작되면 다시 오르지 않을까요? 이라크군도 육군전력으로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아닙니까?”
이라크군의 평가는 공군과 해군이 부족하지만 육군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장기간 지속된 이란 이라크전의 결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엄청난 군사력을 자랑했다.
“글쎄요, 단기간에 끝날 겁니다. 이라크군의 전력을 누구보다 미군이 잘 알고 잇을 테니까요.”
이라크 군대를 훈련하고 무기를 공여한 이가 미국이었다. CIA는 이라크군을 속속들이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군과 전쟁을 시작하자 이라크군은 예상보다 허무하게 무너졌다.
- 그렇다면 이젠 뉴욕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웠습니다.”
홀아비도 아니고 장기간 떨어져서 살다보니 가족이 그리울 법도 했다.
“네 그러세요. 이젠 급한 일도 없을 테니까요.”
투자를 지휘하러 시카고로 간 것도 오장우의 결정이었다. 조금이라도 시장에 가까이 있고 싶다면서 컴퓨터 하나로 클릭만 하면 거래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확실히 가까운 곳에서 투자를 하면 그만큼 유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