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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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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의 계절
닛코증권 주식투자부의 오노 고마치는 이십년 경력의 투자베테랑이다. 그 경력을 인정받아 2천억 엔의 상품주식의 매매를 책임지는 주식운용1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도큐철도의 주가가 심상치가 않아. 30,000엔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27,000엔까지밖에 못 오르더니 미끄러지는군.”
회사자산으로 300억 엔 어치나 매입한 도큐철도의 힘없는 움직임에 오노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도큐철도는 일본에서 2번째로 큰 사철로 일본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부동산 주식이다.
23,000엔에 샀으니 아직 이익은 많이 남았지만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정도 가격에서 팔아야 하나?
직속과장인 미야모토의 의견을 물었다. 신중한 사람이니 좋은 의견을 내줄 것이다.
“미야모토, 지금이라도 팔아서 수익을 챙겨야 할까? 자네 생각은 어때?”
“주가가 조정국면에 들어간 건 분명합니다. 저도 지금이라도 주식들을 팔아서 수익을 챙겨야 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작년 말에 니케이 지수가 38,700엔을 찍고 조금씩 하락하더니 어느 사이 36,000엔까지 밀렸다.
“자네도 확신을 못하는군. 하긴 주식을 팔았다가 판 주식이 벼락같이 올라서 땅을 치고 후회한 게 몇 번인가.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야.”
오노는 최근 들어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주가가 폭락해서 엄청난 손해를 보는 꿈을 자꾸 꾸는 통에 잠이 들기가 무서웠다.
시중한 표정으로 주가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오노가 이마를 찌푸렸다. 잔잔하게 움직이던 주가가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전체적으로 주가가 많이 내리는군.”
“제가 많이 투자한 노무라증권 주가도 마찬가지인데요? 철도, 은행주하고 증권주가 전부 힘을 못 씁니다. 아무래도 조정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봐야 얼마나 길어지겠습니까? 조금 조정을 보인 다음에 다시 힘을 내서 40,000엔에 도전을 하겠지요.”
일본증시는 거대한 낙관론에 휩싸여있었다. 경제는 성장세를 보이고 주식과 부동산 가격은 날마다 올랐다.
은행에 빚을 내어 주식과 부동산을 사지 않는 사람은 바보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도큐철도의 주가가 25,000엔이야!”
오노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27,000엔 선에서 움직임을 보이던 주가가 한순간에 거래량이 급증하며 빠르게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니 오노의 마음도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주식을 팔아야 하나? 혼자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에 주식은 아래쪽으로 정신없이 곤두박질을 쳤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주식은 오를 생각은 하지 않고 하염없이 내렸다.
이익을 보던 주식가격이 매입가를 한참이나 밑으로 내려갔을 때 오노는 머릿속이 텅비어버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매입가보다 올라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탓에 팔수도 없었다.
계절로는 봄이 왔지만 일본 주식시장은 차가운 겨울에 머물렀다. 작년 말에 38,000을 넘었던 종합주가지수가 하락하기 시작해서 3월까지 내내 미끄럼을 탔다.
닛케이 종합주가지수 30,000엔을 두고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28,000엔까지 하락했다. 고가 대비 27%의 주가하락이었다.
봄은 맞은 거리의 벚꽃은 여느 해처럼 화려하게 피었지만 주식에 투자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우중충하니 죽을상을 했다.
실제로 주식하락으로 큰 손해를 보자 비관하여 목숨을 끊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규태는 니케이 지수 30,000엔이 붕괴하자 투자한 포지션의 정리를 시작했다. 총투자금액 530억 달러로 시작한 일본투자는 엔화환율이 1달러에 120엔까지 상승하는 강세까지 합쳐져서 1,250억 달러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아쉽네요. 이것보다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는데.”
“거래량이 따라 주지 않는 걸 어떻게 하나. 제아무리 일본시장이 뉴욕증권거래소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해도 말이야. 더 큰 이익을 보았으면 일본 놈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걸, 지금도 아슬아슬해.”
큰 손해를 보고 눈이 뒤집힌 일본정부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그만큼 이번 주가하락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하락폭도 컸다.
TV에선 일본최대의 회사이자 한때 세계1위를 자랑하던 NTT의 주가가 상장가격 119만 엔 이하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요란하게 전했다.
리처드는 1,0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환율에 충격을 주지 않고 미국으로 송금하는 작업을 진행하느라 바빴다. 그들이 사용하던 사무실은 규모는 축소하겠지만 앞으로도 일본지사로 계속 사용할 예정이었다.
“앞으로 일본주식은 반등을 하겠지만 이전까지처럼 강한 상승세를 보이기는 힘들 겁니다. 여름까지 33,000엔의 상승까지가 한계로 보입니다.”
타이거 펀드 일본 지사장 이시가와 렌이 신중한 얼굴로 규태의 투자전략을 경청했다.
“그때까지는 낙폭이 큰 주식을 매입하고 주가지수선물 매수 전략으로 대응을 하겠습니다.”
스미토모 은행에 근무하다 손정의와의 친분 탓에 타이거펀드에 입사하게 된 이시가와는 지금생각해도 타이거펀드에 합류한 선택이야 말로 자신이 한 선택 중에 최선이었다고 여겼다.
규태는 영어에 능통하고 일본시장에도 정통한 전문가를 구하던 끝에 이시가와를 낙점했다.
이시가와가 입사한지 석 달이 되지 않았지만 벌써 성과급으로 받은 금액만 3백만 달러였다. 은행에 남았더라면 평생을 벌어도 벌지 못할 금액이었다.
외부에 소문이 나지 않았지만 회사내부에선 규태는 투자의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투자실패도 없이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었다. 이번 일본투자에서도 막대한 수익을 거두어서 이미 직원들은 2,00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에 이르는 성과급을 지급받았다.
이시가와는 신중하게 규태와 일본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나누며 투자전략을 다듬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투자 팀과 남는 팀으로 나누어서 업무를 인수인계하느라 바쁜 와중에 이시가와는 소프트뱅크를 찾았다. 자신을 추천해준 감사인사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손정의와 나눌 말도 있었다.
회사로 찾아온 이시가와를 손정의가 반갑게 맞았다.
“이시가와 이번에 대박 났다면서? 성과급을 많이 받았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려와.”
“선배야 말로 주식에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던데요.”
“하하하, 이번에 크게 번것은 사실이야.”
손정의의 호탕한 웃음에 이시가와가 머리를 흔들었다. 타이거펀드의 투자를 고스란히 따라한 소프트뱅크의 수익은 외부에서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지만 상당한 금액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래 어쩐 일인가? 요즘 엄청나게 바쁘다면서? 반등이 나오는 중인데 주식을 사야하지 않겠나?”
“보스가 아직 일본시장을 불안정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주식을 사도 여름까지만 보유했다가 매각이예요. 그 이후는 투자전략에 대해서 지시받은 게 없어요. 선배도 너무 공격적으로 주식을 매입하진 말아요.”
“여름까지는 매수이고 그 다음은 안개속이란 거구만.”
당연히 단기간의 급락이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반등이 있을 거란 예측이었지만 그 폭이 짧은 것이란 규태의 주가 전망은 천하의 마사요시라도 생각할게 많아지게 만들었다.
반등 그 다음은? 다시 폭락이 온단 말인가?
“은행이 15개가 문을 닫았고 추가적으로 얼마나 많은 금융기관들이 문을 닫을지 모르는 판국 아닙니까. 도처에서 자살자가 속출하는 판국이란 말이에요.”
주가가 급락하면서 전 재산을 잃고 건물에서 투신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나왔다.
“대장성의 관료들은 아직도 경제가 나빠지지는 않을거라고 판단하는 것 같은데? 불황이 오려면 먼 것 같은데? 지금 사고 싶은 회사도 많고 말이야.”
전보다 가격이 한참이나 싸진 회사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들어오니 너무 조심스럽게 자금을 운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않는 마사요시였다.
쉽게 동조를 하지않는 마사요시를 보며 이시가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보스말로는 중동 쪽이 불안정 한가 봐요.”
슬그머니 이시가와가 준비해온 주머니를 풀었다.
“중동 어디가?”
“이라크하고 쿠웨이트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시죠?”
“잘 몰라. 그 두 나라가 사이가 좋지 않은가?”
“양국의 국경지대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는데 쿠웨이트가 기름을 도둑질해간다고 해서 이라크가 이를 갈고 있답니다.”
마사요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중동의 사정은 잘은 모르지만 둘 다 미국과 친한 나라가 아닌가. 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중재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이건 미국에서도 극비인데 말이죠. 공화당이 집권을 했으니 방위산업체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전통적으로 미국의 방위산업체는 공화당과 친하고 월스트리트는 민주당과 친분이 깊었다.
“그럼 미국이 둘의 싸움을 방관한다는 소린가?”
“정확하게는 부추기겠지요. 전쟁이 일어나면 방위산업체의 불황도 풀릴 테니까요.”
베트남 전쟁이후로 큰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서 미국 방위산업체의 불황이 계속되었다. 방위산업체의 지지를 받은 공화당이 계속해서 백악관에 자리를 차지했으니 한번 거대한 불꽃놀이를 벌이고 싶은 마음이 들 법했다.
중동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유가가 급속하게 뛸 것이고 가뜩이나 취약한 일본경제는 치명타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런데도 일본정부는 한가한 소리만 하고 있으니!”
마사요시가 혀를 찼다. 버블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금리를 높이고 긴축을 계속 시행하는 일본정부의 행태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볼 때는 일본정부가 너무 오만해져 있어요. 그동안의 경제성장으로 미국을 조만간 제칠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그득하단 말이죠.”
“바보 같으니라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소련이 붕괴되는 판국인데 언제가지 미국이 일본의 사정을 봐줄 줄 아는 건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한 둘의 생각은 일본의 관료들과는 달랐다. 아직 일본은 미국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지들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잖아요. 대장성의 관료들은 제 놈들이 일본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놈들인데.”
마사요시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경험한 관료들은 콧대가 하늘을 찌르다보니 자신들의 말이나 생각대로 경제가 흘러갈 것이라 착각하는 놈들이다.
선거에 의해서 뽑힌 수상을 밑에서 주무르며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린다는 오만에 빠진 대장성의 관료들이 일본을 망치고 있었다.
“하여튼 가을까지는 공격적으로 투자하지 말아요.”
이시가와가 새삼 다짐을 받았다.
외환송금에 뻗대던 대장성의 관료들을 미 재무성까지 동원해서 때려눕힌 리처드는 아주 의기양양했다.
“제 놈들이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봤자지. 재무성에서도 이번 투자결과에 아주 만족해하는 눈치야.”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대장성 국제금융국장은 미스터 엔이라 불릴 정도로 고집 센 강성관료였기에 은행을 움직여서 일본밖으로 하는 투자송금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막았다.
일본의 주가침체를 틈타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니 가득이나 오만하던 대장성 관료들의 면상을 제대로 때려준 것이다. 자본 자유화의 시대라지만 정부가 해외송금을 막는 방법은 다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