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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버블 붕괴
여의도 금융가 주변에는 식당이 많다. 느지막이 점심식사를 하러 찾은 식당에서 곽병호는 함께 온 동생에게 물었다.
“김본부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이 전부 몇 프로야?”
“계속 증자에 참가하면서 15%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곽병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혹시라도 증자에 참가하지 않았으면 지분이 낮아졌을 거란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그 자식 나 엿 먹이는 거 맞지? 가진 지분 중에서 나한테 6%만 넘기면 되잖아! 그런데 그걸 안 해!”
괘씸한 마음에 은근슬쩍 김규태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 흘렸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기대와 달리 너무나 조용했다.
“황이사가 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진짜 재미없다고 잔뜩 으름장을 놓고 갔습니다.”
“젠장, 압박을 하고 그런 다음에 슬쩍 도움을 주면 간단하게 풀릴 줄 알았는데.”
그가 가진 인맥을 동원하여 세무조사를 하려고 하는 시도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났다.
“국세청 조국장은 뭐라고 그래?”
“정권실세인 정 의원이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이다가 미국대사한테 경고를 받고는 꼬리를 말았답니다.”
“제기랄! 그 자식 미국간지 얼마나 됐다고. 미국대사를 움직일 정도가 됐나.”
미국대사를 움직이려면 어지간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힘들다. 현재 미국대사는 아시아 전문가로 정평이 높았다.
“한국에서 한일을 생각해봐요, 그 똘똘이가 미국에서 투자에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기 힘드네요. 그러기에 왜 이상한 일을 벌여서는. 나도 그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막냇동생의 타박에도 곽사장은 반론을 하지 못하고 빈속에 소주를 마시며 탄식했다.
“나도 그 멍청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단 말이다. 그저 창투사가 투자하는 종목 정보만 확인하라고 시켰는데 전에도 이런 일을 한두 번 해본 놈들이 아닌데.”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아예 보안이란 개념이 존재 하지 않는 시절이었다. 작은 회사의 투자정보를 빼내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거래 증권사 직원만 구워삶아도 간단하게 정보를 빼낼 수 있다.
단순하게 여겼던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은 일을 맡긴 놈들이 도청이란 우습지도 않은 일을 벌였고 상대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하여간 일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형이 알아서 해요, 그 지분이 K생보로 넘어가면 어떻게 될지 알지요? 형이나 나나 우린 전부다 회사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쫓겨납니다. 다행스럽게도 증시가 하락하면서 압박은 줄어들었지만 언제라도 주식시장이 좋아지면 승냥이처럼 덤벼들 겁니다.”
“속이 탄다. 속이 타. 한국에 들어왔다는데 얼굴한 번 보기가 힘이 드니. 연락을 하면 받지도 않고 찾아가면 자리에 없다는 소리뿐이니.”
연거푸 빈 잔에 술을 채워 곽병호가 쉬지 않고 들이켰다.
증권회사를 상장하고 증자를 거듭한 끝에 자본금이 2,500억이 넘었다. 이렇게 키워 놓은 회사를 털도 뽑지 않고 잡아먹으려 들다니 곽병호의 속이 타들어 갔다.
경영권을 더한 프리미엄까지 5,000억을 준다고 해도 결코 팔지 않을 회사였다.
“설마 그 지분을 저쪽에 넘기지는 않겠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김본부장이 뭐가 예쁘다고 형님한테 그 지분을 팔겠어요. 형님이 한 짓을 보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 아니냔 말이오.”
동생 곽민호가 힐난을 퍼부었지만 곽병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서 무릎이라고 꿇을까? 그러면 용서해줄까?”
“아! 몰라! 만나주지도 않는다면서 형이 벌인 일이니 형이 알아서 해!”
“이놈의 새끼가! 동생이라고 형을 위로는 못해줄망정. 어휴 속이 탄다. 속이 타.”
애꿎은 술잔을 노려보던 곽병호가 거듭 술잔을 비웠지만 타들어가는 속은 조금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곽민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쭙잖은 짓을 벌인 형이 못마땅했지만 자신도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무실에서 일찍 퇴근한 규태는 미리 은행에서 찾아온 빳빳한 현찰로 할머니에게 용돈으로 드렸다.
“아이고, 우린 손주가 또 용돈을 주는구나. 니 어미가 주는 용돈도 적지 않지만 잘 쓰마.”
훤한 얼굴로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사양도 안하지만 단번에 받으셨다.
요즘 들어서 친구들에게 밥을 사는 재미로 사시는 할머니였다. 평생 은행이란 걸 모르고 사셨으니 현금을 수중에 쥐고 있으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할머니 주변에 어려운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세요.”
“왜? 네가 도와주려고?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어려운 사람뿐이지.”
반색을 하며 할머니가 되물었다.
“제가 한국에 장학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건 들으셨지요?”
“그래, 아비가 학교를 만들러 다닌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 말을 듣고는 얼마나 좋은지 밤에 자다가도 웃는다. 죽어서 네 할아비한테 가도 내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할머니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규태가 질색을 하며 말했다.
“할머니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오래 사셔야죠. 적어도 백 살까지는 사세요.”
“이 녀석아 사람이 늙으면 죽는 법이야. 게다가 100살까지 살 라니 징그럽다. 이젠 몸도 하루하루가 예전 같지가 않아.”
“아!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하여간 이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도 조금은 할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할머니 친구 분들 중에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제게 말하세요. 제가 없을 땐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하시고요. 제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데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지요.
“그래그래,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 법이다. 큰 손주 장하다 아주 장해.”
할머니가 기특하다는 소리를 하시며 규태의 엉덩이를 툭툭 때렸다.
“할머니, 저도 이제 다 컸다고요.”
갓난아이 때부터 규태를 옆에 끼고 키우셨던 할머니다.
“네가 아무리 컸다고 해도 나한테는 여전히 갓난아이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네 애비도 어리게만 보이는데 너는 핏덩이다. 핏덩이.”
칠순도 중반을 넘긴 할머니의 눈에는 아버지나 규태나 똑같이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여튼 저 없다고 해도 몸 건강하시고요. 저도 자주 찾아뵐게요.”
“그래 일이 바쁘다고 해도 얼굴은 자주 비춰라. 우리 큰 손주 얼굴 잊어버리면 안 되지.”
규태는 할머니의 곁에 붙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보며 이런 간단한걸. 못했던 규태는 자책했다.
입학허가서가 오기를 기다리며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복일모는 귀국해서 사무실로 출근했다. 지금까지 복일모는 창투사의 미국파견 직원의 신분이었다. 급여도 정상적으로 지급이 되었다.
귀국했으니 당연히 출근을 해야 했다. 한국의 사무실로 출근한 복일모를 보았으니 할 말이 많았다.
“일모야, 너 입학허가는 나왔냐?”
“아직요,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쯤이면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이요, 보통 2월은 지나야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SAT점수나 TOEFL점수까지 완벽한 준비를 마쳤다. 게다가 졸업생들까지 추천수를 여럿이 써주어서 복일모의 얼굴은 여유로웠다. 복일모는 입학지원을 서부지역대학만 했다.
“합격하겠지. 안되면 어쩔 수 없고.”
그렇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조금은 초조했던지 복일모가 규태의 말에 반색을 했다.
“정말이요? 그럼 편하게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갈래요. 스탠포드는 조금 간당간당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번 재수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말이다. 안되면 되게 하라 몰라? “
“이걸 또 하라고요? 그게 말이 되요? UCLA나 캘리포니아주립대 샌프란시스코라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명문이라고요.”
어이가 없다는 듯 복일모가 투덜거렸다.
“농담이다. 네 말대로 UCLA나 캘리포니아주립대 샌프란시스코라면 정도면 너도 어머니한테 자랑할 수 있겠지. 하여간 하나 물어보려고.”
“뭔데요? “
“너 SAT시험 도와준 사람이 있지?”
“아주 끔찍했죠. 군대다시 들어간 줄 알았다니까요. 케서린이 소개해준 스탠포드 재학생인데 미식축구선수에요. 덩치가 아주······. 꼼짝도 못하고 잡혀서 공부만 했다니까요.”
“내 동생이 이번에 나랑 같이 미국으로 들어가거든. 미국대학에 들어가고 싶단다.”
복일모가 대강 알아들었다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복일모에게 지나가는 말로 규태가 막냇동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공부안하고 말썽부린다는 막냇동생이요?”
“그래, 네가 너 가르친 사람에게 다시 연락을 해봐, 내 동생을 가르쳐달라고, 돈은 여유 있게 지불한다고 전하고.“
“마크한테 제가 붙인 별명이 참기름 이예요, 짜고 또 짠다고. 그렇지 않아도 농담처럼 저한테 스탠포드 떨어지면 일 년 더 공부해 볼 생각이 없냐고 하더군요. 이제 가르치는 방법을 조금은 알겠다고요.”
“그렇게 마크란 사람이 들들 볶았냐? 그런데 마크가 누구지? 내가 본적이 있나?”
“케서린하고 같이 있는 덩치 큰 사람을 본적이 있잖아요. 학교 졸업하고는 벤처회사로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그제야 규태는 얼핏 보았던 마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식축구 선수답게 아주 묵직한 덩치에 주먹도 큼지막했다. 미국에서 운동신경이 괴물처럼 좋은 사람들만 한다는 운동이 미식축구다. 그 주먹에 한 대 맞으면······.
스탠포드에 다닐 정도라면 머리도 좋을 텐데 미식축구선수라니 역시 세상은 불공평했다.
“마크야 다시 한 번 볶아댈 대상이 생겨서 무척 좋아할걸요. 이번에는 팀까지 만들어서 움직이겠는데요. 저를 가르칠 때는 혼자라서 시간이 부족했다고 투덜거렸으니까요.”
“그래, 마크한테 전해. 돈은 걱정하지 말고 이번에는 하고 싶은 거 다해보라고.
대학 미식축구선수에게 쥐어 짜일 막내를 떠올리며 규태가 잠시 애도를 표했지만 자신만 아니면 그만이다.
“흐흐흐, 마크가 좋아하겠는데요.”
복일모도 막내의 운명을 아는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일 년 고생을 더하라고 하면 복일모도 절대 사양이지만 자신만 아니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를 모르며 미국대학에 들어갈 거라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막내를 보며 규태는 애도를 표했다. 물론 속으로만.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보내는 막내아들에 대해 걱정이 많은 어머니에게만 슬쩍 일러주었다.
작은 집의 식구들까지 한꺼번에 몰려 들어서 새해를 집안전체가 요란하게 보내고 맞이한 90년 1월 초순, 규태가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왔다.
“도쿄주식시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연말까지 니케이 지수 37000에 매도 포지션을 구축했다.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않고 옆으로 횡보하는 모습을 보이던 일본 주식시장이 새해 들어서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