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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버블 붕괴
도쿄 호텔에 짐을 풀고 사무실을 꾸미기 위해 나선 리처드와 헤어진 규태는 예정된 만남을 위해 소프트뱅크를 찾았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건강해지고 밝아진 마사요시가 규태를 반갑게 맞이했다.
“훨씬 보기에 좋아졌습니다. 사업이 잘되는가 보군요.”
“다 알면서 그러깁니까. 오선배에게 미국에서 아주 잘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일본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 독점 판권을 받으면서 회사는 승승장구, 막대한 현금이 들어오면서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발동되면서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규태는 마사요시와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 증시가 너무 과열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젠 하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규태의 말 한마디에 마사요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증시가 활황을 보이면서 기업공개를 생각하고 있던 마사요시였다.
“IPO(기업공개)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증시가 과열이라니!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로군요.”
“주변의 회사들이 줄을 이어 기업공개를 준비할 테지만 아직은 시간이 이릅니다. 일단 한번 과도한 상승에 대한 조정기간을 거친 다음에 상장해야 제대로 된 주식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마사요시가 대답을 하지 않고 앉은 자세 그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어떤 투자를 하려고 일본을 찾아온 겁니까?”
한참동안 사색에 잠겼던 마사요시가 입을 열자 규태는 기다리지 않고 즉시 답을 했다.
“하락에 포커스를 맞춘 선물매도와 풋옵션 매수 투자입니다. 약간의 콜옵션을 함께 매수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보험입니다. 니케이지수가 38,000을 돌파하는 순간 시작을 하고 지수가 39,000에 접근하면 공격적으로 풋옵션을 매수할 생각입니다.”
“정말 지수가 하락할거라고 예측하는 겁니까?”
공격적으로 회사를 매입하는 마사요시에게 갑작스런 증시하락은 커다란 손해를 가져올 수 있다.
“예측이 아니라 확신합니다. 일본정부가 실질적으로 제로금리에서 6%까지 기준금리를 올렸습니다. 1달러에 160엔까지 오른 환율도 이젠 엔화강세로 돌아설 겁니다. 그럼 어디서 돈이 나올 구석이 있어서 증시가 계속 오르겠습니까?”
규태의 주장에 강한 설득력이 담겼는지 마사요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참, 당장 회사인수 계약을 하기로 한 회사도 여럿인데.”
“회사에 현금은 많이 남아있습니까?”
“······. 조금은 남아있습니다만.”
보나마나다. 마사요시의 공격적인 투자에서 수중에 남는 현금 따위를 본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IT버블이 터지는 2,000년에 죽을 고생을 하면서 많이 고쳐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무서운 것이 없는 시절이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격적으로 회사를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터였다. 그나마 상황이 좋다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판매로 꾸준히 회사로 들어오는 현금이 있다는 것 정도.
“현금을 남겨두길 권고합니다. 더 좋은 방법은 우리와 함께 증시하락에 배팅하는 거지요. 반년정도 지나면 회사로 많은 현금이 들어올 겁니다.”
“......많은 현금이 들어온다? 구미가 당기는 소리로군요. 지금 사기로 약속한 회사의 가치는 한결 가격이 낮아질 테고 말이죠.”
마사요시의 눈이 번쩍거리며 빛을 발했다. 너무 투자가 공격적이라 불황이 닥치면 휘청거려서 그렇지 평생 투자의 귀재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이런 투자기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마사요시가 아니다.
“예, 최대한 현금을 비축하고 기다리십시오. 조만간 투자할 때가 올 겁니다.”
소프트뱅크의 최대주주는 절반에 가까운 지분을 가진 마사요시지만 규태역시 지분 20%를 가진 2대주주다.
손 마사요시, 그냥 큰 도움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다 잘하는 세기의 투자귀재가 규태의 적절한 도움을 받고 나서 얼마나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지 규태도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도쿄의 가부토초는 런던의 시티와 뉴욕의 월 스트리트와 함께 세계의 삼대 금융 중심지라 불리는 장소다.
융성하는 일본을 상징하듯 정장을 입고 거리를 걸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규태는 버블이란 게 얼마나 허망한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도쿄를 팔면 미국전체를 살 수 있고 세계 50대 기업가운데 33개가 일본기업인 전성기가 시들어가는 것이다.
일본투자를 결정하면서 급하게 준비한 도쿄 지사로 들어 선 규태는 잔뜩 화가 난 리처드를 만났다.
“얼굴이 왜 그래요?”
“젠장, 예전부터 아는 대장성 국장을 하나 만났는데 어찌나 고자세인지,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간 사람을 아예 개 무시하더군.”
리처드가 어디 가서 무시를 당할 사람이 아니다. 규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성 관리면 일본 관료가운데서도 목이 뻣뻣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하긴 지금 같으면 세계 제일의 경제국가인 일본을 이끌어 간다라는 자부심이 철철 넘쳐흐를 때니 당연한 일인가?”
“전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굽실거리던 놈들이 이제는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내 앞에서 주제넘게 설교를 늘어놓는 꼴을 보고 왔으니......”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리처드가 목소리를 키웠다. 일본의 기세가 올라간 만큼 관료들도 덩달아 콧대를 세웠다. 리처드가 전직 거대 투자은행의 CEO지만 이제는 이름이 높지 않은 펀드를 운영한다는 사실에 속내를 숨기지 않고 표현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데 어지간히 오만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러니까 이번에 아예 저놈들한테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리처드가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규태가 화가 잔뜩 난 리처드를 살살 달랬다.
“이번에 주식시장이 박살이 나면 정신을 못 차릴 겁니다. 오늘 니케이 지수가 38,800까지 올랐네요?”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일본의 주식시장은 12월의 차가운 한기를 뚫고 마지막 불꽃을 맹렬하게 피워냈다.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앞으로 계속 오를 것 같나? 여기 전문가들은 4만 돌파가 눈앞이라고 여기던데.”
하락을 예측하고는 있지만 일본증시 전문가란 사람들이 너도나도 상승을 이야기하니 조금은 불안해하는 리처드를 향해 규태가 머리를 내저었다.
“이제 끝이라고 봐야죠. 더 이상은 안 오를 것 같네요. 일일 주식 거래량도 폭증하고 있고 정점에서 거래량이 급작스럽게 늘어났다는 건 조정이 가깝다는 소리죠. 다른 사람들이 선수를 치기 전에 서둘러야겠네요.
타이거 펀드는 증권사에 니케이주가지수의 주가선물을 매도하고 풋옵션을 매수하는 주문을 대규모로 내었다.
“마쓰자까, 여기 이상한 주문이 대규모로 들어오는데?”
닛코증권 시장부의 사토는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동료인 마쓰자까를 불렀다.
“뭐가 이상해?”
“선물을 대규모로 매도하는 주문이야. 풋옵션까지 사는걸 보면 위험을 헤지하려는 시도는 아닌 것 같고 투기적인 거래인데 물량이 너무 많아. 이건 주식투자부의 오노상에게 연락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버려둬, 너무 많이 오른다고 생각한 바보 같은 외국인 투자자 놈들이 이번에도 헛짓거리를 하는 거겠지. 지난번에도 주가가 하락한다고 대규모로 주문을 냈다가 거덜이 났잖아. 바보 같은 놈들 일본경제를 우습게 여기다니, 이젠 니케이지수 4만 돌파가 코앞인데 말이야.”
“하긴 연말까지 4만은 물론이고 5만까지 오른다고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전망하는 판인데 말이야.”
다들 일본경제를 낙관하면서 4만의 돌파 후에 일시적인 조정이 오더라도 기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대다수였다.
도쿄증시의 주가가 이제 하락한다면서 기세를 높이던 외국투자자들도 연일 상승하는 주가로 큰 손해를 보고는 발을 뺀 상태였다.
“이번에 상여금이 얼마나 나올까?”
“작년에 1천만 엔이 나왔으니까, 이번에는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주식시장이 지난해보다 더 좋았잖아. 회사도 잔뜩 이익을 봤으니까. 넌 상여금으로 뭘 할 생각이야?”
“이번 상여금으로 연말 휴가 때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야.”
“난 차를 바꿀 생각, 지금타고 다니는 차가 작아서 다른 사람 보기에 창피해서 말이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또 다시 밀려오는 주문에 전화기를 붙잡고 매달렸다.
도쿄지사 사무실 안은 전쟁터처럼 시끄러웠다.
“이 바보야 150개가 아니라, 200개라고! 다시 한 번 말해줘? 200개, 매도 200.”
“풋 매입 1.4에 500개.”
사무실 안은 저마다 전화기를 붙잡고 증권사에 주문을 넣는 소리로 시장터처럼 떠들썩했다. 말로는 500억 달러의 투자지만 선물 레버리지를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원하는 포지션을 구축하려면 하루 이틀 걸릴 일이 아니다. 연말까지 니케이 지수선물은 매도, 옵션은 양매수를 하는 주문을 계속 해야 원하는 포지션을 만들 수가 있다.
직원들이 채결한 주문을 체크하는 히로시를 규태가 불렀다.
“잘 돼갑니까?”
“어느 정도는요, 생각보다 선물매도 체결이 쉽습니다. 주가가 계속 오를 거라 판단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탓인 것 같습니다. 옵션은 아직 만기가 많이 남아서 가격이 비싸서인지 거래량이 얼마 되지 않아요. 풋옵션 매수 주문이 체결되는 양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옵션이야 시간가치가 소멸되면서 거래가 활발해지니까요.”
“12월중반이후가 돼야 옵션거래량이 늘어날 것 같네요. 뉴욕과 런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히로시를 계속 붙잡아 둘 수가 없기에 대화 몇 마디를 나눈 규태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무실을 지키는 규태와 달리 리처드는 일본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러 바쁘게 돌아다녔다.
오랫동안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에서 잔뼈가 굵은데다가 천성적으로 사람 만나기를 즐겨하는 성품이다 보니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책상위의 전화기가 울리자 규태가 전화를 받았다.
뉴욕 본사를 지키는 샨 나링햄이었다.
“샨, 거기는 어때요? 뉴욕은 오늘도 춥나요?”
샨이 한숨을 내쉬며 뉴욕의 상황을 전했다.
“추위도 추위지만 오늘은 눈까지 내려서 교통이 엉망이었읍니다. 눈이 쌓인 도로 위를 기어서 간신히 출근했었습니다.”
“저런! 그나마 여기는 눈을 내리지 않아 다행이네요. 그쪽은 어때요, 여기는 완전히 전쟁터야.”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오늘까지 목표했던 포지션을 전부 구축했습니다.”
“끝났으면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는 건가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면요.”
일본에서 하는 투자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엔화강세에 대한 투자는 뉴욕에 남아있는 샨의 몫이었다.
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뉴욕의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전화를 끊은 규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제 연말까지 오늘 같은 하루의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