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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버블 붕괴
“좋았어! 바로 그거야!”
포수가 요구하는 대로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공을 보면서 제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100마일의 빠른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해서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면서 내는 포구음이 경쾌했다.
“잠시만!”
공을 받아주던 포수가 잠깐 스톱을 외쳤다.
“문제가 있어?”
“공이 너무 빨라서 손바닥이 견디길 못해, 보호 장갑 하나를 더 껴야겠어. 이거 쉬운 아르바이트라면서? 손바닥이 멍들겠어.”
포수를 보는 미첼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보여주며 투덜거렸다.
“공은 어때?”
“보는대로 죽여줘. 저공을 상대하는 타자들이 아주 미치겠는데. 타석에서 보면 머리로 날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
미첼이 혀를 내둘렀다. 스리쿼터에 가까운 폼으로 던지는 공은 빠른데다 큰 키와 긴팔에서 나오는 각도가 살벌했다. 다시 장갑을 추가로 낀 미첼이 자리를 잡자 랜디가 다시 공을 뿌렸다.
반뜩 흥분한 제리가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감탄했다.
“진짜 끝내주는 군.”
“이제 슬라이더만 완성되면 좋겠는데.”
랜디의 상징은 빠른 강속구와 슬라이더였다. 던지는 폼이 조금 차이가 나서 타자들이 어떤 공이 들어올지를 알고도 못 친다는 슬라이더까지, 이제 그것마저 완성되면 랜디는 명전행 투수가 된다.
“욕심은! 이제부터 하나하나 만들어가야지. 이제 랜디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는 투수가 아니야. 다음 시즌에는 메이저에 자리를 잡는 걸 우선으로 해야지.”
“그래, 내가 조금 서두른 것 같다. 지금 너무 많이 던지는 거 아냐?”
투구수가 사십구를 넘어가자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그제야 제리가 흥분해서 더 던지려는 랜디를 막았다.
“그만, 이제 그만 던져. 이제 막 시즌끝나고 휴가기간이야. 흥분한건 알겠는데 몸 관리를 해야지.”
“이거 감각을 잊어버릴까봐.”
누가 봐도 타당한 당연한 걱정이다. 그런 랜디를 제리가 달랬다.
“걱정하지마라, 한번 잡힌 영점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또 놀란을 찾아가면 되잖아. 우리에겐 돈 많은 투자자가 뒤에 있잖아.”
그제야 랜디가 마음을 돌렸다. 애써 달아오른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 애를 썼다. 규태도 힘껏 박수를 치며 랜디를 축하해 주었다.
“브라보! 랜디 공이 아주 좋았어. 내가 그랬잖아 너는 미래에 명전행이라고.”
“보스, 고마워.”
“응? 보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제리가 그러던데 이제 구단을 인수할거라고.”
“제리가? 끄응, 이런......”
규태는 제리를 노려보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을 극히 소수였다. 소문이 나봐야 구단에 혼란만 가중될 것 극도의 비밀을 유지하며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거 비밀인가? 내가 실수한 거야?”
“그래 비밀이다. 이일이 밖으로 흘러나가면 여러 사람의 입장이 곤란해져. 자칫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고.”
예상보다 큰 매각금액을 제시하면서 오말리가 흔들리고 있지만 소문이 퍼져나가서 압박을 느끼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규태가 검지로 입을 막으며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제스처를 했다.
“저쪽은 어떻게 하지? 다 들었을 거 아냐?”
걱정하는 랜디를 제리가 안심시켰다.
“하하, 걱정하지 마 미첼도 관계자야. 브루어스에서 스카우터로 있었는데 내가 낚아채왔지. 규태가 구단을 인수하면 스카우터 팀장이 될 거야.”
그제야 안심을 한 듯 잔뜩 굳었던 랜디의 얼굴이 퍼졌다.
“하하하, 밀워키가 더럽게 추워서 떠나려고 했는데 제리가 불러주더군. 잽싸게 왔지. 보스, 처음보지만 나도 잊지 말아요.”
포수장비를 벗은 미첼이 흥겹게 말했다. 선천적으로 흥이 많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미첼,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와요. 제리가 잔뜩 보스자랑을 하더군요. 통이 큰 투자를 서슴없이 한다고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마음껏 선수를 스카우트할 수 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 지요.”
“그래요? 오호! 제리 나를 그렇게 생각했어?”
규태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낀 제리가 딴청을 피웠다.
제리가 랜디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 마무리 운동을 하자고. 몸을 달구었으니 풀어줘야 해. 이게 귀찮으면서도 중요한 일이야.”
제리는 랜디를 채근하면서 마무리 운동을 하는 것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지적하면서 지켜보았다.
옆에서 끈기 있게 랜디가 마무리 운동을 마치기를 기다린 규태는 랜디와 제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두 사람만 초대하고 나는? 보스, 나는 초대 안 해?”
미첼은 규태와 초면인데 엉겨 붙는 게 친화력이 보통 수준은 아니었다.
“하하, 따라와!”
그렇게 미첼까지 포함한 일행은 규태의 벨에어 저택으로 향했다.
겨울을 LA에서 보내려던 규태의 계획은 급변하는 일본시장 상황 때문에 어긋났다.
뉴욕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로 향하던 규태의 차는 극심한 교통체증에 막혀서 도로위에서 꼼짝 달싹 못했다. 악명 높은 뉴욕의 교통체증 탓이었다.
“젠장! 오자마자 뉴욕이 이렇게 반겨주는군요.”
가볍게 투덜거리는 규태를 리처드가 웃으며 진정시켰다.
“취미도 좋지만 본업은 잊지 말아야지.”
“그래도 겨울의 뉴욕은 아니지 않아요. 다들 남쪽으로 날아가는 판국에 나만 북쪽으로 와야 하다니.”
“상황이 급하게 바뀌는데 어떻게 하겠나. 이럴 때는 바쁘게 움직여야지. 젊은 사람이 왜 그래,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도 적응을 하면서 사는데.”
“끄응, 조금만 있으면 매각결정을 내릴 것 같았는데.”
“조급해하지 말게, 오말리가문은 돈을 버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야. 구단가치보다 엄청난 돈을 들이밀었는데 마다할 리가 없지.”
여전히 오말리가문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리처드였다. 구단 연고지를 브룩클린에서 LA로 바꾼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다.
“매각결정을 내려도 구단주 회의에서 쉽게 통과가 될지가 문제예요.”
“그놈들이 반대를 하겠나. 등쳐먹기 좋은 호구가 들어왔다고 생각할 텐데. 내가 생각할 때 2억 5천은 오버 딜이야.”
“크크, 리처드, 그 놈들이 생각하는 등쳐먹기 좋은 호구가 누구일까요?”
“설마! 난가?”
“당연하죠, 구단주로 내가 앞에 나설 수는 없잖아요. 리처드가 앞장서야죠.”
“허허, 이것 참, 하긴 자네는 아직 미국시민도 아니지. 나쁘지는 않군. 내가 어릴 적 응원하던 팀의 구단주가 된 다라? 허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지 리처드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어릴 때 응원하던 팀이 다저스였어요? 그런 말은 처음이잖아요?”
“응, 그거 참 내가 말을 안했던가?”
어쩐지 오말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하긴 응원하던 팀이 연고를 이전하면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어릴 때 응원하던 팀의 구단주가 된다. 그것도 낭만적이네요.”
“나쁘진 않아, 아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흐뭇한 얼굴을 한 리처드였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타이거펀드의 인원들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오다보니 모르는 얼굴들도 많네요?”
“새로 사람을 충원했지. 히로시 자네가 시작하겠나?”
규태가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자료가 앞에 놓여졌다. 아라타 히로시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타이거펀드의 주식부문투자를 담당하는 책임자였다.
타이거 펀드의 일본시장 투자를 맡기기에 최적의 적임자였다.
“그래프가 일본 주식시장의 움직임입니다. 빠르게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3만 5천선을 돌파했습니다.”
“이거 제정신이 아니네요.”
“올해에 다섯 차례나 금리를 올렸는데도 주가가 상승하다니 투자자들이 다들 미쳤습니다. 니케이 지수에 잔뜩 거품이 끼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거품을 유지할 수가 없을 테니 내년 초에는 거품이 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제로금리에서 경기과열을 막는다는 의도로 시작된 금리인상은 다섯 차례, 금리를 6%까지 올렸는데도 여전히 증시와 부동산은 과열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과열이 유지될 수는 없을 테니 당연히 조정이 멀지 않았다.
“일본정부의 기대와 달리 하락이 거칠겠는데요. 급격한 상승 뒤에 떨어지는 거라 낙폭이 크겠습니다.”
펀드의 외환투자 담당인 샨 나링햄이 엔화의 동향을 보고했다.
“엔 달러 환율도 160엔까지 오른 다음 소상상태입니다. 더 이상 엔화 약세는 미국정부가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지금 가격이 최고정점이라 판단됩니다.”
앉았던 자리에서 한참동안 규태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일본의 시장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지만 버블의 붕괴가 이맘때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엔 매도 포지션을 정리하고 매수로 바꿉시다. 일본 증시의 폭락을 예상하고 판을 짜야겠네요. 일본으로 히로시가 갈건가요?”
“히로시도 가겠지만 나와 자네도 함께 갈 걸세. 판이 크니 보스가 직접 움직여야지.”
“아이고! 구단매입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규태의 투정에 리처드가 따끔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시끄럽네! 최소 오백억 달러짜리 판이야! 지금 취미생활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미국시민권이 이렇게 쉽게 나오는 건가요?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따로 모여서 선서도 하고 그러지 않나요?”
신청한지 사흘 만에 나온 시민권을 보고 규태가 놀라서 물었다. 그것도 담당자가 직접 회사로 찾아와서 신청서를 받아갔다. 나머지 절차는 그냥 생략이었다.
“제 놈들이 급하니까 그렇겠지. 지금 자네가 가진 재산이 얼만지나 아나?”
“글쎄요, 요즘 계산을 해보지 않아서 한 150억 정도 될까요?”
“이런 자네 재산도 정확하게 모르다니, 내가 아는 것만 따져도 자네 재산이 정확하게 170억이네. 170억. 공식적으로 세계제일의 부자가 120억 달러를 가진 사람이야. 비공식적인 부자야 훨씬 많이 가졌겠지만. 자네의 이름이 앞에 나오는 순간 세계제일의 부자가 바뀐다는 말이네.”
“그렇게나 늘었나요?”
규태가 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하게는 계산을 해봐야 하지만 기술주의 상승으로 주가가 크게 오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식투자부문에서 재산이 두 배로 늘어났다. 거기에 이번 일본투자처럼 단기적인 투자수익도 쏠쏠했다.
타이거펀드나 타이거 벤처투자같은 회사보유지분을 제외하고도 그랬다.
블랙먼데이에 투자해서 대박을 터트린 후에 재산에 관련되어서는 이익이 얼마인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시민권을 받은 것은 일본의 투자를 마친 후 한국에서 머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복잡한 한국의 정치상황을 고려하면 미국 시민권을 받아두어야 안전했다. 거기에 미국정부의 압력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받게 된 미국 시민권이었다.
“일본에 가서 많이 긁어오라는 얘기겠지. 미국정부가 재정적자 줄이는데 혈안이 되어있지 않나. 많이 벌어와서 세금 많이 내란 말이야.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야.”
리처드의 호통에 규태가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많이 벌면 되지요, 어차피 이번 투자도 대박입니다.’
보잉 747은 개인 자가용으로 쓰기에 덩치가 너무 크고 맥도날 더들라스의 MD시리즈는 안정성이 의심스럽고 하여튼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당분간은 전세기를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본으로 향하는 전세기 안에서 규태는 최종 투자자금을 점검했다.
“회사의 자체 투자자금이 250억 달러고 차입금이 300억이로군요. “
“더 투자를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너무 무리를 하면 좋지 않아.”
그 말에는 규태도 동감이었다. 외환시장이건 선물시장이건 컴퓨터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급격하게 발전을 했지만 상당수의 은행이나 투자은행은 이런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했다.
규태는 타이거 펀드의 직원들이 레버리지를 두 배 이상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내부통제가 완벽하지 않는 상태에선 레버리지를 과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건 위험합니다.”
“맞네, 직원통제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하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있지. 타이거 펀드는 급속하게 자산이나 투자자금이 불어나고 있어서 좀 더 확실하게 내실을 다져야해.”
“투자의 교차확인은 하고 있지요?”
“당연하지, 좀 더 조일생각이야. 지금처럼 내부 교차확인은 물론이고 따로 위험관리팀도 하나 만들어서 투자위험에 대한 대비를 할 걸세.”
“직원들이 너무 까다롭다고 불만이 많습니다.”
“불만?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불만 있는 놈은 회사를 나가라고 해. 내가 평생을 금융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내부통제가 엉망인 회사는 아무리 좋은 성과를 거두어도 결국 망한다는 사실이야.”
“맞습니다.”
앞장서서 직원들의 불만을 말했던 히로시가 찔끔했다. 그 역시 강력한 내부통제장치로 인해서 여러 불편을 느껴야 했기에 이번에 조금은 풀어볼까 했지만 사장인 리처드의 태도는 완강했고 회사의 주인인 규태도 그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주제를 바꿀 필요를 느낀 규태가 히로시에게 물었다.
“도쿄증시의 거래량은 어떻습니까? 상승장에서 거래량이 늘어나는 것만큼 조정이 멀지않았다는 확실한 신호도 없지 않습니까?”
“활발하게 거래가 되면서 거래량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정말 멀지 않았군요.”
규태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