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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만들까요?
리처드의 충고는 규태에게 뼈아프게 들렸다.
지금까지는 돈을 벌기위해서 전력을 기울였다. 모든 신경과 관심이 몰려 있어서 무엇을 하던지 재미가 없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심지어 여자를 만나는 것도 이전의 경험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규태는 젊은 나이, 아니 어떻게 보면 어린나이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싶은지를 심사숙고 했다.
포도밭을 하나 사?
와이너리라면 예전에도 두어 개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에 다른 하나는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나파벨리에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이건 아닌 거 같다.
규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골프를 치는 것은 예전에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하고 만나는 업무 때문에 배웠지만 크게 흥미를 끌지 못했다.
메가 요트를 사서 진탕 노는 것도 흥미가 없었다. 바다에서 보이는 건 바다뿐인 곳을 가서 낚시질이나 하는 것도 하루만 좋지 그다음부터는 재미가 하나도 없다.
이전에도 남들이 좋다기에 사서 일 년을 가지고 있다가 팔아버렸었다.
그다음으로 염두에 둔 것은 운동. 하지만 태생적으로 규태는 운동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을 하긴 했지만 크게 재미가 있지 않았다.
한참동안을 고민하던 규태는 책상을 쳤다. 자신이 진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른 것이다.
또다시 리처드에게 달려갔다.
비서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리처드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리처드, 오말리 가문 사람들 알아요?”
“어떤 오말리를 말하는 건가? 오말리라면 여럿을 아는데.”
이젠 뜬금없는 규태의 화법에 익숙해진 리처드였다.
“다저스의 구단주 가문 말이에요.”
“다저스라? 지금 구단주인 피터의 아버지 월터 오말리라면 죽기 전에 한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 그다지 개인적인 감정은 좋지 않지만.”
“컥! 왜요?”
“브룩클린에서 야구팀을 빼앗아간 자 아닌가. 지금도 뉴욕에서 월터 오말리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 당연히 친분 따위를 나눌 상대가 아니야.”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규태가 머리를 긁었다. 뉴욕에서 오래 산 규태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아서 인지 이런 부분은 확실히 약했다.
“LA다저스가 원래는 뉴욕에 연고를 둔 팀이었던가요?”
“브룩클린에 연고를 둔 팀이었지. 망할 놈의 월터가 브룩클린에서 야구단을 빼앗아갔지. LA다저스의 원래 명칭이 브룩클린 다저스라네. 그런데 왜 그러나?”
“혹시나 다저스를 인수할 수 있을까 해서요.”
리처드는 규태를 보며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을 보겠다는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젊은 시절에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대뜸 한다는 게 야구팀인수인가? 서핑을 즐긴다던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던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야구팀을 인수할 생각을 하느니 좀 더 액티브한 운동을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아니면 차를 모아 보는 건 어떤가? 람보르기니나 포르쉐같은 스포츠카를 몰아보면 웅장한 엔진음에 가슴이 떨린다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열정적으로 스피드를 즐겼지.”
규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이전에 종류별로 스포츠카를 비롯한 차들을 모아봤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지.
“그런 건 재미가 없어요. 차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남들한테 보여주려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지. 차를 직접 모는 것도 재미있지 않아요. 그리고 차를 직접 몰아봐야 성격만 버려요.”
“진짜 못 말리겠군. LA다저스라? 망할 놈의 오말리가문에게서 야구단을 빼앗은 일도 재미가 있기는 하겠군. 알겠네. 한번 알아보지.”
다저스에 흥미가 생긴 규태는 이리저리 자료를 찾았다. 88년의 최저연봉은 6만 달러이고 평균연봉은 37만 달러다.
메이저리그에서 최초로 100만 달러 연봉을 돌파한 선수는 1980년의 놀란 라이언이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3년 350만의 계약을 맺었다.
이후로 아지 스미스가 200만 달러의 시대를 열었다. 아직 300만 달러의 선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1992년 바비 보니아가 600만 시대를 열어 제키고 95년에는 세실 필더가 923만 달러, 97년에는 앨버트 벨이 천만 달러를 넘어선다.
이랬던 선수연봉이 심심하면 1천만 달러를 넘는 시절이 온다. 최초로 흑인선수를 MLB에 출전시키고 수많은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뉴욕에서 LA로 구단을 이전시킬 만큼 구단의 이익에 민감한 오말리가문이 야구단 운영을 포기할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굳이 잘 운영하던 야구단을 팔아버렸던 오말리를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납득을 할 수 있었다.
선수연봉이 1천만 달러를 넘어가는 것을 보고는 가족기업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 안되면 92년에 구단주가 바뀌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노릴 만 했다. 매매가격이 1억 2천만 달러로 야구장으로 사용하는 캔들스틱 파크의 이전이 세 차례의 투표로 좌절되자 구단주 밥 루리가 매각해버리는 것이다.
캔들스틱파크가 바람이 많이 불고 지독하게 추워서 야구장에 관객이 찾아오기 힘들었다. 문제는 새로 야구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구장 건립비용만 4억 달러가 든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다.
다저스를 인수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폭스로부터 다저스를 사들인 맥코트는 2004년에 4억 30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다저스 구단을 매입했다. 다저스 스타디움과 주차장 그리고 250 에이커의 부동산까지 포함된 딜이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규태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한국남자라면 역시 다저스를 사야지. 박찬호가 소속되었던 팀이잖아.’
***
산호세의 날씨는 사람이 살기에 좋다.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한여름에도 좀처럼 30도가 넘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내린 규태는 확실히 살기는 뉴욕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겨울이면 추운 뉴욕에서 머물기보다 산호세에서 머무는 것이 나아보였다.
산호세주립대학에서 ESL과정을 이수중인 복일모가 차를 끌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걱정했던 것보다 복일모의 상태가 좋았다.
“오랜만이다. 온몸이 시커먼 걸 보면 어지간히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어이고! 본부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틀어박혀서 공부하느라 태양볼일이 없어요. 지금 아주 죽을 맛인데요. 시험 준비를 몇 개나 하는지 몰라요.”
습관처럼 복일모의 입에 붙은 단어였다.
“당연한 거고. 나 이제 대표이사인데 아직도 본부장이냐? 그리고 명문대에 들어가기가 쉬운 줄 알아.”
이때만 해도 아이비리그의 대학에 들어가면 동네잔치를 열던 시절이다. 스탠포드에 들어가면 복일모의 어머님이 동네잔치를 벌일 기세였다.
“본부장님이란 말이 입에 붙어서 그런데요, 어차피 KF창투사에선 아직도 본부장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요.”
차를 끌고 산호세의 사무실로 가는 차안에서 복일모가 잠시 규태의 눈치를 살폈다.
“저, 그냥 산호세주립대학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까?”
“이 자식이! 안 돼! 스탠포드 못 들어가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
“입학을 위해서 준비하고 볼 시험이 너무 많아요. 며칠째 밤에 제대로 잠도 못자고 있단 말입니다.”
혹시나 복일모가 유흥이 빠졌을까 싶었던 규태였다. 하지만 복일모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으로 단련된 인재답게 엄살을 떨었지만 그동안의 시험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ELS도 빠르게 올라가서 최상급반 과정을 듣고 있다.
“토플시험 성적은?”
“그건 어렵지가 않은데 SAT를 준비해야 하니까 힘들죠. 1600 만점에 1560이 넘어야 한다는데요.”
“당연하지.”
“꺼억! 저 그냥 한국에 돌아가면 안 됩니까?”
“돌아가면 어머님이 살려두시겠냐.”
이미 규태가 잔뜩 조미료를 팍팍 뿌려서 스탠포드에 입학을 허가 받은 것처럼 알고 있는 복일모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냥 한국으로 돌아갔다간 복일모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본부장님이 왜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셔서. 차라리 한국대학에 들어가는 게 쉽겠네요.”
“내가 돈이 남아 돌아서 너를 미국 명문대학에 그것도 스탠포드에 집어 넣으려는 줄 아냐?”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미국유학이란 말에 흥분한 복일모도 자세한 이유를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촌놈이 미국까지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으니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던 과거를 해소할 수 있다고 넘어간 탓이다.
“왜요? 그냥 공부하란 거 아니었어요?”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너도 와서 봤겠지만 미국경제는 지금 거대한 격변기에 있다. 경제의 중심이 철강이나 자동차같은 거대한 산업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같은 기술로 승부를 보는 회사로 옮겨가고 있지. 산호세 주변에 보이는 작은 벤처회사들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지? 그거 만드는 인간들이 어디 출신이겠냐?”
“당연히 스탠포드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죠.”
복일모도 이미 산호세에서 창투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주어들은 풍월이 많았다. CEO인 케서린도 스탠포드, 그 옆의 친구도 스탠포드. 주변이 온통 스탠포드 풍년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 들어가겠다는 말이 나와! 잠자지 말고 공부해 잠 좀 안 잔다고 안 죽어!”
“와! 본부장님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막말을 하시네요?”
“그럼 내가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막말할 수 있지. 스탠포드에 들어가 못 들어가면 금문교에서 뛰어내려.”
“아이고! 들어갑니다. 들어가. 내참 더러워서.”
“이자식이 많이 컸네.”
“예전보다 키는 본부장님보다 많이 컸다 아입니까.”
“지금 나한테 겁도 없이 농담한 거냐.”
목을 잡고 흔드는 규태의 행동에 복일모가 기겁을 했다.
“아악 본부장님, 운전 중이에요. 운전 중.”
거칠게 흔들리는 차의 진동을 느끼며 규태가 손에 힘을 풀었다. 속으로는 장난치다가 사고가 날까 싶어 쫄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규태가 큰소리를 쳤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잘해라. 잘못한다는 소리 들리면 어머님을 미국으로 모셔올테니까.”
엄포를 놓는 규태의 모습에 복일모가 삐져서 입을 길게 내밀었다.
“보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은 자주 얼굴 봐서 어쩌겠어요.”
“남자하고 여자는 자주 만나야 정이 들지요.”
유혹하듯이 나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케서린을 보며 규태가 코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이야 모델같이 생긴 케서린의 외모에 침을 질질 흘릴지 몰라도 할리우드 여배우와도 결혼생활을 해봤던 규태다.
“쓸데없이 장난그만치고 회사가 어쩠다고요?”
“쳇 재미없기는! 보스 정말 남자 맞아요? 다른 남자들은 내가 이러면 흔들리기라도 하는데 혹시......”
“혹시는 무슨, 나 여자 좋아하는 정상적인 남자 맞아요. 케서린이 장난으로 이러는 것도 잘 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