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43화 (4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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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이 끝났어요

89년의 봄은 86년부터 시작한 상승장의 마지막 폭죽을 터트렸던 시기다. 3월 31일 처음으로 전인미답의 고지처럼 보였던 종합주가지수 1,000 포인트를 찍고는 4월 1일 1,007까지 오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과거 벌어진 여러 차례 증권파동이후에 주식시장이라면 학을 뗀 사람들도, 전국으로 확대된 지방지점으로 소 팔고 논 판돈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갓난아이를 둘러매고 주식을 사겠다고 나선 젊은 새댁까지 300만에 불과했던 주식투자인구가 700만으로 늘어나면서  전 국민이 너도 나도 주식을 사겠다고 덤벼들던 활황장이었다.

“모든 주식은 매각했습니까?”

여러 사정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규태는 뉴욕에서 한국의 증시상황을 수시로 체크했다. 뉴욕에 머물고 있는 오장우가 본사의 상황을 전했다.

“증권사에서 가진 상품주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보니 공매도를 원하는 고객들에게 불만이 나오는 판입니다.”

“다른 회사들한테서 빌려서라도 연결해주세요. 계좌를 이전하겠다고 하면 응해주시고요. 이젠 활황장은 끝났습니다.”

기룡증권도 상품투자에 성공해서 따뜻한 연말을 보냈다. 증권주의 상승은 주춤했지만 나머지 트로이카 주들이 시장을 견인해서 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넘어서기 직전부터 천천히 주식을 매도해나갔다. 2500억의 상품주식 매입으로 거둔 투자 수익만 1,200억이다.

“정말 그럴까요? 여름에 한전도 상장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공모주를 받으려고 난리를 쳤답니다.”

“시장이 꼭대기에 오르면 투자자들은 주변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이젠 하락을 준비할 때가 됐어요. 세상에 영원히 오르는 주식은 없어요.”

일본도 버블의 충격파가 심각하게 터졌다. 니케이 지수가 39,000까지 올랐던 주식시장이 90년에는 40%가 내려서 23,000까지 떨어진다. 그나마 돈이 많은 일본은 조금 더 몇 년 버티지만 한국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삼저호황을 타고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유동성이 이제 말라가는 상황. 돈을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면 당연히 주식가격이 내려갈 수밖에 없다.

“버블이라고 판단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버블이지요. 급하게 오른 만큼 충격도 클 겁니다.”

“아직 한국 주식시장의 전체 시총이 100조를 넘지 못했는데 버블이라니요? 정말 씁쓸합니다. 니케이지수가 3만9천까지 올랐습니다. 일본 NTT의 시총이 1,000억 달러를 넘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아직은 일본의 경제규모를 한국이 따라잡기는 무리입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죠.”

씁쓸하기는 규태도 마찬가지다. 일개 일본의 회사의 주식시가 총액이 80조를 넘어서는 판국이니 거품이 잔뜩 끼었다고 해도 기분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창투사가 가진 주식은 이미 한참 전에 전부 매각을 완료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자금을 CD와 CP를 매입하고 있습니다.”

“상장주식을 매입하는 한도를 규제하는 안이 통과 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창투사들의 반발이 어지간히 심했으니까요. 비상장사에 투자한 창투사들이 적지 않게 손실을 봤습니다. 이미 자본잠식에 들어간 회사도 나오는 판국인데, 목에 목줄을 채우겠다면 죽기 살기로 저항을 할 수 밖에요.”

창투사를 만들면서 걱정했던 일들이 하나둘 벌어졌다. 대기업을 제외하고 기술이나 재무상황이 건전한 스타트업을 찾는다는 것은 80년대의 한국풍토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피눈물을 흘렸다.

창투사들도 사막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다는 심정으로 각고의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은 손을 들었다.

“담보대출에 연대보증이라니! 은행이 이런데 창투사에 뭘 바라는 겁니까?”

사업을 하면 일가만이 아니라 주변을 초토화 시킨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보증을 서달라면 부자지간에도 인연을 끊으라는 말은 한국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미국 같으면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정확하게 한계가 정해진다.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고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한번 사업에 실패하면 집안만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초토화 된다. 은행이 해야 할 일을 못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후진적인 관행이었다.

오장우도 장영자의 어음파동에 한방을 맞고 거의 저승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이다.

당연히 은행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능력이 안 되면 능력을 키우던가 해야지, 뭘하는 놈들인지 모르겠습니다.”

“관치금융에선 정부가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되니까요. 예금이자보다 높은 대출이자만 받아도 따듯한데 굳이 힘들게 신용등급을 따질 필요가 없으니까요.”

오히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나 일처리가 윗선에선 불편해 보이는지 유능한 인재는 진급하지 못하고 옷을 벗어야 했다.

“다른 주식은 몰라도 삼성전자의 주식은 계속 매입해야 합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에 투자하기 위해서 막대한 증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선 일본기업과 경쟁을 한다는 사실을 회의적으로 보는 모양인데요?”

삼성전자는 작년 4MD램의 개발에 성공했지만 반도체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삼성전체가 휘청거린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반도체에 올인하는 전략을 펼쳤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소니나 파나소닉, 미쓰비시 같은 일본기업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들어갈 자금을 생각하면 앞이 보이질 않았다.

“일본은 너무 반도체 회사들이 많아요. 두 개나 세 개정도라면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겠지만 열 개가 넘지 않습니까. 제 아무리 일본에 돈이 많다고 해도 반도체에만 밀어줄 수가 없으니 경쟁을 해볼 만 할 겁니다. 남들이 어렵다고 보는 이때가 투자의 적기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증자가 계속되면서 주가도 오르지 못하는 상황, 규태는 이때를 투자의 적기로 보았다. 시간이 지나서 반도체 투자가 성공을 거두면 사고 싶어도 비싸서 못사는 주식이 된다.

“그리고 대표님이 눈여겨보라고 주문하신 한국이동통신의 공모가 끝났습니다. 난리였다고 하더군요.”

“공모주 청약해봐야 몇 주나 받겠어요. 상장 후에 매입하면 됩니다. 이동통신은 앞으로 유망한 산업입니다. 지속적으로 매입해서 보유하고 있으면 큰 이익이 날겁니다.”

“두개 주식만 매입하는 것으로 합니까? 너무 매입하는 종목이 적지 않습니까?”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일 텐데 여러 종목을 사서 뭐합니까? 당분간은 채권과 현금으로 들고 있는 게 돈을 버는 길입니다. 회사채금리가 올라가면 회사채에 투자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3년 만기 회사채의 금리가 11%에서 13%대까지였다.

주식시장이 활황이다 보니 채권을 발행하기보다 주식을 증자를 하는 게 유리한 상황이라 발행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증시가 침체로 들어가고 시중에 자금이 마르면 회사채의 금리는 당연히 올라간다.

“지점수를 18개에서 멈춘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규태가 정한 지점의 규모가 너무 작다고 더 늘려야 한다고 오장우가 고집을 부렸지만 현실적으로 기룡증권에 오려는 인재가 없었다.

“시장이 나빠지면 증권사를 그만두는 경력직원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렇겠죠. 시장이 나빠지면 영업직원만이 아니라 회사전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니까요. “

“그중에서 알짜만 뽑아다가 키워야 합니다. 회사의 규모는 천천히 늘려나가면 되니까요.”

회사의 재정이 튼튼해야만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불황이자 침체기에 회사를 규모 늘리는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진다.

제일 큰 장점은 뽑고 싶은 인재를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 입사를 하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금융계에서 증권사 직원들처럼 이직이 많은 직종이 없다.

기룡증권의 장점은 영업에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가 중개수수료에 목숨을 걸지 않으니 지점에 압박을 줄 일이 없다.

지점장의 실적욕심에 따라서 일이 생길수도 있기 때문에 규태가 직접 영업부분 본부장인 기세연 상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지점평가를 영업실적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고객만족과 직원들의 업무만족도와 같은 다양한 평가기준으로 나누어서 평가를 하게 만들었다.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하는 반론도 나왔지만 규태는 강하게 밀고 나갔다.

어차피 지점의 숫자를 공격적으로 늘리지 않은 것도 하락장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이란 돈을 벌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반대로 돈을 잃으면 지극히 공격적으로 변한다. 하락장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고객과의 분쟁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괜히 증권사 지점의 모든 전화가 녹음되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조정으로 알고 지금도 투자자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시장이 하락한다면 충격이 클 겁니다.”

기룡증권이 직접적으로 미국 주식을 중개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직접 투자는 가능했다.

오장우가 뉴욕에서 하는 일도 기룡증권의 미국 투자를 총괄하는 명분이다. 이제 그 일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더 이상 붙어있을 수가 없었다.

“저도 이젠 서울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적당히 왔다 갔다 하세요. 한국에 계속 있어봐야 크게 할 일도 없을 것 아닙니까? ‘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

규태의 말에 오장우가 반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 전부 뉴욕으로 옮겨온 상태 아이들도 뉴욕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와서 서울로 가면 홀아비신세였다.

“아직 한국은 차별이 남아있으니까요. 들어가셔서 소전무를 키우세요. 나중에는 아예 뉴욕으로 옮기는 것도 추천합니다.”

일본인과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오장우도 좋지 않은 시선을 느낄 때가 있었다. 아내인 히로스에도 마찬가지.

아이들도 서울보다는 뉴욕을 선호했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아내가 서울에서 하는 일이 없었더라고요. 뉴욕으로 오면서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

“바쁘십니까?”

리처드의 집무실은 규태와 같은 건물에 있는 사무실이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불룸버그와 로이터의 모니터들이 숨 가쁘게 주식시장과 경제에 관련된 최신 뉴스들을 토해냈다.

“별로, 어쩐 일이야?”

“워렌에게선 답이 없습니까?”

“생각할게 많을 거야. 혼자 판단으로 할 일도 아니고 주변사람들하고 의견을 나눠봐야 할 테니까.”

워렌은 함께 사업을 시작한 영혼의 단짝이라 불리는 찰스 멍거와 토론을 통해 투자를 결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워렌의 유명세에 가려져서 그렇지 찰스도 대단히 유능한 투자자였다.

“리처드 생각은 어때요?”

“내 생각으론 힘들어 보여, 버크셔 해서웨이는 아주 폐쇄적이거든.”

“저도 한번 던져본 겁니다.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요.”

“그래 그러면 됐네, 너무 기대를 하면 힘들 거든.”

“옮겨가는 사무실은 그림을 사서 걸어놓으면 지금보다는 낫겠죠. 지금은 너무 삭막하잖아요.”

성큼 다가온 사무실의 이전이었다. 전통적으로 펀드회사의 사무실은 화려한 치장을 한다. 대외적인 과시를 목적으로 하기도 하고 미술품을 사는 것도 투자의 일환이었다.

“그림도 조금 사고 하니까 지금보다야 낫겠지. 경매에 나온 드가의 그림을 사지 못하는 게 아쉬워.”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은 너무 비싸서 말이에요. 저도 작년에 고흐의 작품을 사지 못한 건 아쉬워요.”

“어쩌겠나, 일본인들이 제일 사랑하는 작가라는데.”

작년에 있었던 고호의 해바라기 경매가 화제에 올랐다. 거품의 절정에 있던 일본답게 세계미술시장의 큰손으로 등장해서 인상파의 그림을 쓸어 담았다. 88년 경매에 나온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이 53억 엔에 일본의 닛폰코어 보험사에 낙찰되었다.

아쉽게도 규태는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타이밍만 놓치지 않았다면 앞으로 그림시장이 어떻게 변할지를 알기에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떻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요.”

“나쁘지 않지, 대중적으론 인상파 작가들보다 지명도가 떨어지지만 화풍이 마음에 들어.”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인 키스는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들어가 있으니 살 수 없지만 아델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개인이 소장중인 듯 한데 한번 찾아보려고요.”

2010년에 1,700억으로 경매에 낙찰된 그림이다. 아직 대중적으로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림계의 큰손인 일본인들의 취향을 저격하지 못해서 아직은 덜 알려진 클림트의 작품을 쓸어 담을 생각이었다.

클림트의 그림은 2000년이 넘어서야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전에도 규태는 클림트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을 수집했었지만 작품들이 제대로 경매에 나오지 않아서 구입에 애를 먹었었다.

94년에 370만 파운드에 거래된 클림트의 풍경화 화원이 2017년에 4,700만 파운드에 거래된다. 더군다나 클림트의 그림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미친 듯이 사들인다.

“다행이로군.”

“뭐가 다행입니까?”

“자네가 젊은 나이에 돈벼락을 맞은 부자이면서도 관심이 있는 분야가 없어 보였거든. 사람은 취미를 가져야 하는데 자네는 너무 돈을 버는 일에만 몰두해서 말이야. 나는 자네가 여자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아서······. “

“잠깐 거기까지요. 더 이상은 불쾌합니다. 당연히 저도 취미가 있습니다. 그림 모으기랑.......”

규태가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면 크게 관심이 있는 분야가 없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보게, 뭘 하고 싶은지 젊은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게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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