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술주 투자
약간 후덕해 보이는 인상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양복, 트레이드마크인 두꺼운 뿔태안경을 쓴 중년의 사내, 워렌 버핏이었다.
어쩐지 약속한 장소가 캐주얼 레스토랑이더라니.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의 주식을 매입한 이후로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즐기는 식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규태만큼이나 까다로운 격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워렌이었다.
“여기 T본이 유명한 집이야. 뉴욕에 오면 가끔씩 들리는 곳이지.”
“맥도날드가 아니라요?”
“가까운 곳에 맥도날드가 있다면 그곳에 약속을 잡았겠지만 리처드 이친구가 패스트푸드라면 질색을 해서 말이야.”
“햄버거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악의 선물이야.”
베지테리언은 아니지만 패스트푸드만큼은 경멸하는 리처드였다.
“흥, 월가의 수다쟁이들이 위스키 잔을 앞에 두고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시시콜콜한 일까지 떠들어대는 만찬장이야 말로 최악이지.”
“사람이 살면서 격식이 필요한 때도 있는 법이네.”
“격식이란 건 부끄러운 속내를 감추는데 필요한 겉치장일 뿐이야.”
“겉치장이라니! 자네가 그러니까 이제까지 실력에 비해 평가가 낮은 게 아닌가. 예전에는 폰지사기로 조사까지 받았다면서.”
너무나 비밀스런 투자를 지속하다보니 사기꾼으로 오해를 받았던 과거를 끄집어내자 워렌이 잠시 딴청을 피웠다.
“하여간 자네가 내 회사의 주식을 매입한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리처드가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해서 한번 얼굴을 보고 싶었네.”
“첨단 기술주에 대한 투자를 집중적으로 하지만 나머지 것들은 잘 모르니 잘 아는 워렌에게 맡기려는 겁니다.”
“잘 모르는 골치 아픈 일은 나한테 맡긴다고? 참 곤란한 친구로군.”
워렌은 이익이 나지 않는 기술주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벌어들이는 이익에 비해 주가가 과다하게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익을 나면서도 가치에 비해 싼 주식을 찾는 투자를 하는데 규태는 절대적으로 하지않는 투자방식이다.
“10%는 어떻습니까?”
“유통주식이 그렇게 많지 않을걸! 5%의 주식도 사기 힘들 걸세.”
“그게 문제입니다. 백만 주를 사려고 해도 거래량이 많지가 않아요. 도대체 주식을 쥐고 팔지를 않아요.”
“내 회사주주들은 장기투자자들이 대부분이라 한번 산 주식은 쉽게 팔지 않지.”
장기투자자로 유명한 버핏답게 그의 투자자들도 어지간해서는 버크셔 해서웨이 회사주식을 팔지 않았다. 대를 이어 물려주는 주식, 버크셔해서웨이의 모토이자 자랑이었다.
버크셔의 주주가 전부 3,000명에 불과했다.
“버크셔의 자본금을 증자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
“신선한 제안이로군, 지금까지 나에게 투자를 요청하는 기업은 많아도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군. 하지만 거절하겠네.”
버핏은 단칼에 규태의 제안을 거절했다. 상장후 단 한 번도 액면분할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경영권의 문제라면 의결권 없는 B주를 발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 보시지요.”
“의결권 없는 B주라? ······처음 들어보는 제안이로군? 한번 생각해 보겠네.”
심각한 숙제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버핏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실제로 버크셔 해서웨이는 의결권 없는 B주를 96년에 A주의 1/30가격인 1,000달러로 발행했다.
이때부터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식을 가진 주주들이 연말에 모이는 주주총회는 조용한 시골동네인 오마하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한바탕 축제가 되었다.
아직 A주의 가격이 4,000달러 수준이라 커다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지만 한번 던져보는 것이다.
버핏과의 대화는 재밌었다. 말이 많지는 않아도 특유의 위트가 담긴 말속에는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래산 사람의 노련함이 담겨 있다. 자신만의 투자 철학이 확고한 이들에게 흔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일상적인 생활을 이야기하고 리처드와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이에서 얌전하게 앉아서 듣고 있자니 이웃집의 동네아저씨들이 하는 대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가치투자니 기술주에 왜 투자를 하지 않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눠봐야 의미가 없다.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기분 좋게 둘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기분 좋은 만남이 있으면 기분 나쁜 만남도 있는 법이다.
버핏과의 식사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예상했던 손님이 규태를 찾아왔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는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표시하듯이 한껏 일그러진 상태였다. 사정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오늘의 만남이 유쾌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암시했다.
유행처럼 첨단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복장인 청바지에 셔츠를 걸치고 나타난 레리 엘리슨은 거침이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대뜸 본론으로 들어왔다.
“자네가 주식시장에서 우리회사주식을 잔뜩 사들이고 있다면서.”
“잠깐만요.”
규태는 아침에 보고된 회사의 주식보유현황을 확인했다. 25%에서 지속적으로 매입을 해서 상장된 오라클 주식의 34.9%를 인수했다.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기는 그렇지만 생각보다 많이 사들였네요.”
“어떤 의도로 주식을 사들이는 건가? 설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말을 하는 래리 엘리슨은 잔뜩 긴장했다. 친한 친구인 스티브잡스가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것을 눈앞에서 보지 않았던가.
자신도 그 꼴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가뜩이나 회사안팎으로 적이 많은 레리였다.
“당연히 회사의 전망이 좋아보여서 사는 거 아닙니까. 오라클만이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시스템즈와 같이 기술주들을 한꺼번에 매입하고 있읍니다. 그중에 새로운 제품을 출시해서 실적호전이 예상되는 오라클의 주식을 많이 사게 된 겁니다.”
“단순히 회사의 전망을 보고 투자를 했다면 나에게 경영권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아! 지금 나한테 강도 같은 요구를 하는 겁니까? 의결권을 제한받는 주식을 매입한 것도 아닌데 주주의 권리를 포기하라고요. 만약 그렇다면 나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할겁니까?”
불쾌하다는 규태의 반응에 레리가 화를 벌컥 냈다.
“오라클은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야! 절대로 경영권을 넘겨줄 수가 없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회사를 지킬거야.”
만약 자신이 경영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회사와 자폭이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이대로 이야기가 계속되면 감정싸움이 된다. 심호흡을 한번 규태가 레리를 진정시켰다.
“심각하게 반응하지 말아요. 나는 어디까지나 재무적인 투자자입니다. 주가가 올라가면 털고 나갈 사람입니다. 회사의 경영에 관여할 생각 따위는 없어요. 다만······.”
“다만 뭔가?”
“지금처럼 독재자처럼 회사를 운영해서 회사에 손해가 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참지 않을 겁니다. “
레리 엘리슨은 유명한 스티브잡스와 버금가는 독재자 스타일의 경영자다.
“끄응, 그게 전부인가?”
“예, 그 선만 지켜준다면 내가 나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하겠나?”
“약속합니다.“
“그럼 서류에 사인해주게.”
미리 준비라도 했던 사람처럼 레리가 가지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결코 말로 하는 약속은 믿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살펴보고 다시 만나서 사인을 하는 걸로 하지요.”
서류에 사인하는 것은 심사숙고를 거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서류에 덜꺽 사인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워렌버핏만 해도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는 투자를 할 때마다 수많은 부대조항들을 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최악의 경우에도 절대로 손해 보는 계약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떠난후에 함께한 오장우에게 규태가 투덜거렸다.
“기분 좋게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니네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진이 빠지는 기분입니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관계라는 게 정말 미묘한 부분이 있거든요.”
“좋은 사람과 만날 시간도 없는데 이야기를 나누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람은 정말 싫군요.”
“자기한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화가 난 규태를 오장우가 달랬다. 이런 오장우가 얄미운 규태가 물었다.
“오사장님은 언제 한국에 돌아가십니까? 미국에서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한국의 회사에 일이 쌓여있지 않나요? 소전무가 어제도 전화하지 않았습니까? 저한테는 전화도 잘 안 받는다고 하소연을 하던데요.”
“흠흠, 요즘 집안 분위기가 좋은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장우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서 살판이 났다. 이미 벌어둔 돈도 있겠다. 가지고 있는 주식들의 가치는 급속하게 올라가겠다. 그야말로 세상에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요즘 소프트뱅크가 잘나간다면서요?”
“현금을 쌓아두고 투자할 회사를 찾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 독점판권을 가진 소프트뱅크가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컴퓨터의 보급이 많아지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독점은 깨질 줄을 몰랐다.
수중에 돈이 들어오면 어떤 회사를 인수할지를 고민하는 건 역시 닥치고 돌격의 손정의 사장다운 기백.
소프트뱅크의 대주주인 규태의 입장에서도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마이크로 소프트의 주식에 대규모로 투자를 하게 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기술주를 양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이번에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사장이 찾아오게 만들죠. 가격불문하고 크게 지르세요.”
1988년의 겨울에 있은 미대선의 결과는 부시후보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온통 사람들의 관심이 새로운 대통령에게로 쏠려있던 겨울에 규태는 직원들과 함께 기술주 사냥에 매진했다.
미리 정해놓은 매입금액 45억 달러 전부를 기술주 매입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미묘하게 규태의 기억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카오스이론처럼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오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마음을 일으켰다.
몇 가지 시험적인 시도를 해본 결과 확실히 과거가 바뀌는 일들이 발생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한 소리였다.
어디까지나 규태는 이레귤러다.
과거에는 규태처럼 막대한 손을 손에 쥐고 공격적으로 기술주를 사냥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주가만 해도 과거보다는 한결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또 한 차례 주식분할을 하고도 마이크로 소프트가 100$를 넘었다는 소식은 규태의 마음속에 한 가닥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규태의 수중에는 18%의 마이크로 소프트 주식이 안겨졌다. 여러 명의로 분산되어 잇지만 회사의 주인으로 알려진 빌 게이츠와 공동창업자 폴 앨런에 이은 3대주주였다.
들고 있던 돈도 바닥이 났고 더 이상 주식을 사들였다가는 이상한 영향을 미칠까도 두려운 차였기에 매입을 마쳤다.
결과로 마이크로 소프트 25억 달러를 투자해서 18%, 5억 달러로 시스코 시스템즈 15%, 5.8억 달러로 델 19%, 3억 달러로 애플 8.4%, 8억 달러로 오라클 38%의 주식을 매입하였다.
이밖에도 자잘한 주식을 매입했지만 어디까지나 연막용. 진짜 주가상승을 노리고 장기 매입할 주식들이기에 매입한 주식들을 볼 때마다 규태는 배가 불렀다.
레리 엘리슨과 오라클의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경영권에 간섭하지 않는 다는 계약서를 채결하면서 단서조항으로 다른 주주들 보다 배당을 1% 더 해주고 매각 시에는 레리 엘리슨에게 매입우선권을 준다는 내용을 넣었다.
규태의 입장에선 2000년까지 오라클 주식을 보유하고 있을 계획이었다. 레리는 흔하게 기술주들이 배당을 하지 않는 전통-그와 친분이 깊은 스티브잡스가 만들어 놓은 전통이다. 에 따라서 배당을 하지 않으면 그뿐이라고 잘 속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오라클의 배당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고 잡스가 죽기 전까지 애플도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지만 배당에는 한없이 인색했다.
2,000년까지 기술주의 주가가 수직으로 상승 하는걸 생각하면 배당은 푼돈이었다.
86년 상장일에 시가총액 7억 5천만 달러로 시작한 마이크로 소프트가 2,000년엔 3,000억까지 시총이 올라간다.
단순계산으로만 400배의 상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