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41화 (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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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전

늦가을의 뉴욕을 만끽하고 싶다면 센트럴파크로 가면 된다. 터널처럼 양쪽으로 가지를 펼친 노랗고 붉은 색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다보면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공원을 지나치는 사람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면서 호숫가를 달리다 보면 어째서 뉴욕사람들이 센트럴파크주변에서 살려고 하는지 집값이 미친 듯이 비싼지를 이해하게 된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 맨해튼에서도 핵심지역에 이런 거대한 크기의 공원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한참동안 헉헉거리며 아침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규태는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함께 사는 오선호가 준비한 컬럼비아 수프리모 원두를 로스팅해서 내린 커피를 마셨다.

세계의 커피를 마시는 것이 취미인 오선호가 즐겨 마시는 커피였다.

오장우의 가족이 뉴욕에 도착해서 따로 나가 살면서 규태의 집으로 들어온 오과장이 늘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면서 편해졌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뉴욕 타임스를 식탁위에서 읽는 것이 규태가 즐기는 아침의 소소한 행복이다.

대충 커다란 제목들을 대충 훑었다. 신문들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사건은 선거철이다 보니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선거중의 선거라 할 수 있는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모든 관심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구은 크로와상과 함께 한 모금 들이킨 콜롬비아 수프리모까지 더해져서 고소함이 배가되었다.

“커피 맛이 정말 좋네요. 이런 맛을 아침마다 보니까 나야 좋기는 한데 함께 살자면 불편할 것도 많을 텐데요?”

직장상사와 함께 사는 걸 좋아할 부하직원이 있을지 몰랐다.

“이런 때가 아니면 제가 언제 어퍼 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에서 살아보겠습니까? 여기 아파트값이 엄청나더라고요.”

오선한은 엄청난 노총각이다. 보통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하는 주변사람들과 달리 서른일곱이 됐는데도 오선한은 독신생활을 즐겼다. 말하자면 욜로의 선구자적인 사람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시간만 나면 여행을 즐기고 취미를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을 아까와 하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다면 됐습니다.”

보통 부자들은 집사학교를 나온 집사를 둔다. 여러모로 생활에 편하기 때문이다. 집사들 간에도 인맥이 있어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

집사를 교육하는 학교도 있어서 대를 이어서 집사 일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에리히가 몇 살이었지? 나랑 비슷한 나이였으니까 지금은 동독에 있겠구나!’

규태는 속으로 자신과 평생을 함께 했던 집사장을 떠올렸다.

에리히 클라이브는 동독출신으로 가족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삼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스위스 집사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집사가 되었다.

규태와 평생친구처럼 지내며 에리히가 죽을 때까지 함께 했었다. 제아무리 돈이 많아도 미국상류층에선 이방인인 규태에게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은 잔소리꾼이기도 했다.

유명한 격언이 있는데 마누라는 바꿔도 집사는 바꿀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규태는 이전에 결혼했던 아내들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집사였던 에리히는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결국에는 산호세입니까?”

“실리콘벨리니까요.”

처음 샌프란시스코로 정하려던 벤처회사는 케서린의 고집으로 산호세로 정했다. 산호세의 중심가에 위치한 12층짜리 건물을 하나 매입해서 그곳을 통째로 사용했다.

“강현 과장이 어지간히 탈탈 털리는 모양입니다.”

“케서린이니까요. 성질머리 아시지 않습니까.”

오선호가 몇 번 만나지 않아도 알 정도로 케서린은 다혈질이었다. 고집도 세고 남의 말도 잘 듣지 않지만 상황의 변화를 유려하게 받아들인다.

“참 기묘한 캐릭터예요. 그러니까 실리콘 벨리의 너드들을 다루는 거겠지만 말이요.”

지독하게 고집 세고 남의 말 죽어라 안 듣는 너드들을 상대하는 것, 실리콘 벨리의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마주하는 힘든 현실이다.

불같은 성격의 케서린이 실리콘 벨리에서 실적을 낼 수 있는 것은 이들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케서린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알면 알수록 적임자란 생각이 듭니다. 강현 과장 말로는 투자를 상담하는 건수가 그렇게 많답니다.”

규태의 기억 속에 대박성공을 거둔 기억이 남아있지만 그 외에 자잘한 성공을 거둔 기업들은 남아있지 않다. 케서린이 제대로 일만 해준다면 나름 만족이다.

“잘됐으면 좋겠네요. 벤처투자란게 워낙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 같은 일이라서.”

“그리고 복일모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텐포드에 입학을 준비 중이라 ELS과정을 등록해서 다니고 있답니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니 어렵지 않게 들어가겠지요.”

미국은 졸업생이 추천서를 써주면 대학에 입학하는데 수월하다.

“케서린도 힘을 조금 쓰는 모양입니다. 실리콘벨리에선 발에 차이는 게 스탠포드 졸업생들이니까요.”

준비하는 과정이야 복잡하지만 결과는 쉽게 나온다. 규태의 회사에도 스탠포드출신이 꽤 있었다.

결정적으로 케서린도 스탠포드 출신이었다.

“잘되겠죠. 학교를 다니면서 할 일이 많습니다. 건져야할 사람들도 많이 있고요.”

야후를 창업한 제리 양을 비롯해서 구글의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도 스탠퍼드에 다니고 있거나 다닐 예정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규태가 미리 앞서서 설레발을 떨어봐야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이 최선이다.

느긋하게 아침시간을 보내던 오선호가 시계를 보더니 다급하게 서둘렀다.

“이러다 늦겠습니다. 조금만 지나도 지옥입니다.”

뉴욕 맨해튼의 출근길은 막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출근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아직 차가운 아침바람을 뚫고 회사로 달렸다.

교통체증을 피해 일찌감치 회사에 출근한 규태가 제일 먼저 얼굴을 마주한 사람은 비서도 아니고 리처드였다.

50억 달러를 투자해서 만든 타이거펀드의 대표인 리처드는 요사이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로 바빴다.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입니까?”

“제기랄 자네 말이 맞았어. 아침에 여론조사결과를 받았는데 선거에서 부시가 압도적이더군. 4%나 앞섰다는 결과가 나왔네.”

공화와 민주 양당으로 나눠진 미국 대선판은 1%에도 희비가 엇갈린다. 그 차이가 4%이상 났다는 건 이미 판세가 정해졌다는 소리였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놀랄 일이지 공화당이 3연임에 성공한다는 거잖나.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야.”

“아직까지 레이건의 인기가 높으니까요. 강한미국이라니! 미국사람이라면 듣기만 해도 가슴속이 시원할 말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의 정책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국민들이 많다는 소리지요. 거기에 부시도 나름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제기랄! 이번에는 바뀔 줄 알았는데”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월가출신답게 리처드는 민주당의 지지자였다. 인맥도 그쪽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릴리 주한미국대사가 부시후보하고 연관이 있습니다. 이번 정부하고는 그 정도 선만 유지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규태는 당장 미국정부하고 친하지 않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군수산업에 발을 걸친다면 모를까, 전혀 그쪽으로는 생각도 없었다. 한국정부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 막아줄 방패정도가 필요하달까.

리처드는 지난번의 소동으로 규태가 미 정부에 연줄을 가지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뭐 자네생각이 그렇다면야.”

“펀드의 투자자 모집은 잘되어갑니까?”

“어려울 게 뭐가 있나, 초기자금이야 자네가 투자를 해준 돈이 있으니 문제가 없고 오히려 여기저기서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골치지.”

“너무 자금이 커도 굴리기가 힘이 드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자네 말대로라면 컴퓨터와 연관된 종목들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아직 회사들이 규모가 작아서 친구 몇 명에게 30억 달러정도만 받을 생각이네.”

“그 정도라면 야. 투자자들에게 장기적인 투자라는 건 충분히 설명을 하셨겠지요?”

“돈 많은 친구들이라 십여 년은 꼬박 넣어놔도 문제가 없을 걸세. 친구들이 자네를 한번 보자는데 어쩔 생각인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일이 많아지고 바빠지는 건 사실이지만 자잘한 일들은 전부아래에서 한다.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규태에겐 제일 곤욕이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전부 구봉만과 오장우에게 떠넘겼고 미국에서는 외국인이란 핑계로 리처드에게 미루는 중이었다.

“시간이 나면 만나면 되지요.”

“자네 사람 만나는 것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거창하게 격식 차리고 이런 게 번거로 와서 그렇지 저도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합니다.”

그 말에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돈을 번 젊은 사람들에게 흔하게 보이는 증상이었다.

“그거라면 걱정 말게. 오늘 한사람을 만나기로 했네. 아참 자네가 자리에 나오면 깜짝 놀랄 걸세.”

규태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놀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답을 주지 않은 리처드가 바쁘다며 사라졌다.

“규태냐? 이놈의 자식! 집에 전화를 좀 해라!”

비서가 돌려준 전화를 받은 규태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얼른 귀를 뗐다.

“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요. 아무 일이 없으니까 전화를 안한 거죠. 엄마한테는 도착했다고 전화했어요.”

“나한테도 해야지. 사내놈 키워봤자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재미는 막내하고 많이 보시고요. 잘 계시죠? 집에 별일은 없고요?”

집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었다. 한국에선 꽤 징그러왔을 것이다.

“왜 없겠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감사실에 불려가고 시장한테도 불려갔다.”

힘없는 공무원의 비애였다.

“그러니까 그만두라니까요. 그렇게 미련을 두더니 이젠 포기하실 때가 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제 그만둘 생각이다. 내가 전화한건 정웅이가 건설회사를 인수하는 건 말이다.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은행에서 지랄하면서 난색을 표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야기가 급하게 진행되더구나.”

“돌아가는 사정이야 뻔하죠, 위에서 압력 들어와서 눈치 보느라 그런 거 같은데, 이젠 눈치 볼게 사라졌나보죠.”

관치금융하의 은행사람들 행동이야 뻔히 그려졌다.

“그래, 잘돼서 다음 주에 회사 인수도장 찍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라고, 이번에 구사장님이 힘많이 써줬다.”

“예예, 알겠습니다. 건강조심하시고요. 내년 봄이 되면 미국에 놀러오세요. 이젠 할 일도 없으시잖아요.”

“내가 자식을 잘 둔건지 잘못둔건지. 이 나이에 은퇴를 해야 할 판이니.”

아버지 김상웅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자식 잘 둔거지요. 그런데 시차 때문에 거기 새벽이잖아요. 빨리 주무세요.”

“그래, 너도 건강하게 지내고 일 있으면 연락······. 아니 없어도 자주 연락해라.”

다행스럽게 집안에 별일은 없는 모양이다. 아버지와 통화를 마친 규태는 여느 때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검토하며 여느 때처럼 시간을 보냈다.

리처드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어 약속장소에 나가자 진짜 리처드의 옆에 있는 깜짝 놀랄 얼굴을 발견했다.

“자네가 나를 보고 싶어 했다면서?”

“이런 빌어먹을, 리처드 이 사람이 나올 거라고 말을 해줬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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