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39화 (3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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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서린 그린

기룡증권 소진세 전무는 사장 오종우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자 가슴이 답답해왔다. 증시에 상장되지도 않은 비상장사지만 기룡증권의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기룡증권의 전국 지점 수는 15개, 하나하나의 규모가 만만치 않게 컸다. 소위 말하는 양보다는 질을 선택하는 성장전략을 채택한 탓이다.

거기에다 상품주식의 투자에 성공해서 보유하고 있는 자금도 풍족했다. 봄부터 시작한 증권주매도부터 시작하여 가을이 오자 가지고 있는 상품주식의 매도를 마쳤다.

건설에서 무역주로, 다시 은행주로 이어지는 상승의 순환 사이클을 잘 이용해서 투자에 성공해 투자이익을 극대화시켰다.

자본금 500억에 1,200억의 차입금까지 이용한 주식투자에서 거둔 매매이익이 850억, 기룡증권이 창립된 이후로 한해에 벌어들인 수익으로는 역대 최고였다.

조촐하기만 했던 회사의 조직도 크게 늘어났다. 본사조직을 두 개로 쪼개서 영업본부와 경영지원본부로 나누고 지점의 인원도 계속 충원했다. 지점의 인원까지 합친 회사의 인원수가 333명.

대규모로 신입직원이 늘어나고 경력직도 다수 채용하면서 어수선했던 회사 분위기도 이제는 정돈되었고 경영지원을 담당한 소진세가 한숨을 돌리기 무섭게 사장이 미국으로 사라진 것이다.

인사부장이 가져온 결재 서류를 살펴보며 사인을 하려던 소진세가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선배놈 같으니라고! 아주 제멋대로라니까. 이러려고 미국에서 투자회사 잘 다니는 날 그렇게 꼬신 거야.”

가장 중요한 사장이라는 사람이 책임감도 없이 이렇게 훌쩍 자리를 비우면 그 압박은 고스란히 소진세의 몫이 된다.

거기에 투자를 총괄하는 짐까지 하나 덧붙여서 달고 있어서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소진세다.

회사에 할 일이 매일 무섭게 쌓이고 있었다. 매달 새롭게 뽑는 경력직원의 숫자가 열 명 남짓, 이력서를 받아 면접을 하고 채용을 결정하고 뒤처리를 하는 일도 버거운 데 아직도 본부부서들마다 사람이 부족하고 아우성이다.

증권사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며 급여를 올렸지만 증권사들의 급여가 바닥을 헤맨 것도 옛날이야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직원월급은 이제 금융계에서도 선두권으로 바뀌었다.

쓸 만한 인재가 증권사로 들어온다면 이름 있는 상장사로 향하지 일반인들을 들어보지도 못한 기룡증권으로 오지는 않는다. 그만큼 회사의 네임밸류 차이가 심한 것이다.

기룡증권이 올해 투자로 1천억을 벌었다고 해도 마찬가지, 증권사들마다 앞 다투어 증자를 해서 2,3천억의 자산을 가진 증권사들이 즐비했다.

“입사한다는 직원들 가운데 도문호가 보이지 않네? 어떻게 됐어?”도문호는 국내에선 보기 드문 M&A전문가다. 골드만삭스에서 일을 배우다가 국내로 들어왔는데 노리는 사람이 많았다.

“시간을 질질 끄는 게 이상해서 알아보니 한세증권으로 가기로 결정했답니다.”

“이것 참! 쓸 만한 놈들은 하나같이 다른 회사로 가는구만. 내가 분명 그쪽 파트에 전권을 준다고 했는데 말이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그놈이나 사장 놈이나.”

윗사람이 더 윗사람 험담을 하는 모습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던 인사부장인 오명호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니 어쩝니까. 아직 회사의 규모가 작은 걸 탓해야죠.”

“하긴 그놈이 뭐가 아쉽다고. 이런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회사로 오겠어.”

결재 서류에 사인을 마친 소진세가 그제야 생각이 떠오른 일을 확인했다.

“인력이 계속 충원되는 건 좋은데 사고가 생기는 건 철저하게 막아야해.”

“황이사가 보통사람입니까? 그쪽에서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기룡증권의 감사파트는 황규철이 맡고 있는데 하나같이 보통사람들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직원의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전수조사에 들어갔다.

큰돈을 다루다보니 사건사고도 다반사다.

“오부장이 사장님께 전화를 해봐. 내가 전화를 하면 받지를 않으니.”

“보나마나 전화로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를 거잖습니까?”

“그럼 속 터지는 일이 한두 가지 아닌데 어쩌겠어.”

“어차피, 다음 달에는 재무부에서 회의가 있어서 들어와야 합니다. 차관주재라 빼지도 못해요.”

“그래? 다행이로군. 이놈의 사장선배놈 들어오기만 해봐라.”

소진세가 이를 악물었다. 들어오면 오장우에게 퍼부을 욕이 그의 머릿속으로 주르륵 지나갔다.

규태와 마주앉아 회의를 하던 오장우가 귀가 가려운지 슬쩍 긁었다.

“괜찮습니까?”

“누가 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데요? 귀가 가려운걸 보면 말입니다.”

“한국에서 욕할 사람이 많을 걸요? 이를테면 소진세전무 말입니다.”

“흥, 억울하면 제 놈이 사장하라지요.”

그 말에 고개를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규태의 미국행을 수행하기에 제일 적합한 인물은 소진세 전무였다. 소진세는 미국의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서 십년 넘게 근무한 보기 드문 전문가였다.

동양인이 대형 투자은행의 책임자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소진세도 진급에 번번이 물을 먹었다. 유리천장을 깨부수지 못하고 고민하는 소진세를 그전부터 집안끼리 잘 아는 오장우가 스카우트해 왔다.

오장우가 자리를 비운 지금 실질적으로 한국의 기룡증권을 책임진 사람은 소진세다. 회사 일이 많아도 보통 많은 게 아닐 테니 도망가지 않은게 용했다.

일이 많아 새벽에 퇴근을 하면서 만성 과로에 시달리던 오장우가 미국으로 반쯤은 도피행각을 감행한 것이다. 아내 히로스에까지 동행해서 새로운 신혼을 만끽하는 오장우였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아무래도 어렵겠는 데요?”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주구성은 빌게이츠가 45%, 폴 앨런이 25%, 발머가 8%를 가진 주요주주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힘을 합쳐서 병으로 자리를 비운 폴 앨런의 주식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사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친분으로 둘이 힘을 합쳐 만든 회사가 마이크로 소프트였지만 빌게이츠와 앨런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폴 앨런이 워즈니악과 다른 점은 퇴사하면서 지분을 일부 매각했지만 나머지는 계속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86년 상장한 이후로 계속 주식을 분할해 나갔다. 87년의 1:1 주식분할이 있었고 88년에도 또 한 차례 주식을 분할할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주식의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는 너드같은 외모 속에 계산적이고 냉정한 속내를 숨긴 사악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실제로 폴 앨런과의 다툼에서 보인 모습이나 경쟁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빌 게이츠도 보통사람은 아닙니다. 대주주들이 매각을 할리도 없고요.

“그래봐야 어린 피라미죠.”

규태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주요주주명단을 한참동안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 같으면 절반정도의 지분을 인수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빌게이츠와 사이가 좋지 않은 폴 앨런도 주식을 팔지 않고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만큼 회사의 전망이 밝았다.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면 증자를 권유하겠지만 마이크로 소프트의 자금흐름은 아주 원활했다. 85년 출시한 원도우 1이 대성공을 거두고 87년에 발매한 2.0도 판매에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86년 마이크로소프트에 비해 하루먼저 주식을 상장한 오라클은 조금 나았다. 레리 엘리슨이 IBM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완전하지 않은 버그덩어리의 제품을 과대광고를 펼쳐서 팔아먹은 것은 유명하다.

기업의 DBMS를 한번 바꾸면 다시 바꾸기가 어려운 점을 이용한 사기였다.

오라클 데이터베이스6가 되어서야 겨우 버그를 잡아낼 수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 상장하면서 기세등등하던 오라클의 주가는 최근들어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조만간 발매되는 제품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마이크로 소프트가 어려우면 오라클로 한번 밀어보죠.”

“오라클이요? 오라클은 사주가 레리 엘리슨입니다. 그 사람도 보통 악당이 아닙니다. 스티브 잡스와 친분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레리 엘리슨은 제멋대로 하는 행동과 발언으로 실리콘 벨리의 악동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죠. 둘 다 성깔이 보통이 아니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니까요. 하여간 지금 오라클 주식이 바닥인 것 같습니다. 오라클의 주식을 중점적으로 매집하죠.”

규태가 결정을 내리고 밀어붙였다.

***

규태는 뉴욕에서 회사를 두개 설립했다. 하나가 사모펀드로 운영하는 타이거펀드고 다른 하나는 벤처기업에 투자하기 위한 타이거 벤처캐피탈이었다.

사모펀드의 성격으로 만들어지는 타이거 펀드의 사장으로 리처드를 임명하고 벤처캐피탈의 책임자로 산호세 캐피탈의 케서린 그린을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리처드야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이라 별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케서린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일에는 반대가 있었다.

아직 서른이 넘지 않은 미혼의 여자를 10억 달러짜리 회사의 CEO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규태는 강력하게 케서린을 영입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일이 쉽지가 않았다. 당사자인 케서린이 영입제안을 쉽게 수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케서린은 실리콘벨리의 암사자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안목과 저돌성을 지녔다.

나이를 먹어서도 180㎝이 넘는 장신에 긴 은발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면 기백이 넘쳐흘렀다. 기술자들이 즐비한 회사에 투자하는 벤처 캐피탈을 위해 필요한 덕목인 친화력과 추진력이 대단했다.

목마른 놈이 샘을 팔수밖에.

케서린과 약속을 잡은 규태가 비행기를 타고 산호세로 달려갔다.

“반갑습니다. 케서린 그린입니다.”

“김규태입니다. 제 이름을 부르긴 어려울 테니 킴이라고 부르세요. 나를 보자고 했다면서요?”

“어떤 정신 빠진 사람이 업계경력도 길지 않은 저에게 10억짜리회사에 사장자리를 준다는 건지 정신감정을 받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회사에 만족하고 있어서 굳이 회사를 옮길 생각도 많지 않고요.”

케서린은 장신의 모델 같은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대학을 다닐 때 패션잡지의 모델로 활동한 경력도 있었다.

케서린이 실실 웃으며 규태의 성미를 긁었다.

‘어우!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규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말이 좋아 실리콘벨리의 암사자지, 생글거리며 그녀의 웃는 모습에 홀딱 넘어갔다가 박살이 난 남자가 한 둘이 아니다.

“케서린의 능력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었습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의 초기 성장을 도운 것도 그렇고 애플에도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까? 케서린의 강력한 주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빌어먹을 놈들 이야기는 빼주시죠. 잡스가 쫓겨난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녀가 투자할 때 실무 책임자였던 워즈니악과 친분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를 쫒아낸 잡스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잡스를 쫒아낸 애플도 그놈이 그놈이라고 좋아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녀에게 애플은 주는 것도 없이 기분 나쁜 회사인 것이다.

“제가 가진 투자회사에서 애플에도 투자를 하겠지만 아주 작은 부분이지요. 당장은 오라클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오라클이요? 잡스와 어울려 다니는 그 사기꾼 떠버리에 투자를 하겠다고요? 그 자식은 입만 살아서 만들어지지도 않은 걸 만들어졌다고 사기치고 다니는 놈이라고요. 이번에 발표한다는 DB 6 역시 마찬가지겠죠.”

다혈질 성격답게 목소리가 커지며 핏대를 올리는 케서린을 규태가 막았다.

“오라클이 제대로 된걸 만들어 내면요?”

“안 믿어요. 믿는 놈이 바보죠. 실리콘벨리에서 그 자식 이빨에 넘어가서 이를 가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닌데. 이번에도 양치기 소년 짓을 하고 쫄딱 망할걸요. 실리콘벨리에서 오라클이 망한 다음에 옆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은 사람이 한 트럭일걸요.”

레리 엘리슨의 평판이 월가뿐만이 아니라 실리콘벨리에서도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아쉽게도 이번 버전은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 내기를 하죠. 나는 오라클이 이번에도 개망신을 당한다에 걸죠.”

“나는 반대편에 걸지요. 내기에 이기는 사람이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 어떻습니까? 딜?”

“보나마나 내가 이길 테죠. 보아하니 엄청난 부자 같은데 원하는 게 클 수도 있어요. 딜!”

오라클의 새로운 제품이 나오는 날 케서린 그린은 망연자실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진짜, 다시 한 번 확인해봐? 버그덩어리로 유명한 오라클이 제대로 된걸 만들어냈을 리가 없다니까?”

- 나도 몇 번이나 확인한 거야. 하도 믿기지가 않아서 다른 회사의 놈들에게 확인전화도 했었다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된 게 나왔어. 엘리슨 그 사기꾼이 제대로 된걸 만든 거지.

“제기랄, 이게 무슨 일이야.”

케서린 그린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회사를 옮길 마음 따위는 애초부터 조금도 없었다. 지금 하는 일도 나쁘지 않고 조만간 자신의 이름을 딴 벤처펀드도 나올 계획이었다. 이대로 조금 더 자리를 잡고는 독립할 계획이었던 케서린이었기에 이름도 생소한 동양인이 주인으로 있는 회사로 옮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젠장 일본인은 싫은데, 아니? 중국인인가?”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규태의 국적을 알아보았을 리가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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