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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다
대선후보들의 뜨거운 유세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녹였다. 누구하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입장에서인지 3김과 여당후보인 노대표의 유세가 전국을 들끓게 만들었다.
전국이 시끄럽던 말던 규태는 조용히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시간을 죽였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남아있는 기간이 줄어들수록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군내부에서는 노골적으로 여당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선거운동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결과를 알고 있으니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규태는 입을 다물고 세월이 흐르기만은 바랐다.
KAL기 폭파사건이라는 빅뉴스가 일어나고 남북대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뜨거운 한겨울의 선거운동이 마무리 되고 12월 19일 결과가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나자 봄을 기다리던 많은 이들이 절망을 느꼈다.
산발적인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있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많은 이들이 패배의 원인으로 야당의 분열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규태는 선거의 결과보다 그 이후를 준비했다. 울적한 주말을 끝내고 시작된 월요일의 주식시장은 그동안의 이어지던 조정기를 마무리하고 강한 상승으로 시작했다.
이미 외국은행을 통해 1,000억 원의 투자자금을 조달해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전체증시가 상승하는 강세장이었다.
종합주가지수 473에서 시작한 증시는 무서울 정도로 불기둥을 뿜어내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종목가운데 시장을 선도하는 주식은 증권과, 건설, 은행의 트로이카주.
시장에 나오는 증권주는 바닥에 깔아 나오는 족족 물량을 잡아두었다. 예상처럼 위로 치솟아 오르는 증권시장을 바라보며 규태는 봄을 기다렸다.
3월이 되자 규태는 증권주의 매도를 시작했다. 32,000원선에서 매입한 대우증권이 50,000원을 넘었다.
대신증권의 주가도 28,000선에서 매입한 40,000원이 넘은 상태에서 시작한 매도였다.
대략 800억의 주가를 매도한 결과 430억의 투자이익을 거두었다. 건설과 은행주는 올림필전까지는 추가적으로 상승할 여지가 있어 남겨둔 상태였다.
6개월의 주식보유의무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미성증권의 지분 30%는 K생명보험에 블록딜로 1800억에 넘기기로 협의를 마쳤다.
345억 원의 투자로 1,450억의 투자이익을 거둔 대단히 성공적인 투자였다.
거기에 규태의 개인지분은 그대로 남았다. 예상하지 못한 제2대주주의 등장에 곽병호사장이 짜지려고 들었지만 남은 지분을 들먹여 입을 막아버렸다.
빈정이 상하면 개인지분까지 넘겨버린다는 협박이 그대로 먹혀 든 것이다.
매주 금요일이면 대전에 내려오는 오장우사장이 그동안의 투자결과 정리해서 보고했다.
“증권주 매도로 실현한 이익이 230억입니다. 나머지 주식은 지시하신대로 올림픽 전까지는 계속 들고 있을 겁니다. 미실현 수익까지 합치면 500억이 조금 넘는군요.”
예전 같으면 크게 호들갑을 떨 수익이었지만 이미 미국시장에서 큰 이익을 본 터라 오장우는 덤덤했다.
“주식시장이 아직 작으니까 투자를 하는 것도 힘들어요.”
“성장속도가 빠르니 금방 커지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주식매입은 계속하고 있겠지요?”
이미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규태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오라클과 같은 첨단주의 투자를 지시했었다. 스톱사인을 규태가 따로 내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매입이었다.
“뉴욕사무실에서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따로 보고를 받지는 않고 있습니다.”
분기에 한번은 오장우가 직접 뉴욕사무실에 들러서 투자를 지휘하고 감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곽사장은 어떻습니까?”
“요즘 코가 쑥 빠졌습니다. 주식상장으로 한참 기세가 등등했다가 K보험이 회사의 제2대주주가 되자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규태가 쓴 웃음을 지었다. 블록딜을 하기 전에 곽사장으로부터 여러 번 연락이 왔지만 마나주지 않았다.
“제 원망을 하고 있겠군요.”
“어쩌겠습니까. 자업자득이지요.”
도청 건은 오장우도 들은 바가 있다. 추가로 밝혀진 내용은 곽사장이 직접 관여해서 도청을 시도한 것은 아니고 그일을 맡은 담당자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지만 하여간 곽사장이 창투사의 투자내역을 알려고 한 것은 사실.
막대한 자금동원력을 가진 K생보의 등장은 경영권에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여전히 K생보는 규태의 개인지분을 구매하려 시도할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꾸준히 주식을 사들였다.
“곽사장 지분이 38% 정도던가요?”
“계속 시장에서 지분을 매입을 하고는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주가가 많이 올랐으니까요.”
오장우가 이마를 긁었다.
“곽사장님하고 친분이 있는 사이라 중간에서 제가 입장이 곤란하기는 합니다.”
지분을 넘기는 순간 경영권이 넘어간다. 규태를 괴롭히지 못하니 오장우를 들볶는 모양이었다.
“어쩌겠어요. 그래도 제가 가진 지분 때문에 큰소리는 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제 개인지분을 당분간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오장우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사적인 친분을 떠나서 처리를 해야 하는 일이다.
“소프트뱅크는 어떻습니까?”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데다 주주인 오장우다.
“원도우의 독점으로 막대한 현금이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마사히로가 열심히 들어온 돈으로 회사를 사들이는 모양입니다.”
인수와 합병으로 기업의 규모를 늘려가는 투자는 손정의다운 투자였다.
“일본시장은 규모가 커서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지분을 넘긴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오히려 기룡증권의 이익이 막대해서 본부장님이 후회하실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그렇긴 합니다.”
규태가 뺨을 긁었다. 기룡증권이 거둔 블랙먼데이의 투자수익이 엄청난 규모다. 그중 5%는 고스란히 오장우의 몫이 된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인수가 가능한 건설회사의 명단입니다.”
오장우가 건넨 명단은 서울과 경기도의 건설사 가운데 부도가 났거나 날 예정인 부실기업들이다.
가족펀드를 정산한 결과 나온 수익으로 인수가 가능한 건설사를 찾았다. 부산이나 경남 쪽의 건설사를 알아보다가 서울과 경기도의 건설사를 인수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작은 아버지 김정웅의 선택이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분당과 일산과 같은 신도시개발에 대한 발표도 있을 것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황이사는 어떤 회사를 추천하던가요?”
“여기 부양건설과 광호건설, 두 회사를 추천했습니다.”
“부양건설은 은행부채가 800억이 넘는군요? 광호건설은 240억.”
두 회사의 재무제표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넘겨보는 규태의 눈길이 매서웠다.
“주거래은행하고 협의를 거쳐서 조정을 받아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부양건서를 인수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부채가 크지만 가지고 있는 땅도 그만큼 많습니다.”
보유자산 명목을 주르르 살피던 규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과 경기인근에 많은 땅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규태의 눈을 끈 것은 일산과 분당과 같은 경기도의 토지로 50만 평이 넘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사채도 많이 썼을 것 같은데요?”
“알아본 바에 따르면 사채규모가 350억입니다. 고금리라 인수를 확정하면 갚아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음은요? 명동바닥에 굴러다니는 어음의 양도 꽤 될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120억 정도가 확인되었습니다만 추가로 더 나올 겁니다.”
“인수자금이야 얼마 들지 않겠지만 재무구조를 개선하는데 막대한 자금이 들겠네요.”
“주거래은행을 변경하고 1,000억 정도 담보대출을 받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정 안되면 회사채라도 발행하던가 창투사에서 자금을 대여하는가 하면 되니까요.”
국내로 자금을 들여오지는 못하지만 해외의 보유자금이 엄청나다. 자금이 묶이기는 하지만 일부러 10억 달러 정도의 금액은 은행에 넣어두고 있었다. 첨단주에 투자하는 한편으로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부동산 투자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 회사로 작은 아버지와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오사장님은 파악하지 못한 어음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아보세요.”
부산에 있는 작은아버지 김정웅이 작은어머니와 함께 회사인수를 논의하기 위해 대전으로 올라왔다. 김정웅은 부산대학생인 큰딸과 아직 고등학생인 자식들의 교육 탓에 부산, 경남을 벗어나기를 꺼렸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회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규태가 추천한 부양건설은 김정웅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기업이라고 하기는 그랬지만 회사의 자산이 천억을 넘는 덩치가 있는 회사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큰 회사의 부채에 김정웅도 쉽게 결심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망설이는 김정웅에게 규태가 차근차근 추천을 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작은 아버지가 맡긴 투자금이 150억으로 늘었습니다. 이중에서 백억을 회사매입으로 사용하시고 50억은 남겨두세요. 부실한 회사의 재무구조는 창투사의 투자로 고율이자는 갚고 저금리의 은행이자로 갈아타면 회사를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김정웅은 규태가 정리한 내역을 살펴보았다.
김정웅의 지분이 70%이고 창투사가 30%의 지분을 인수하는 계획서였다.
작년에 이자로 나간 돈이 150억 넘었다.
막대한 부채를 갚느라 적자가 쌓여서 300억 자본금이 자본잠식 상태다.
가장 커다란 타격은 350억의 미수금이었다. 아파트 시공을 끝내고 잔금을 받지 못한 것이다. 내역을 살피던 김정웅이 욕을 내뱉었다.
“이런 개@%$#, 보나마나 고의부도에 당한 거다.”
지방의 작은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온갖 더러운 건설사의 생리를 잘 아는 김정웅이다.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회사가 고의부도를 내고 대금지불을 미루면 자금력이 약한 개인이나 회사는 힘없이 나가떨어진다. 자금력이 약한 것을 알아차리고 술수를 부린 것이다.
“미수금을 받으려면 재판도 해야 하고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절차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받아는 낼 수 있겠지만 과정이 꽤나 골치 아플 것 같은데.”
온갖 양아치, 잡놈들이 판치는 판이 건설 판이다. 걱정하는 김정웅에게 규태가 큰소리를 쳤다.
“미수금의 정산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이사가 도울 겁니다.”
아직 황규철이사를 잘 알지 못하는 김정웅의 얼굴에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네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전부 얼마냐?”
“인수한 회사가 가진 부채 전체를 조정할 정도는 됩니다. 지금 창투사가 가진 게 현금밖에는 없거든요.”
미성증권의 엑싯으로 인해 창투사가 보유한 현금만 해도 2,000억이 넘는다. 게다가 필요하면 회사채를 발행해서 인수 할 수도 있다.
회사채를 발행해서 인수 할 수도 있다.
“나는 마음을 정했지만 작은 엄마랑 의논해보마.”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하세요. 정안되면 서울에 빌딩하나 사놓고 여행이나 다니시면 되잖아요. 백억으로 살 빌딩은 널렸어요.”
강남에 빌딩을 매입한다고 해도 제법 큰 규모를 매입할 자금은 된다. 골치 아프게 사업을 벌이느니 건물주 노릇을 하면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런 소리하지마라. 귀 얇은 네 작은 엄마가 들으면 홀라당 넘어간다. 남자는 일을 해야지. 나 아직 은퇴할 나이는 아니다.”
“하여간 의논해 보세요. 인수협상을 해도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을 테고 시간은 충분합니다.”
서둘러봐야 매입가격만 올라간다.
규태가 내민 서류를 한아름 싸들고 작은아버지가 돌아갔다. 오늘 저녁은 부친과 함께 술대작이나 하면서 의논을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