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32화 (3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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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먼데이

“규태야 외삼촌은 어쩔 거냐?”

“유치장에 갇혀서 한번은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 모양인지.”

“너도 아이를 낳아보면 알거다. 부모 마음이란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나저나 죄송해요. 제멋대로 할아버지재산이야기를 해서요.”

“......어쩌겠냐? 이미 결정을 내린걸.”

할아버지는 이따금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여기요.”

규태가 내민 봉투를 보며 할아버지가 물었다.

“이건 뭐냐?”

“할아버지가 어째서 땅을 움켜쥐고 있으려 하는지 아니까요. 재활원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잖아요.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밥이라도 제대로 먹이려면 농사짓는 땅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해서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을 걸 압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재활원에 물어보니 사정을 아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끄응, 입조심들 하라고 했는데.”

봉투안의 내용물을 살펴보던 할아버지가 그대로 굳었다.

“5억입니다. 할아버지 땅을 저한테 파신 겁니다. 고모할머니 주유소 옆에 땅값이라 생각하세요. 명의는 어머니 명의로 할게요. 그 돈으로 재활원을 돕는 일에 쓰시고요.”

나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의 외면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줄 몰랐었다.

구슬피 우는 사람들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그때 알았다. 어째서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땅을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 했는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재활원에 대한 후원을 멈추지 않으셨다.

미리 자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면 그렇게 자식들과 사이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이번에는 존경스런 인격자인 할아버지와 자식들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고맙다. 이 돈이면 아이들을 많이 도울 수 있겠구나.”

할아버지의 따듯한 손이 규태의 손을 잡았다.

경찰서 유치장이 꽤나 추웠는지 이틀 만에 엉망이 된 얼굴로 풀려나온 큰외삼촌이 앓아 누었다는 소식을 들은 규태는 혀를 찼다.

둘째 외삼촌을 고소하내마나 유치장에서 난리를 피웠다가 혼쭐이 난후에 기가 죽었다는 말도 들려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야비한 늑대도 먹을 게 없는 곳에서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

외삼촌의 일을 처리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규태였다. 갑자기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규태는 머리통을 두드렸다.

“이런 멍청한 놈,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지?”

급한 마음에 당장 서울로 달려갔다.

“오사장님. 우리 기룡증권 뉴욕사무소 설치하죠.”

“뉴욕 사무소요? 우리회사가요?”

갑작스럽게 달려온 규태를 반갑게 맞이한 오장우는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를 갸웃했다.

“증권사들 해외사무소 만드는 게 유행 아닙니까? 우리도 뉴욕하고, 그렇지 런던에 사무소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까지 국내지점을 설치하는 것도 서두르지 않는데 갑작스럽게 뉴욕지점이라니? 오장우가 머리를 갸웃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규태는 거침이 없었다.

“뉴욕에 오사장님이 아는 사람 없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누굴 보내야 하나.”

“우리 증권사가 비상장사라 감독원에서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이고! 어떻게든 최소한 뉴욕사무소라도 만드세요.”

한가한 소리를 하는 오장우가 규태는 답답했다. 10월에 미국시장의 대폭락이 있을 거라고 콕집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정말 드라마틱한 대폭락이 발생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블랙 먼데이다.

주가가 22.6% 하락하는 폭락장이 오면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하는가. 단기간에 주가폭락의 강도가 30년도의 대공황을 능가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여전히 의문을 표하는 오장우를 닦달해서 해외사무소 개설을 준비하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팀장은 캘리포니아 버클리를 나온 오선한과장이었다. 기룡증권 같은 작은 규모의 증권사에 머물 친구가 아니지만 대학동문인 오장우사장의 인맥으로 입사시킨 케이스였다.

처음 기룡증권이 해외사무소를 뉴욕과 런던에 개설하겠다고 신청했을 때는 증권감독원이나 재경부나 다들 코웃음을 치며 반려했지만 황규철과 경호회사 사장인 주성광의 인맥까지 총동원한 끝에 뉴욕사무소 개설의 허가를 받아냈다.

뉴욕사무소의 개설허가와 함께 송금 가능한 금액이 1,000만 달러. 여느 증권사 해외사무소보다 높았지만 자체 건물을 매입하는 것으로 인해 늘어난 금액이다.

이 시절의 금융기관은 철저하게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해외사무소를 개설하고 설치비용을 보내는 것도 미리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뉴욕사무실은 어디에 만들어야 할까요?”

“월 스트리트 쪽이 어떻겠습니까?”

“거기 비쌀 텐데요? 사무소 하나내는데 거기에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월스트리트는 세계를 진동하는 이름과 달리 짧은 길이다. 주변에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있어서 건물가격이 만만치 않다.

“어디든지 뉴욕이면 됩니다. 하다못해 소호지역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매디슨스퀘어 공원인근에 위치한 5층 건물을 급하게 인수했다.

건물인수와 사무소 개설을 위해 오선한과장과 강현대리가 급하게 뉴욕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규태는 오장우에게 굳이 뉴욕에 사무실을 개설하게 한 이유를 은밀하게 밝혔다. 혹시나 군대에 묶인 규태가 직접 나서지 못할 때는 오장우가 사정을 알아야 했다.

1987년 뉴욕증권시장은 계속 상승세를 보였다.

“그러니까 뉴욕증시가 불안하다는 이야기입니까? 어째서요? 미국경제가 나쁘다는 조짐은 보이지를 않습니다만?”

80년대 들어서 일본과 독일경제의 급상승으로 제조업이 몰락하며 쇠퇴했던 미국증시는 첨단산업이라는 돌파구를 찾아서 꾸준하게 상승세를 보였다.

“몇 년간 상승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가을쯤에 한번 조정을 받을 것 같습니다.”

“조정이 올 거라고는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게 큰 폭일 것 같지 않은데요? ‘

오장우는 납득을 하지 못했다. 1987년의 주식폭락은 이유를 알 수 없이 찾아왔다. 나중에야 그 원인중의 하나로 프로그램 매매가 지목되었지만 명쾌하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에 그 수익이 더욱 클 수밖에.

“주가지수 선물거래가 상장된 곳은 뉴욕거래소와 시카고상품거래소 두 곳입니다. 거래가 제일 많은 곳이 S&P 500 주가지수선물을 상장한 시카고상품거래소입니다.”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다우지수가 2,700까지 올라가면 조정이 올 것 같습니다.”

“다우지수가 오르내리는 추세선을 보면 가을쯤이 되겠군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투자하고 그 정체를 숨겨야 합니다. 나중에 엄청나게 뒷말이 나올 겁니다.”

주가폭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자살자가 늘어나는 판에 외국투자가가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엄청난 압박이 들어올 것이었다.

나중에 밝혀지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당장은 정체를 최대한 가려야 했다.

투자하는 자금은 바터방식으로 하는 투자다.

외국은행 서울지점에 규태가 예금을 하고 뉴욕지점에서 대출을 받는 방식이다. 투자제한의 규제를 피하는 방식이지만 미리 은행과 협의를 해야 한다.

예정된 투자방식은 10개 이상으로 쪼개진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뉴욕과 시카고의 선물 거래소에서 S&P 500 주가지수 선물을 매도하고 풋옵션을 매수하는 것이다.

투자하는 자금은 3,000만 불이었다.

오장우사장과 규태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결정한 투자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최대한의 투자규모였다.

화려하게 피어났던 봄꽃이 하나 둘 저물어갈 때 규태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논산 훈련소로 떠났다.

흙먼지 먹어가면서 고생을 한 규태는 5월이 되자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눈물바람을 하며 규태를 반갑게 맞이하던 어머니였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자 짧은 머리를 한 규태를 여상하게 여겼다.

규태가 출퇴근하는 부대는 제3군수지원단.

충청지역의 군부대의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였다. 그곳에서 부대를 경계하는 경계병으로 오후에 출근해서 밤동안 부대경계를 하고 아침이면 퇴근하는 병력이었다.

야간경계를 한다고 밤을 꼬박 세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경계근무 나가는 시간이외에는 잠을 잔다.

그래도 내무생활을 하는 곳이라서 규태를 괴롭히려는 선임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부대 요소요소에 손을 써 두어서 단장이 휘하장교들에게 잘 봐주라는 소리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생활이 편해졌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5월에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한열의 죽음으로 격렬해진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대전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전역주변은 대규모 인파가 몰려들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끄러웠다.

결국 노태우대표의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발표가 나오고 6월이 지나자 시내가 조용해졌다.

여름의 무더위가 지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저녁마다 불기 시작한 9월에 규태는 일병으로 진급을 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10월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부대에서 퇴근해서 창투사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꼬박 밤을 세운 복일모가 규태가 출근하자마자 준비했던 자료를 내밀었다.

“뉴욕사무소에서 보낸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뉴욕에서 날아온 팩스는 비밀유지를 위해서 간단하게 작성했다. 이를 다시 끼워 맞추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규태의 직속인 복일모가 뉴욕과의 시차 때문에 고생이었다.

기룡증권 사장인 오장우는 9월부터 뉴욕사무실 상주하면서 이번 일을 지휘했다. 다우지수가 2,700까지 오르자 시카고 상품거래소(CME)와 뉴욕거래소(NYSE)에서 선물을 매도했다.

“어제 다우가 2,300까지 하락했군. 선물투자이익이 전부 6,800만 달러라.”

시계를 보고 시차를 계산한 규태가 전화기를 들었다.

“오사장님, 거기 분위기는 어때요?”

“조용합니다. 주가가 하락하긴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으레 있는 상승후의 조정이라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투자이익으로 옵션을 매수하죠. 8:2로 쪼개서 풋과 콜을 매입을 하도록 하죠.”

제아무리 사장이 폭락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해도 일방으로 풋옵션만을 매입하는 것은 하수다. 투자이익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콜도 같이 매수를 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저도 찬성입니다. 잠잠하긴 한데 아무래도 찜찜한 게 폭풍전의 적막함 같아요. 온몸이 저릿저릿한 게 위험신호가 옵니다.”

그동안은 규태의 투자지시를 마지못해 수행하던 오사장이다.

회사주인이 하겠다니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모습이었는데 막상 닥치니 투자본능이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투자자가 되려면 본능이 발달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커다란 시련과 함께 침몰한다.

오장우에게는 투자본능이 있다.

“내일부터 시작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몸이 피곤한지 잠이 쏟아지네요.”

군생활을 하는 규태도 피곤하지만 오장우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시장을 살피느라 피곤한 모양이었다.

규태는 이리저리 움직여서 몸을 풀었다. 간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서 인지 몸이 찌뿌둥했다.

할 일이 많았다.

며칠 있으면 미성증권의 상장이 있어 상황도 살펴야 했고 가진 현금으로 주식도 매입해야했다. 앞으로 사야할 주식의 규모가 550억이 넘었다.

시장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며 뜨거운 커피를 한잔 마셨다.

“저 본부장님.”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복일모가 쭈뼛거렸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창투펀드, 새로 만들면 안 됩니까?”

기존에 만들어진 펀드의 결산이 있은 6월에 한번 난리가 났었다. 그도 그럴 것이 280억의 투자자금이 1년 만에 수수료를 제외하고도 784억이었다.

년 수익률이 280%.

결산 보고서를 받아 든 투자자들이 확인을 하느라 창투사의 전화기란 전화기는 불이 났다.

그리고 재투자 여부를 묻는 투자자총회에서 대부분이 계속 투자를 하기를 원했다.

일부만이 출금을 해 돈을 찾아갔다. 그렇게 빠져나간 자금이 28억.

추가로 투자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속출했지만 추가투자는 받지 않았다.

이후로도 추가투자의 가능을 묻는 문의가 이어졌지만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서 규태는 계속 거부했다.

“투자금 받아봐야 투자할 곳도 없어. 이제 주식시장도 끝물인데 어디에 투자하라고?”

“그래도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말끝을 흐리는 복일모를 보며 규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러냐? 투자신탁으로 가라고 말을 하면 되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 전해 앞으로도 추가펀드를 만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직접 회사로 찾아와서 난리를 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었다. 그래서 찾은 방편이 투자신탁회사로 손님을 넘기는 방안이었다.

대성공을 거둔 KF창투의 뒤를 따라서 다투어 상장주식에 투자한 창투펀드들이 대박을 터트리자 규제가 들어왔다.

창투펀드의 절반이상은 상장주식 투자를 못하게 막은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 비율이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복일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규태는 증권시장이 시작되자 정신을 집중해 주식을 매입해 나갔다.

1987년 10월 19일이 밝았다. 이날을 위해 미루어 두었던 휴가를 받은 규태는 창투사 사무실로 날이 밝자마자 출근했다.

낮과 밤을 바꾸어 사느라 피곤을 얼굴 가득 달고 살던 복일모도 모처럼 푸욱 쉬었는지 얼굴에

서 빛이 났다.

9월에 매도한 선물의 포지션을 확인하고 10월 들어서 매입한 옵션들의 가격변화를 하나하나 살핀 규태는 긴장에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애써 투자한 포지션을 잊으려 배달된 신문을 읽었다.

주식시장이 시작되고 투자한 주식들이 상승을 시작하자 거기에 몰두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구봉만사장과도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식사까지 가볍게 마치고 잠깐 잠이 들었다가 시끄러운 전화소리에 깨어나니 저녁 12시가 넘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악! 본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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