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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에 투자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창투사의 지분은 매각하더라도 규태의 지분은 그대로 가지고 가면 된다.
주식을 상장하고 나면 2번째 대주주가 될 것이다. 89년 1,000을 넘어 정점을 찍는 종합주가지수는 92년까지 긴 조정을 받는다.
그사이 한국에서는 주식을 정리할 생각이었던 규태다. 고민하던 규태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식을 가지고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김포공항을 출발해서 도쿄에 도착한 규태와 오장우는 곧바로 손정의를 만나러 달려갔다. 택시 안에서 보는 도쿄는 활기차고 낡은 건물들을 재개발하는 현장이 즐비했다.
이게 버블경제로구나!
한눈에 성장하는 도시의 모습이다.
“정말 엄청나네요? 주가도 많이 오르고 건물 값도 심상치가 않다는 말만 들었는데. 재개발이 한창이로군요. 저쪽은 낡은 건물들이 많았던 지역인데 다 때려 부수고 새로 건물을 올리네요.”
도쿄에서 살았던 오장우가 감탄을 했다.
“엔화가 강세지 않습니까. 금리도 저금리고요. 주식이던지 부동산이던지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지요.”
“이거 저도 이곳에 투자를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굳이 힘들게 일본에 투자할 필요가 있나 싶네요.”
“본부장님은 일본회사에 투자하겠다고 달려온 거 아닙니까.”
“그거야 회사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투자하는 거라.”
“한국에서도 투자할만한 기업이 있지 않을까요. 빼어난 인재들도 많습니다.”
“오대표님은 이렇게 일본회사에 투자하는 게 싫으신 모양입니다. 먼저 투자를 하신 분이 말입니다.”
“그거야 친분 때문에 한 거지요. 하긴 제가 할말은 아니었군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작은 건물 앞에 택시가 섰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곧바로 사장실로 달려가 손정의를 만났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자그마한 키의 젊은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오선배 오랜만입니다.”
“병원에서 다 죽어간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몸은 괜찮은 거야?”
“하하하, 병원에서 완치가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해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쩝, 같이 한잔하려고 했더니 이젠 글렀군.”
진정으로 아쉬워하는 오장우였다. 규태와 악수를 한 손정의가 자리를 권해 소파에 앉았다.
키 작고 머리가 벗겨 시작하는 호감상의 젊은이, 규태가 느낀 손정의 첫인상이었다. 바라보는 눈빛에 힘이 있었다.
“제 회사에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우연히 손대표님의 회사를 알게 되었는데 지분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투자를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찾아오셨으니 입장이 곤란합니다.”
투자가 크게 달갑지 않다는 뜻이었다. 규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의 손실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회사 주인이 자리를 비웠더니 엉망이 되었더군요. 지금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제게 투자를 받으면 회사의 발전 속도가 빨라질 겁니다. 제게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거든요.”
아이디어라는 소리에 시큰둥하던 손정의가 자세를 바로 했다.
“회사의 발전에 대해 해주실 충고가 있다는 겁니까?”
“투자에 관해서는 손대표님께서 잘 아실 테니 드릴 말씀이 없지만 작년도 결산 보고서를 봤습니다. 회사에 확실한 캐시카우가 없더군요.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을 잡고 총판에 대한 권리를 가져오면 어떻습니까. 아직 일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사가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 판매권을 가져온다?”“현재 소프트뱅크의 투자를 보면 꾸준하게 돈이 들어오는 캐시카우가 없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 판매권을 가져오면 회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마이크로 소프트는 미국의 영업에만 주력할 뿐 외국의 판매는 크게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제 투자를 받아 판매권 협상을 해보십시오.”
폐부를 찔린 것처럼 당황하던 손정의였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계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 고민해보겠습니다.”
규태는 손정의와 할 말이 남은 오장우를 두고 혼자 예약한 호텔로 돌아왔다. 제국호텔로 예약을 해둔 탓에 넓은 방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으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일본에 온다고 이른 아침부터 설쳐댄 탓에 잠이 부족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에 빠진 규태를 오장우가 흔들어 깨웠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나오니 정신이 들었다.
“지분에 대한 이야기는 나눠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마사요시는 경영권에 간섭을 받는 것을 우려하는 모양입니다. 가진 지분이 투자를 받다보니 줄어들어서 절반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회사경영에 투자자가 간섭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경영자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제 제안대로 투자를 받아서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상을 하는 게 나을 텐데 말입니다.”
“마사요시도 흔들리는 모양입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보였으니 고민을 하는 게 분명합니다.”
“결국은 받아들일 겁니다. 제가 원하는 지분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요.”
규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중에 회사의 경영이 정상화된 후 손정의가 한 일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 판매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빌 게이츠와 협상을 벌여서 가져온 판매권이 소프트뱅크가 일본에서 주목받는 회사가 되게 만들었다.
잠시 오장우는 손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장우도 소프트뱅크의 주식을 가진 주주다. 경영주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관심이 많았다.
“마사요시를 만나보니 어떻습니까?”
“키는 작지만 당찬 사람입니다. 능력이 뛰어나지만 고집도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같더군요.”
규태의 평가에 오장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사요시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려온 겁니다. 쉽게 마음을 바꿀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진한 커피까지 한잔 마시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창밖으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니고 제국호텔로 숙소를 정했습니까?”
제국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규태도 이전에는 한 번도 머물지 않은 곳이다.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나다닐 때 꼭 한번은 숙박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싸기만 하고 시설도 낡아서 전 별로입니다만.”
“하하하,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머문 다고 하면 눈빛이 달라집니다.”
슬며시 가까운 거리가 생각난 규태가 농을 했다.
“긴자가 가까워서가 아니고요?”
버블기 일본경제의 활황세를 틈타 번화가인 긴자엔 술집들이 밀려들었다. 대로를 지난 뒤편으로 밤이면 불야성을 이룬다.
“하하하, 저 결혼한 사람입니다.”
“거기가면 결혼한 사람이 80%는 넘을 걸요?”
놀리는 규태의 말에 오장우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오장우는 애처가로 이름 높은 사람이다.
“농담입니다. 거기로 가면 노르망디 요리를 잘하는 집이 있는데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
“노르망디 요리요?”
“프랑스 요리의 일종입니다. 주방장이 노르망디 출신이라 가정식이 나오는데 먹을 만 합니다.”
규태가 자주 가던 레스토랑이었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주방장이 세운지 오년 정도 된 가게다. 가게가 화려하지는 않아도 은근한 맛이 있는 매력적인 식당이다.
“도쿄는 처음 와보시는 곳일 텐데. 아주 자주 오는 사람처럼 말을 하시는군요.”
아마 수백 번은 왔을 겁니다.
이런 말이 입 밖으로 나왔지만 애써 누른 규태였다. 노르망디 특산인 시드르를 곁들인 저녁식사는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오장우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가격은······. 일본의 버블기 가격다웠다.
계산서를 본 오장우가 머리를 흔들었다. 한 끼 식사치고는 꽤 많은 금액이 나온 것이다.
“식사가 맛은 있지만 엄청나군요.”
“물가 비싼 일본 아닙니까. 이 정도는 감수를 해야지요. 이번 투자만 성공한다면 전혀 아깝지 않은 금액입니다.”
사실 오장우에게는 더 퍼주어도 된다. 기룡증권은 내년 3월 결산이 끝난 후 증자를 하기로 예정되어있다.
자본금을 300억으로 증자한 기룡증권 주식 5%와 오장우가 가진 소프트뱅크 5%의 주식을 교환하기로 미리 약속한 것이다.
화려한 긴자의 거리를 걷던 규태와 오장우는 가볍게 술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바에 들어갔다.
“여기에 이게 있네?”
솔을 고르던 규태가 탄성을 터트렸다. 1982년에 생산된 샤토 페트루스 Chateau Petrus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술입니까? 저는 와인은 잘 알지 못해서”
와인에 대해서는 까막눈에 가까운 오장우가 물었다.
“1982년 보르도의 기후가 퍼펙트 컨디션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보르도에서 만든 와인들은 하나같이 명품입니다. 가격도 비싸고요.”
“2만엔이면 비싸긴 비싸네요. 82년이면 생산한지도 얼마 되지 않는 포도주인데 말입니다.”
오장우가 포도주를 잘은 몰라도 오래된 게 좋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일본이 고급 프랑스 포도주의 세계 제일 소비국이란건 아십니까? 좋다고 하는 포도주는 쓸어 담아서 수입을 한다고 들었는데......”
이게 나중에 가면 한 병에 1억이 넘어가는 포도주다. 구하고 싶어도 쉽게 구할 수도 없고.
와인을 좋아해서 보르도의 샤토를 구입하기 까지 했던 규태다.
즐거운 마음으로 주문을 해서 맛을 보았다. 코로 향을 느끼고 입안에 넣어서 가볍게 굴린 다음 삼켰다.
전문 가게가 아니라 보관을 잘했는지 걱정을 했지만 특유의 풍부한 향과 맛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냥 잔을 잡고 벌컥 포도주를 마신 오장우였지만 규태의 와인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따라했다.
“나쁘지 않네요. 조금만 보관을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보관상태가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저는 그냥 그런데요. 차라리 소주에 삼겹살을 구어 먹는게 체질에 맞는 것 같습니다.”
“자주 마셔서 익숙해지면 이 맛도 괜찮다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병을 다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 규태와 오장우는 느긋하게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일과를 의논했다.
정해진 일정이 없기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규태를 손정의가 찾아왔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비즈니스 룸에 들어가자 곧바로 직구가 날아왔다.
“얼마의 지분을 원하십니까? 많은 지분은 드릴수가 없습니다.”
“15%는 어떻습니까? 십억 엔을 투자하겠습니다.”
비상장주식이니 가치를 따질 수는 없지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가격을 불렀다. 어젯밤 규태가 고민하여 정한 지분투자금액이다. 규태의 제안이라면 경영권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 금액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회사의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손정의도 물러섰다.
“......좋습니다.”
결단을 내렸으니 마음이 바뀌기 전에 곧바로 계약을 해야 했다. 달려온 변호사가 서류를 검토하고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 곧바로 사인을 했다.
손정의, 마사요시 손은 경계가 분명한 사람이다. 친한 사람과는 아낌없이 교분을 나누지만 선을 넘어가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늦은 점심을 함께하며 손정의는 규태에게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계약을 마쳤으니 말이지만 저도 제안하신 일은 고민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회사가 정리 되는대로 자금을 만들어 시애틀로 빌 게이츠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저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나이에 크게 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본도 보수적인 사회라 나이어린 사람이 사업을 하면 손해를 많이 본다. 거기에 자이니치라는 출신 때문에 손정의는 사업에 어려움을 많이 겪어야 했다.
“저는 한 번도 투자에 실패해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작년에 300만 엔이 안 되는 금액으로 주식을 투자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백억 엔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손사장님도 어려움을 딛고 자리를 잡을 거라 판단합니다. 이번 투자가 제 인생에 있어서 손꼽을 성공적인 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노무라증권으로 달려갔다.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일본에 송금하려면 노무라를 통해야 했다.
당시의 한국법률로 직접적인 해외투자는 불법이다. 투자를 한다고 해도 규태의 명의로 주식을 보유할 수 없다.
모든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 규태의 기분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