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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에 투자하다
잔뜩 신이 나서 기룡증권을 나오는 규태의 모습을 보며 황규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프트뱅크라니? 그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다. 그런데 그 회사에 투자하게 됐다고 저렇게 신바람을 낼 일이던가?
“소프트뱅크가 그렇게 대단한 회사입니까? 들어보니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적자회사 아닙니까?”
“소프트뱅크가 대단한 게 아니라 손정의란 사람이 대단한 겁니다.”
내 머리가 후퇴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 대머리를 놀리는 사람들에게 했다는 손정의의 말이다.
결정을 내리면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 저돌성, 야후와 알리바바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성공.
2000년 IT버블의 붕괴로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결국 이겨내고 세계적인 갑부로 우뚝 선사람. 규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손정의의 이미지다.
황규철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지만 규태는 신이 나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얼마나 투자할 수 있을까? 10%? 20%?
희희낙락하던 규태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수중에 돈, 그놈의 돈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은 전부 주식에 투자한 상태다. 주식을 팔면 간단한 문제지만 그러기엔 지금의 상승세가 너무 아깝다.
단기간에 3배의 수익을 볼 수 있는 투자를 진행 중인데 돈이 부족하다니.
은행의 대출을 생각하던 규태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놈들이 어떤 놈인데 구봉만이 나서지 않았다면 주식담보대출도 원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가가 아무리 올라도 추가대출을 요구하면 100% 거절당할 것이다. 당연히 시도는 해보겠지만 거절당할걸 대비해야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규태는 당장 구봉만에게 전화를 해 대출을 추가로 받을 것을 의논했다.
처음에는 구봉만도 난색을 표했지만 어디에서 받던지 상관없이 3개월의 단기자금을 빌려오면 된다는 말에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구봉만의 분투로 150억의 자금을 단자사에서 추가로 대출받았다. 연리 15%짜리 6개월 단기대출이었다.
“진짜 도적놈들, 담보도 확실한데 15%이자를 받다니.”
대출을 받아온 구봉만의 앞에서는 표를 내지 않았지만 규태 혼자남자 욕을 하며 투덜거렸다.
자금도 마련됐겠다. 이제 오장우의 전화만 기다리면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규태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주식매매의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찾아온 오장우가 손정의가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아니, 다 망해가는 회사에 투자한다는데 그걸 거절해요?”
“글쎄 말이야. 나도 이해를 못하겠는데 그쪽에서 투자를 받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나.”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돈까지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거절하다니!
오장우가 곤혹스런 얼굴로 제안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받아가게나. 투자한 금액만 받겠네.”
“아니, 아닙니다. 저도 오기가 생겼어요. 직접 보고 왜 투자를 거절했는지를 들어야겠어요.”
군 입대를 앞둔 병역미필자가 해외여행을 하는 것이 어려운 시절이지만 이리저리 손을 쓴 끝에 일본비자가 나왔다.
“보증인에 각서에, 반공교육에 뭐가 이렇게 할 게 많아.”
그냥 비행기타면 끝인 미래에 비하자면 복잡하기 이를 때가 없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일본입국비자도 노무라증권 서울사무소가 나서서 해결을 해주었다.
일본행을 준비하면서도 규태는 차근차근 일을 진행했다.
미성증권의 재무구조 개편작업과 새롭게 인수한 기룡증권의 여의도 이전. KF창투사에게 자금700억을 지원받았다.
창투사의 펀드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시세로 환산해서 현물로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오장우에게 지급한 20억에 추가로 증권사의 주식을 주주들에게 전부 인수하는데 사용한 금액이 10억.
황규철에게 맡겼더니 주식을 바닥까지 긁어왔다. 98%까지는 인수했지만 나머지 2%를 가진 주주는 행방을 찾지 못했다.
자본금도 증자를 통해 100억으로 확충했다. 급하게 닥치는 부채부터 하나 둘 해결하니 회사에 남은 현금이 33억이었다.
명동에 있는 회사를 여의도로 옮겨올 준비를 했다.
마침 근처에 매물로 나온 9층 건물이 있었다.
“위치도 좋고 한데 가격이 문제로군요. 120억이라니 회사형편상......”
지어진지 5년밖에 되지 않고 위치도 대로변에 있어서 은 증권사 본사로 쓰기에 좋은 건물이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기룡증권이 당장 부도가 날 것 같았던 위기가 지난지 얼마던가.
오장우는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자고일어나면 가격이 오른다고 하지 않나.
여의도 건물가격은 이때도 상승세였다.
“대출을 제외하면 60억이 듭니다. 크게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규태가 생각할 때 사두면 돈이 된다. 처음부터 쓸 만한 건물을 구해야지 나중에 회사인원이 늘어나 이전을 하려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
“지금 회사가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사기엔 너무 큰 부담입니다.”
“가지고 있는 주식을 내년 3월에 매각할겁니다. 우선 계약금 지급하고 나머지 잔금은 그때 지급하는 걸로 처리를 하면 됩니다. 가능하겠지요?”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중개사가 거래가 성사될 듯하자 반색을 했다.
“예, 협의를 해봐야 하겠지만 덩치가 커서 쉽게 매수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 가능합니다.”
“아이고, 불안하기는 한데 자꾸 이렇게 밀어붙이시니.”
대주주가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반대하던 오장우도 체념을 했다.
매도하는 건물주가 매매계약을 체결하면서 가지고 있으면 오른다고 아쉬워했지만 계약금을 20억을 지불했다.
건물을 샀다고 해도 빈 건물이 아니다. 당장 1층을 영업장으로 사용해야 했지만 기존 세입자와 의논을 해서 내보내야 한다.
이것도 적당히 이사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협의를 했다.
오장우는 회사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퇴직시켰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새로운 직장을 찾던 퇴직자들이 소식을 듣고 다시 모여 들었다.
심지어 다른 증권사로 옮겼던 이들도 찾아오는 것을 보곤 규태는 오장우의 인품을 알 것 같았다.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어느 한사람 오장우를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는 규태에겐 대리인으로 내세우기 십상인 인물이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감회가 새로운 지 새로운 회사건물에 입주한 오장우사장의 목소리가 잠겼다.
“아직은 어수선하지만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 사장실도 깔끔하게 꾸미도록 하지요.”
“아닙니다. 이젠 저도 월급쟁이 아닙니까.”
“월급쟁이라도 사장은 사장입니다. 제가 전문가를 불러서 인테리어 작업을 할 테니 다른 소리마세요.”
내부를 장식하지 않아서 책장하나와 책상하나, 의자가 고작이라 사장실이 황량했다.
직원들이 쓰는 공간도 마찬가지, 아직은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규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입주하려 했지만 직원들의 성화를 견디지 못했다. 서두르다보니 기존에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누가 보아도 낡았다.
“사실은 주식을 넘기고 나서 집사람하고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꽤 사정이 어려우셨던 모양입니다?”
“회사사정이 어렵다보니 집안의 재산을 모두 때려 박아서 생활비도 몇 달째 집에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주신 돈으로 개인 빚을 청산하고 나니 밤에 잠이 잘 오더군요. 정말이지......”
감정이 올라와 울컥한 오장우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규태는 시간이 흘러 감정을 추스린 오장우와 직원들에게 이사를 한 기념으로 저녁을 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직원들을 따로 보내고 둘이 조촐한 자리를 가졌다.
“도대체가 왜 투자를 받지 못한답니까?”
“전화통화라서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마사요시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의 투자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저녁술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한 오장우가 털어놓은 속사정이었다.
“허! 정말 손정의다운 말이네요.”
자연스럽게 규태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오장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마사요시를 개인적으로 아십니까? 마사요시는 일본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공부를 해서 한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본부장님은 마사요시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더군요.”
허를 찔린 규태다.
“하하, 어떻게 알게 됐는지 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말해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당연히 규태가 아는 미래의 손정의는 너무나 유명해서 수많은 전기가 나온다. 거기에서 읽었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적당히 둘러댔다.
다행스럽게도 오장우는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느닷없이 술자리에 끼어 든 곽병호사장 때문이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저는 이제 얼굴도 잊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바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곽병호사장님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술자리가 회사에 가깝지 않습니까. 섭섭합니다. 섭섭해요. 제가 술자리를 하자면 그렇게 피하시더니 오사장하고는 이렇게 저녁자리까지 함께 하시고.”
규태는 등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술자리에서 말실수를 할까봐 일부러 피해 다녔더니 곽병호가 삐진 것이다.
“제가 나이가 어리다보니 술자리를 조심합니다. 보십시오. 지금 저 소주 한잔 마셨습니다.”
가족이나 선후배들처럼 실수를 해도 문제가 없는 이들과 술자리를 할 때만 마음을 놓을 뿐 거래상대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일거리를 잔뜩 던져주고는 얼굴도 비치지 않고 또 저를 빼고 일본에 가신다면서요?”
“그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규태가 일본으로 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 이래봬도 일본통입니다. 제가 어디에서 대학을 나온 지 아시지 않습니까? 노무라증권에 아는 사람이 널렸습니다.”
회사에서 이야기가 샜나 했더니 노무라증권 서울 사무소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일본은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이 있어서 가는 겁니다. 곽사장님은 바쁘시지 않습니까? 지점확장준비도 해야 하고 신입사원 교육도 마무리 지어야하고요.”
“제가 합니까? 다 밑에 직원들이 합니다. 저도 일본에 같이 가겠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곽병호의 모습에 규태는 이마를 짚었다.
소프트뱅크에 투자하러가는 것은 외부에 절대비밀이다. 일시적으로 미성증권의 대주주가 되었지만 증시에 상장하면 빠져나올 관계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이익을 취하면 그뿐이다.
“안됩니다. 이건 개인적인 투자문제라 비밀을 유지해야합니다.”
잔에 소주를 채운 곽병호가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지금부터 할 말이 진짜 규태의 행방을 수소문해서 찾아온 진짜 목적이었다.
“크윽, 쓰다. 김본부장, 상장하면 가지고 있는 미성주식 전부 엑싯할겁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창투사지분은 빼야겠지만 개인적으로 투자한 자금은 가지고 있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인맥. 김본부장, 그게 필요한 거 아닙니까?”
연이어 술잔을 비운 곽병호가 말을 이었다.
“김본부장 능력은 뛰어나지만 나이가 어려서 아직 제대로 인맥이란 게 없지요.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그런 부분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내가 나이는 많이 먹지 않았어도 대한민국에서 인맥하면 곽병호입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오장우가 끼어 들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병호형님이 워낙 노는 것을 좋아하셔서. 정치인, 기자, 재벌까지 친분이 많은 분입니다.”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왜요?”
“내 감이 김본부장을 꽉 잡으라고 말하더군요. 잡고 있으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내가 이런 감이 또 아주 좋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