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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에 투자하다.
“하아 그놈의 장영자 때문에 손해 본걸 생각하면......”
“어쩌겠습니까. 힘이 없는 게 죄지.”
장영자사건은 중정차장을 지낸 이철희와 장영자가 합작해서 낸 사건으로 자금사정이 어려운 건설사에 접근해서 자금을 지원하고 이 금액의 아홉 배에 해당하는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다른 건설사에 접근 똑같은 수법으로 금액을 불려나갔다.
82년에 건네진 어음총액이 7,111억이고 할인금액만 6,444억이다. 명동바닥에서 이 사건에 엮이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고 미성증권을 창업한 그들의 부친 역시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건강을 잃고 별장에 머물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웃기는 건 사건의 배경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대통령의 처가이다 보니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장영자와 이철희만 교도소로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어째 회사의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둘째 형님 뜻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 형제의 둘째 곽중호는 뉴욕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몇 차례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지만 오히려 회사의 자본금을 증자하고 회사경영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끄응, 그놈 말을 들으려면 집안의 자금을 다 털어 넣어야 했는데 굳이 그런 모험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하고 보니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회사가 번듯해 졌습니다.”
곽병호도 곽민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장이 그럴 줄은 몰랐어.”
“회사채를 매입하고 매도할 때 장난질을 쳤을 줄은 몰랐죠.”
“해먹어도 적당히 해먹었어야지, 숨어서 처먹었을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부친의 심복이던 장영길이 상품부장으로 있으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금액만 12억이다. 어쩐지 채권평가를 전산화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더니.
채권전문가가 많지 않다보니 회사에 발행조건이 제각각인 국공채와 회사채, 지방채에 대한 가격을 제대로 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채권 매입가격을 올리고 뒷돈을 받는 수법을 십여 년이 넘게 사용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일.
처음에는 교도소에 보내야 한다고 펄펄뛰었지만 부친의 뜻에 따라 조용히 덮었다.
“장우형님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오장우는 곽병호와 친분이 있는 기룡증권사의 사장이다.
“무슨 일 있냐?”
“저한테 전화 걸어서 꼬치꼬치 묻던데요. 아무래도 궁금한 게 많은 모양입니다.”
“그 집안도 장영자한테 호되게 당해서 손해가 엄청났을 테니.”
“아예 기둥뿌리가 뽑혔습니다.”
기룡증권은 기존에 있던 지점들마저 철수해버리고 본점하나만 건사하는 말 그대로 회사이름만 남은 형편이었다.
오장우가 회사를 물려받아 회사를 회생시켜 보려했지만 적자규모가 엄청나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처지다. 처음에는 의욕에 차서 회사를 살려보려 뛰어다니던 오장우도 포기했는지 술에 빠져 산다는 소문만 들었다.
“김본부장이 자금여유가 있는지 모르겠네.”
“여유가 넘칩니다. 창투사에서 굴리는 자금이 엄청나던데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럼 한번 연결을 해봐라. 후배지만 실력이 아까운 사람이야.”
오장우는 부친의 성화만 없었다면 일본의 노무라 증권사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 뛰어난 능력자였다.
하필 부친의 뜻에 따라 귀국한 다음해에 장영자사건이 터지면서 타격을 받은 것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처음 곽민호가 기룡증권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규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기룡증권은 부실이 너무 커서 자본금을 잠식한 상태.
자금을 투자해서 회생시킬 메리트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장인 오장우의 경력을 듣는 순간 이전에 많이 들었던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데이비드 오, 규태가 떠오르기 전부터 2000년경 미국 월가에서 엄청난 자금력을 자랑하던 사모펀드 에스턴의 수석펀드매니저의 한국이름이 오장우다. 당연히 규태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한국계였지만 그다지 한국에 미련이 크지 않아서 교류는 많지 않았지만 유능한 투자자였다.
이렇게 인재를 줍는 건가?
규태는 스스로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황규철과 함께 명동으로 달려갔다.
기룡증권의 본사는 명동성당 맞은편의 구석에 위치했다. 3층 건물의 2층에 있는 증권사는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외진 곳. 한눈에 보기에도 망해가는 회사란 게 딱 표시가 났다.
초췌한 얼굴을 한 오장우사장이 규태를 맞았다. 규태의 기억 속, 중후한 노년의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모습이지만 힘이 빠져 처량해 보였다.
가볍게 인사를 한 규태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회사를 파시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매도할 의사는 있으십니까?”
빈집에 소 들어온다고 오장우가 간절히 바라던 일이다.
“가능하면 넘기고 싶습니다.”
이미 투자를 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왔기에 규태의 답변은 명쾌했다.
“제가 인수하도록 하죠.”
기룡증권은 본사영업부까지 합쳐도 직원의 수가 20이 되지 않는 초소형증권이다. 자본금도 전액 잠식상태. 다음 달 돌아올 자금을 결제하지 못하면 파산이다.
적자만 200억이 넘는 회사를 인수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규태가 나서자 내심 포기하고 있던 오장우도 한결 기운이 나는 모양이다.
“인수 가격은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거의 망한 회사라 공짜로 넘겨도 받을까 말까 망설이겠지만 나중에 포브스지 100대 부자에 들어가는 뛰어난 투자가를 영입하는 판이다. 오장우는 소프트뱅크의 설립자인 손정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스카우트 비용으로 쓴다고 생각하고 규태가 크게 질렀다.
“사장님 지분이 기룡증권 전체주식의 70%라고 들었습니다. 지분전체를 20억에 인수하도록 하죠.”
기룡증권의 기업평가를 하면 당연히 마이너스가 나올 것이다. 너무 후한 인수가격이라 오장우가 선 듯 믿어지지 않는단 표정을 했다.
“정말이십니까? 혹시 장기 어음이나......”
회사를 비싸게 인수한다고 수작을 부리면서 뒤로 딴 짓을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장영자사건이 그렇게 일어난 게 아니던가. 이미 한번 호되게 당했기에 섣불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는 오장우다.
규태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를 어떻게 보시고 당연히 현금인수입니다. 계약서에 도장 찍는 즉시 현금을 입금하겠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있습니다. 사장님께서 계속 회사 경영을 맡아 주시는 겁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다만’ 이란 소리가 나오자 바싹 긴장했던 오장우가 마음을 놓았다. 빚더미 회사를 사주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자신의 자리까지 그대로 두겠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바싹 시든 화초처럼 생기를 잃었던 오장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오장우에게 규태가 단언했다.
“저는 오사장님이 아직 때를 못 만난 용이라고 봅니다. 어려운 고비만 넘기고 나면 앞으로 세계에서 이름난 투자자로 우뚝 서시게 될 겁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세상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하지 못했지만 장영자 사건의 여파는 결국 회사를 풍지박살 내버렸다. 회사에 끌어들일 수 있는 자금은 모두 끌어들인 상황. 최악의 경우에는 집까지 경매로 넘어가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었다. 모진 게 목숨이라고 죽지 못해서 억지로 숨만 쉬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구세주가 나타나다니!
제대로 말을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가빠진 호흡만 고르는 오장우였다.
오장우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규태가 물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씨를 아십니까?”
“손정의라면? 아! 마사요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압니다. 김사장님이 어떻게 손 마사요시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마사요시는 저와 나이 차이가 조금 나지만 대학교 후배입니다. 81년에 일본으로 돌아가 회사를 세울 때 제가 투자를 일부 했습니다. 요즘 마사요시가 건강이 좋지 못해서 지금 회사가 망하기 일보직전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 회사만 멀쩡하게 잘 돌아 갔으면 제가 이렇게 구석까지 몰릴 일은 없었을 텐데.”
오장우가 한탄을 했다. 처음 손정의가 일본에 소프트뱅크를 차렸을 때는 사업이 엄청나게 잘나갔다. 그때 지분을 정리했으면 이렇게까지 오장우가 벼랑 끝까지 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손사장의 건강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거의 죽다가 살아난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의사가 시한부 판정을 내려서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답니다. 다행히도 치료 경과가 좋아서 회복을 하기는 했다는데 정확하게는 모르죠, 저도 사정이 너무 좋지 못해서 요즘에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규태는 무릎을 쳤다. 손정의가 소프트뱅크를 81년에 세우고 86년까지 건강이 좋지 못해서 회사사정이 엉망이었다. 소프트뱅크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86년 이후, 지금의 소프트 뱅크는 10억 엔의 빚을 진 적자회사다.
오장우는 이미 망한 회사라고 생각해서 머릿속에서 지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프트뱅크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90년대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다.
규태가 은근하게 물었다.
“오사장님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프트뱅크 지분이 전부 얼마나 됩니까?”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1억 엔을 투자하고 8%를 받았습니다.”
8%라? 규태는 속으로 가만히 계산을 해보았다. 94년에 소프트뱅크가 일본증시에 상장하면서 손정의가 개인적으로 번 돈이 1조 엔이다.
95년에는 야후에 100억 엔을 투자, 지분 36%를 매입하여 상장 후에 큰돈을 벌고 2,000년에는 알리바바에 2천만 달러를 투자해서 지분을 매입한다. 이게 나중에 1,50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차익을 거두는 투자가 된다.
소프트뱅크의 주식 8%라면 2020년에는 최소한 14조가 넘는 금액이 되는 것이다. 순간 규태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오장우는 아직 소프트뱅크의 주식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설득해서 8%의 주식을 넘겨받을까를 고민하던 규태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Don’t be evil(사악해지지 말자). 유명한 IT기업 구글의 사훈이었다. 그 말처럼 앞으로 규태가 돈벌 수 있는 일들이 널려있다. 마음을 다잡으며 규태가 물었다.
“제가 소프트뱅크에 투자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손정의 씨가 건강을 되찾았으면 회사업무에 복귀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소프트뱅크도 정상화가 멀지 않아 보이네요.”
“복귀야 하겠지만 회사가 10억 엔이 넘는 적자를 보고 거의 파산상태라고 하더군요.”
“손정의씨가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 회사가 회생하는 건 금방이겠지요. 투자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규태가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계속 표시하자 가만히 턱을 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던 오장우가 말했다.
“법률상으로 해외투자가 불가능해서 저도 손사장에게 투자를 할 때에 전 직장 동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손사장도 지금은 힘든 처지이니 투자를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얼마나 투자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소프트 뱅크의 투자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자 규태가 흥분했다.
“그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으로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제 꼴이 이렇고 손사장도 병원치료를 받는 처지라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지만 손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소프트뱅크 지분도 사갈실 생각이 있으면 이번기회에 팔겠습니다.”
이미 버린 돈으로 생각했던 소프트뱅크 투자지분이 살아날 생각에 오장우가 팔겠다고 나왔지만 규태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거 가지고 있으시면 나중에 엄청나게 큰돈이 될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손사장이 범상한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일부분이라면 제가 인수를 하겠습니다.”
순간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으며 규태가 오장우에게 재차 신신당부를 했다.
“그거 절대로 파시면 안 됩니다. 가지고 있으면 돈이 돼요, 돈이.”
“마사요시가 능력이 있기는 있는 사람이지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