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23화 (2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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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장 증권사에 투자하다.

서울 숙소로 예약한 남산 힐튼호텔은 규태에게 익숙했다. 늦가을 풍광이 물씬 느껴지는 남산을 보며 규태는 짐을 풀었다.

젊은 시절에는 남산 힐튼의 클럽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었다. 나이를 먹어 미국에 살 때는 한국을 방문할 때는 주로 강남에 머물렀다.

예약한 호텔의 비즈니스 센터에 황규철실장과 성인호과장과 박태환 과장이 규태와 함께 회의를 했다.

다들 호텔의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하는 게 낯선 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호텔 앞을 지나가기는 많이 했지만 안으로 들어와 보는 건 처음입니다. 시설이 아주 끝내줍니다.”

성과장이 감탄을 했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요. 호텔은 호텔이죠.”

“여러 가지 시설들이 많던데요.”

“귀찮아서 잘 이용안합니다.”

호텔생활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다. 남산 힐튼이 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호텔이지만 21세기엔 보다 화려한 호텔이 많아진다.

세계에서 이름난 호텔치고 규태가 묵어보지 않은 곳이 없다. 높은 명성을 가진 투자자들이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건 시장을 정확하게 판단해야하는 엄청난 스트레스도 스트레스지만 시도 때도 없이 세계를 떠도는 불규칙한 생활도 한몫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기 힘든 것이다. 오마하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 않는 버핏같은 특이한 사람도 있지만.

“구입하신 현대아파트의 인테리어 공사가 보름 후에 마무리됩니다.”

서울에서 처리할 일이 많아지며 규태는 먼저 집을 샀다. 82년 7,600만원에 분양한 압구정 현대아파트58평은 4억 언저리까지 올랐다. 앞으로도 아파트 가격은 계속 올라갈 것이기에 나쁜 투자는 아니다.

“미성증권 곽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과장이 규태에게 거래상대인 곽병호의 인적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건넸다. ”올해 38입니다. 부친에게 회사를 물려받은 지 2년 된 젊은 사장입니다. 학교는 일본 게이오대학을 나왔습니다. 젊어서인지 확장 욕심이 크다고 합니다. “

규태와 곽사장의 미팅을 위해 황규철은 철저하게 준비했다. 박태환 과장이 준비한 서류를 보며 말했다.

“최근에 회사직원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증권사 내부적으로 창투사의 자금을 받아서 상장 준비를 하는 것에 기대가 크다고 합니다. 상장증권사 주가가 크게 오르는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도 느끼고 있어서 상장 후에 이득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제시한 주식 매입가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욕심을 내서 올려 부를 것 같습니다.”

“대우증권이 지금 12,000원입니다. 크게는 욕심을 내진 못하겠죠.”

규태는 앞에 놓인 서류에서 지분구조를 살폈다.

“곽사장이 75%를 가지고 있다면 나머지 25%는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예전 곽사장의 부친이 회사를 설립할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명동 사채업자들이지요. 다섯이 15%의 지분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소액주주들입니다.”

“그들과 접촉을 해보세요. 비상장주식을 액면가 이상으로 매입하겠다면 팔려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주주명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해성증권은요?”

“그쪽은 조금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당장 미성증권의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해서 자세하게 조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나쁜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

“급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정안되면 미성증권하나의 상장으로 끝내면 된다. 외부에 비상장사에 투자를 하고 증시에 상장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면 그뿐이다.

사실 손익으로 따지자면 그냥 상장 증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도 작은 이익이 아니다.

89년까지 주식시장은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89년 이후 92년까지 침체장세가 이어지지만 그사이에 저퍼주나 자산주와 같은 미래의 성장주식을 선취매하면 된다.

창투펀드의 운영규정이 점차 까다로워지면서 상장주식의 투자를 제한하게 될 테지만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

협상은 보통 길게 이어진다. 미리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점심을 가볍게 먹고 저녁시간까지 세부적인 사정을 준비하느라 회의가 이어졌다.

습관처럼 일찍 일어나 가벼운 산책을 하고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방안에서 커피한잔과 함께 서류를 보다 습관처럼 TV를 틀었다.

규태는 TV에서 나오는 낯익은 영화를 발견하고는 잠시 회한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나쁜 피Mauvais sang였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의 작품이자 그녀의 이름을 알린 명작이었다.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이 되지 않은 영화지만 영어로 더빙이 되어서 TV에 나오는 영화를 규태는 홀린 듯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영화의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와는 자선파티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었다. 연극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잘 그려서 전시회도 했고 무용도 배워서 순회공연도 했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하고 이야기가 통하는 동갑친구였다. 자주 만나다 보니 규태와 스캔들이 나기도 했지만 순수하게 이야기가 통하는 여자사람친구였던 줄리엣의 젊은 모습을 보며 규태는 알 수 없는 감회에 젖어들었다.

얼굴에 주름이 없는 줄리엣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솔직히 영화는 프랑스 영화답게 재미없었다.

“역시 명동에서는 이게 최고지요.”

“자주 오면 그 맛이 그 맛인데 다른 곳에 가서는 칼국수를 못 먹겠어요.”

명동사무실에 들리기 전에 만두집에 들려서 칼국수로 점심을 했다. 가게 2층에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없다.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성장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시끄러웠지만 경제는 유래 없는 성장을 거듭했다.

가볍게 황실장과 환담을 하는 규태의 귓가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절 인접한 명동성당은 데모하는 이들이 즐겨 모여드는 장소였다.

“또 시작인가 보네요.”

“자주 저럽니까?”

“매일 데모하는 학생들로 시끄럽다 보면 됩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지만 가서 데모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죠.”

황규철이 규태를 보았다.

“왜 그런 시선으로 날 봅니까?”

“본부장님은 다른 학생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오형도 그렇지만 행동하시는 것도 그렇고. “

80년대의 대학생은 덥수룩한 머리와 청바지, 체크무늬셔츠에 잠바하나를 걸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규태는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 터틀넥에 캐주얼슈트를 즐겨 입었다.

“황실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누가 보면 뉴욕 월가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정장을 차려입은 황규철은 누가보아도 경찰출신이란 표시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금융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처럼 세련된 모습이다.

“몸에 돈을 바르면 됩니다.”

“다 제 돈이로군요.”

필요한 경비지원을 아끼지 않는 규태다. 정보를 얻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하다못해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 했다.

뒷돈이 들어가는 것은 부지기수.

서울사무실에서 성인호 과장과 박태환 과장, 김태오 대리가 상주근무를 했다. 황규철이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업무를 봤다.

사무실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무거웠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경찰 쪽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정치 쪽은 계속 시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중정 쪽도 심상치 않습니다. 자칫 데모가 커지면 계엄령이 내려질지 모릅니다.”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답게 흘러가는 정국에 대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요즘 제일의 화두는 정국불안이다. 해결방안이랍시고 계엄령이 떨어지면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 주식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계엄령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규태가 대관업무를 전담하는 황규철에게 물었다.

“상장에 관련된 일들은 문제가 없겠지요?”

“증권 감독원에서는 미성증권의 재무구조가 안정된다면 주식 상장을 반기면 반겼지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내년 3월 결산 마치고 상장 예비심사를 신청하면 곧바로 허가가 떨어질 겁니다.”

“회계사무소도 계약을 마쳤습니다. 변호사사무실에서는 큰 법률적인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정부에 의해 기업의 경영권이 보호를 받고 있어서 이번 일과 같은 업무는 변호사들로서도 생소한 분야다. 약속시간이 되자 변호사가 도착했다.

“김광진입니다.”

“김 변호사님이 이번 계약의 법률조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황규철이 규태에게 변호사를 소개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규태입니다. “

“저희 쪽에서 부탁드릴 일이지요. 처음 하는 일이라서 긴장도 되고 공부도 되고 그렇습니다.”

김광진이 쾌활하게 웃었다.

“김 변호사님은 미국에서 기업인수합병에 대한 공부를 하고 오신 분입니다.”

“든든합니다. 앞으로 일을 같이 할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김광진은 미리 꾸며온 서류를 보며 하나하나 세부적인 사항을 체크했다.

황규철이 이끄는 협상단이 미성증권 본사로 향했지만 함께 협상에 참여하려던 규태는 급하게 온 연락을 받고는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친구 곽문태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서둘러 달려간 규태는 의식을 되찾고 누워있는 문태를 보며 안심했다.

“죽지는 않을 모양이다. 얼굴이 생생하네.”

“빌어먹을 놈,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

“얼굴 본지 얼마나 됐다고 젊은 놈이 힘없이 쓰러지냐!”

“그러게 말이다. 나도 어이가 없다. “

파리한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문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부가 힘드냐? 얼굴이 아주 반쪽이네.”

“의학공부가 쉬울 리 있겠냐? 열심히 해야 돌팔이를 면하지.”

문태의 병은 과도하게 축적된 피로로 인한 것이다. 집안의 도움이 없는 문태는 의대공부를 하면서 과외를 세 개나 했다.

규태는 재정적으로 문태를 지원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친구다.

“과외는 때려치우고 학교공부만 하는 게 어떠냐?”

“너 회사 차릴 정도로 돈 잘 번다고 소문났다지만 한두 푼이 아닌데 네가 나를 지원한다고?”

구체적으로 규태가 벌어들인 금액을 모르는 문태로서는 당연한 소리다.

“너 하나 정도 지원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정색을 한 문태가 물었다.

“얼마나 지원해줄 수 있냐?”

“네가 필요한 만큼.”

“많이 벌기는 했나 보구나. “

자존심 강한 문태가 친구 규태의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은 건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다.

병실에서 하염없이 통곡하시는 어머님을 보고는 마음이 약해졌다.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대학에 다니는 형까지, 사실상 문태가 집안의 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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