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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는 좋은 일이
이걸 죽일 수 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규태는 마음을 다스렸다. 어떻게 살건 자신의 선택이지만 최소한 가족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너 명절 끝나고 보자.”
“어디 그러시던가.”
막내 태진이 녀석이 규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비리비리한 형쯤은 문제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한참 자랄 때인지 덩치가 커져서 규태를 압도할 정도로 키가 컸다. 뼈가 굵고 통뼈라서 누구와 힘으로 밀리지 않는다.
또래에서 주먹질 좀 한다고 자부하는 모양이니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생각이었다.
이전 생에서 규태의 경호실장이 스페츠나츠 출신이다. 마약 카르텔과 피가 튀는 싸움의 와중에 몸을 숨겨야 할 때마다 그에게 호신술을 배웠다.
그때 시간도 남고 억지로라도 배운 덕분에 수차례 고비를 넘겼었다.
죽고 죽이는, 피 튀는 전장을 겪은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는 살기를 품는다. 동생을 노려보는 규태의 눈에 저절로 살기가 돌았다.
“김태진,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라!”
사나운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규태의 목소리에 동생들이 바싹 얼어붙었다.
규태는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 큰놈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뭐하는 짓인지.
눈치를 보는 동생들을 성묘를 가기위해 빌려둔 봉고차에 태워서 대청댐으로 향했다. 어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촌형제들만 가는 여행에 다들 마음이 풀어졌다.
차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형제들을 보는 규태의 마음이 저절로 푸근해졌다.
짧은 여행의 마지막, 규태는 카드를 가진 자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여동생들을 시내 백화점에 풀어놓았다. 뒤를 따라다니는 바보짓은 당연히 하지 않고 힘 좋은 남동생들을 함께 보냈다.
여자들이 함께 모여서 차례음식을 준비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남자어른들은 술상을 폈다.
걸리적거린다며 쫒겨난 아이들은 규태의 방에 모여서 윷놀이를 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추석모습이었다.
추석날 차례상에 제사를 지내고 산소에 성묘까지 마쳤다. 작은 집 식구들은 차가 막히기 전에 서둘러 떠났다.
추석날 저녁은 으레 고등학교동창 가운데 따로 모임을 갖는 여섯 친구들과 반 년 만에 얼굴을 보는 시간이었다. 친구들은 다니는 대학도 제각각이고 생각도, 입장도 달랐다.
공군사관학교에 다니는 친구, 경찰대를 다니는 친구 Vs 데모를 하는 친구 Vs 평소에는 시국에 하나의 관심도 없이 대학을 다니는 친구까지.
제복을 입은 친구들이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해, 명절 저녁에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혼자 사는 근석의 집에 모였다. 근석의 위로 두형들은 장가를 가서 분가했고 어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시면서 집이 빈 것이다.
친구들 모임에서 금지어는 정국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다. 저마다 생각이 너무 달라서 자칫하면 친구들 간에 싸움판이 벌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대학 1학년시절, 친구들과 서로 정치이야기를 하고 대판 싸운 다음부터 지켜온 금기다.
동창들 가운데 중간에 군대를 간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공군 사관학교와 경찰대학, 의대를 다니는 친구 셋을 제외한 나머지 3명도 입대를 하지 않았다.
“너 군대만 와봐라, 박박 굴려 줄 테니.”
“전문의 따고 군대 갈 때 공군갈 일은 없네요. 간다고 해도 장교로 갈 텐데 네 밑에서 구르겠냐? 너나 비행기 사고치지 마라. 대한민국 공군 좋아졌다. 너 같은 놈을 파일럿이라고 비행기 태워주고. 나중에 나한테 오면 아프게 치료해주마.”
공사 졸업반인 정근석과 의대 본과생인 곽문태가 시답잖은 말싸움을 주고받았다.
크게 할 말도 없고 주제도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게 없으니 편한 사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지만 이때는 그랬다.
“자식들 이런 거 처음 봤지? 이 형님을 찬양해라!”
“이게 뭐냐?”
“말로만 듣던 양주 아냐! “
친구들이 규태가 차에 꺼낸 양주를 보고는 침을 질질 흘렸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라 마셔본 양주는 캡틴 큐나 나폴레옹 같은 조악한 품질이 고작이다. 규태가 말로만 듣던 조니워커를 들고 오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양주수입이 금지 되던 시절이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술이었다. 흘러나오는 양주들은 용산기지같은 미군 PX를 통해 나오는 물량이 전부다.
얼음과 함께 온더락으로 마시는 규태와 달리 술에 용감한 근석은 스트레이트로 그냥 마셨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위에 구멍이 나서 제대한 친구답게 환장을 했다. 친구들은 집안에 잔이 모자라 커피 잔에 부어 마셨다.
세병이면 넉넉할 거라 여겼지만 물처럼 마셔대는 친구들을 보니 부족할 것 같았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르자 입이 가벼워졌다.
“회사 차렸다면서? 잘 되냐?”
취직걱정이나 해야 할 판에 규태가 뜬금없이 회사를 차렸다는 소식은 친구들에게도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그럭저럭. 차린 지 석 달밖에 안되지만 자리는 잡았다.”
자랑질을 하고 싶어 규태의 입이 근질거렸지만 졸업도 하지 않은 대학생들에게 자랑질을 해봐야 어디에 쓰겠는가.
“그게 뭐하는 회산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대충 회사랍시고 만들어서 사기 치는 건 아니지?”
“아! 무식한 놈들 창투사란 게 말이지 비상장회사에 투자를 해서 상장회사로 만들고 엑싯을 하는 회사란 말이다. 미국에선 벤처캐피탈이 제법 자리를 잡았지만 한국에서는 이제 시작이야.”
“자본금도 많이 들지 않냐? “
“여기저기서 모아서 투자를 했지.”
“잘되면 좋겠다.”
친구들은 진심으로 걱정을 했다.
“회사 차렸다면서 여자 친구는 없냐?”
바쁘게 살다보니 여력이 없었다. 가뜩이나 눈이 높은 규태다. 사고 쳐서 자유로운 인생의 무덤과 같은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아직 여자는 관심 없다.”
“오오! 그 거짓말 진짜냐? 작년까지만 해도 어디 쓸 만한 여자 없냐고 난리치던 놈이.”
“그동안 내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
시니컬한 규태의 답변에 친구들의 질문공세가 수그려 들었다.
처음 맛보는 양주에 취해 다들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석하야 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군대 갈 생각 없냐?”
친구들의 모임이 있으면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서울대 공대에 들어간 석하는 추석이 끝나고 시작된 건국대 사태에 참여해서 구속되어 2년을 청송교도소에서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제적되었던 대학에 복학해서 졸업을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이후에도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다.
“아직 할일이 많다.”
당연히 석하에겐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던 젊은 날의 친구는 자신의 뜻과 이상을 위해 끝을 모르고 달려갔다.
규태가 한참을 설득했지만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공사생 근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할일이 많기는! 나한테 총만 준다면 내 데모하는 놈들 싹 쓸어버릴 거다.”
“야! 야! 취했냐!”
“쓸긴 뭘 쓸어! 네가 빗자루야?”
시큰둥한 석하의 말에 분위기가 격앙되었다. 규태가 서둘러 근석의 입을 막았다. 다른 친구들도 석하를 막아서서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분위기를 바꾸려 규태가 석하의 애인을 입에 담았다.
“이현이하고 지금도 잘 지낸다면서.”
석하는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있었다. 서이현은 석하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곧바로 둘이 결혼한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여자를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놈이 만나려면 부지런하지 않으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 자식 완전 주말부부야. 금요일 저녁만 되면 역으로 달려간다니까?”
같은 대학 의대를 다니는 곽문태가 혀를 찼다. 서로 과는 달라도 대학 인근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서 가끔 만나 술 한 잔을 하는 사이다.
“기운이 넘치는 모양이다.”
“어려서 그래, 아직 어려서.”
늦게 학교에 입학해서 친구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경찰대 졸업반 규식의 발언에 친구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 그래 너는 늙어서 좋겠다. 할배야.”
“참! 어린놈들이랑 놀래니, 정신연령이 맞질 않는구먼.”
규식의 너스레에 친구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미혜가 네 이야기 한다던데? 연락 해봤냐?”
규태는 서이현의 친구 오미혜를 소개팅으로 만나 적이 있었다. 두 번 정도 만났지만 그다지 끌리지가 않아서 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멀어졌다.
“그다지, 내 타입이 아니야.”
“이놈 취향은 확고하잖아. 몸매는 글래머 하면서도 얼굴은 베이비페이스. 이놈 평생 결혼 못한다에 한 표.”
장난스런 근석의 말에 문태가 끼어들었다.
“나도 한 표.”
“이 자식들이 누굴 뭐로 보고! 근석이하고 문태 네 녀석들 보다는 빨리 갈 거다.”
4학년이 되면서 서로 일이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지만 대학교 1,2학년 때는 주변의 여자들을 서로 소개팅을 시켜주곤 했었다. 그래서 서로의 이상형에 대해서 친구들도 자르르 꿰고 있었다.
규태가 목소리를 높여 친구들을 타박했다. 조용한 성격처럼 묵묵히 친구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오태민이 끼어들었다.
“결혼하면 좋은 게 있나? 나는 빨리 결혼할 생각이거든.”
시력 때문에 면제 판정을 받은 태민이다.
“너야 군대도 면제고 졸업하면 취직 할 테니까 빨리 해도 되겠지.”
“난 천천히 할 거다. 공부하느라 못해본 거 다 해보고 결혼해야지.”
지금도 고등학생처럼 공부만 해야 하는 의대생 문태의 말에 다들 실소했다.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조성래도 한의대생.
친구들 가운데 제일 빠르게 결혼을 한 사람이 누군지 생각하던 규태가 이마를 찌푸렸다.
제일 빠른 결혼을 한 사람은 규태였다.
규태의 첫 번째 아내였던 성진경은 규태의 이상형에 가까왔다.
군대를 마치고 곧바로 취직을 해 회사의 거래처에서 만난 진경에게 곧바로 대쉬한 규태는 결혼에 골인했고 큰딸 마리도 낳았다.
문제는 뉴욕으로 파견근무를 하면서였다. 일에 미쳐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향수병에 걸린 진경이 이혼을 선언했다.
그때의 규태는 성공에 미쳐서 일에 모든 것을 바칠 때였다.
전처 진경이 재혼하면서 딸을 데려오려 했지만 마리는 아빠와 함께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재혼한 진경을 따라갔다. 그 이후로 규태는 큰딸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마리는 아빠인 규태를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마리가 나이가 먹어서 결혼을 할 때도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규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큰딸 마리를 돌봐준 사람은 막냇동생인 태진이었다.
씁쓸한 과거를 떠올린 규태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이 깊었다. 늦은 시간, 술자리가 파장분위기가 되자 잠자리를 준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규태는 슬쩍 곽문태의 옆구리를 찔렀다.
“담배나 한 대 피자.”
할 말이 있다는 신호에 곽문태가 따라 나왔다.
아파트 앞 놀이터에 앉아서 규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석하 녀석 심각하지?”
“말려도 듣질 않는다. 내말은 씨알도 안 먹혀, 나하고 술 안마신지도 벌써 2달이다. 데모하는 패거리들하고만 어울리는 것 같더라.”
“말려도 듣지 않겠지?”
“그 녀석 고집이 보통이냐, 아버지가 통사정을 했는데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니. 오죽했으면 석하동생은 공부를 잘했는데 아예 교대로 보내셨어. 처음 석하가 대학 들어갈 때는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나도 포기했다.”
부모말도 듣질 않으니 친구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 담배를 피면서도 입맛이 썼다. 생각 같으면 사람이라도 시켜서 강제로 감금을 해버릴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친구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피우고 안에 들어가서 속 편하게 잠자는 석하의 모습을 보곤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고 넘어갔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아 뒤척였다.
다음날 잠에서 깬 규태는 이른 새벽 떠난 석하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즐겁게 시작한 명절의 마지막은 우중충하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