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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투사 설립준비
현민과 여자친구 조애리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규태의 얼굴보기가 민망한지 쭈뼛거리는 현민을 보자 속에 담긴 화가 가라앉았다. 그 옆에선 조애리까지, 둘이 나란히 선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회의실에 앉은 둘을 보며 규태가 냉장고에서 아껴먹는 케이크를 꺼냈다.
“음흉한 놈.”
규태가 현민을 타박했다. 큰 사고를 쳤으니 말문이 막힌 현민이 천장을 보며 멀뚱거렸다.
“이 바보가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보다 못한 정애리가 현민의 옆구리를 때렸다. 옆에서 보던 규태가 움찔 놀랄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좋은 타격이다.
눈물이 그렁거리며 현민이 옆구리를 부여잡는 모습을 왠지 낯설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제수씨가 너 때리는 모양이 보통이 아니다?”
“애리네 집이 도장을 해요. 아버지한테 어릴 때부터 배웠죠.”
‘이 녀석 매 맞는 남편이냐?’
만나면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으려던 규태였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어쩐지 말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서먹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정말 감사해요. 저도 걱정이 많았어요. 집에 말하면 맞아 죽을 것 같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어서 현민이 에게 화를 많이 냈는데. 이렇게 사고를 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도와주신다고 하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몰라요.”
머리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하는 애리의 모습이 선 머슴애 같아서 애잔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22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피 끓는 청춘에게 자동차라는 날개까지 달아줬으니, 역대 급으로 매서웠던 강추위도 젊음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애리씨, 부모님께는 말씀 드렸냐?”
규태의 말에 현민과 애리가 움찔했다. 둘의 반응을 보니 아직까지 집에 말을 하지 않은 것.
하긴 태권도장 딸내미를 데리고 사고를 쳤으니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맞아 죽더라도 빨리 말씀드려라. 식이라도 올리려면, 웨딩드레스 입을 때 배 많이 나오면 안 예쁘다.”
새하얗게 질린 현민을 보니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그리고 애리 씨는 청바지 입지 마요. 내 듣기론 청바지처럼 조이는 옷 입으면 산모하고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규태가 아끼는 조각케이크를 맛있게 먹던 애리가 말로 뼈를 때렸다.
“선배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여자 친구도 없다면서요. 지금 말씀하시는 게 저희 할아버지 같았어요.”
다음날 모습을 드러낸 현민의 한쪽 눈탱이가 시퍼렜다.
“죽지는 않았네? 나였으면 아예 뒷산에 파묻어 버렸을 텐데.”
움찔
태하가 고소하단 표정을 말했다.
“어젯밤에 그 동네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현민이도 맞아서 기절했다고 하던데요. 구급차 부르고 하여간 시끄러웠나 봐요.”
“그런데 눈에 표시가 남았네? 손님들 상대하려면 얼굴이 저래서야.”
끌끌 혀를 차는 규태에게 태하가 속삭였다.
“저건 장모님한테 맞은 거랍니다. 그분도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아이고!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현민의 앞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뒤쪽에 있는 건물의 2층에 50평짜리 비어있는 사무실을 계약했다. 4층 건물에 2층이었다. 텅 빈 사무실을 파티션으로 나누고 안에 집기를 넣었다.
정보 쪽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해달라는 부탁에 선배 정의영이 추천한 사람을 만났다. 황규철은 경찰에서 정보 쪽에서 있다가 집안일로 작년에 사직을 했다고 들었다.
“정선배가 추천을 하더군요. 황경감님께 일을 배웠다고. 가지고 오신 이력서를 보니 경력이 화려하시더군요. 군에 보안사에 경찰까지.”
“화려하긴요.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 이력서는 될 수 있으면 보안을 유지해 주십시오.”
“사직하신 이유가 집안일이라 들었습니다만?”
“아내가 아팠습니다. 가장이랍시고 매일 제대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픈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일에 대한 회의가 들더군요. 집에 있는 아들들도 돌봐야 하구요.”
“아이고! 저런. 그래서 사모님은?”
“다행히 치료가 잘 끝나서 퇴원을 했습니다. 무작정 때려 쳤는데 먹고 살길이 조금은 막막하더군요. 여기 취직하면 사장님이 부자라고 월급 많이 줄거리고 정경위가 호언장담하더군요.”
날카로운 외모의 황규철이 농담을 하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많이 드리겠습니다. 회사에서 직책은 실장으로 하고 월 300에 차량제공, 정보수집에 소요되는 비용은 사무실에서 처리를 하죠.”
“기대보다 많은데요. 경찰에 있을 때하고 비교하면.”
“앞으로 제 눈과 귀가 되어 주실 분인데 그 정도 대우는 해드려야죠. 더 해드리고 싶지만 주변의 눈도 있으니 그 정도만 합시다. “
“한 가지만 물어보죠. 회사에서 제가 할 일이 멉니까?”
“첫 번째로는 회사를 설립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조만간 법이 만들어지면 창투사를 차릴 생각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여기에서 일할 만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회사가 만들어 지면 투자할만한 중소기업에 대한 조사도 해야 합니다.”
황규철이 생각하기에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곧바로 시급한 일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규태는 황규철의 요청에 따라 회사에 추가로 두 명을 영입했다. 황규철은 창투사의 설립 요건을 알아보곤 차근차근 회사를 만들 준비를 해나갔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증권주의 상승세가 가팔랐다. 규태는 거침없이 오르는 주식을 사고 팔면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중간고사가 끝나자 기다리던 법률이 만들어졌다.
규태는 사무실에 앉아서 차분히 증권계좌를 정리해보았다.
가지고 있는 주식들의 시가총액은 54억.
나머지 계좌들은 매매 없이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이리저리 창투사의 대표로 내세울 마땅한 인물을 찾았다.
그래서 찾은 인물이 지방은행에서 영업본부장으로 일하다가 행장경쟁에서 밀려서 은퇴를 한 구봉만 이었다.
다니던 은행을 나온 구봉만은 집에서 소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은퇴를 하고 특별한 할 일이 없다면 딱히 할 일이 없는 시절이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시간만 보내는 일이 어지간히 답답했던지 규태의 영입제안에 그도 반색을 했다.
사무실로 찾아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구봉만이 의욕을 내비쳤다.
“좋은 일이네요. 저도 은행 일을 하면서도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미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차입니다.”
그의 모습에 규태는 쓴 웃음을 지었다.
“창투사라지만 실제로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전무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국의 현실에서 은행도 투자하기를 꺼려하는 중소기업에 지원했다간 회사가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창투사라는 껍데기만 썼지만 실제로는 펀드를 만들어서 운용할 생각입니다.
“저도 현실은 압니다. 김사장의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결국 회사가 살아남으면 중소기업에 투자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겠지요. 펀드를 만들면 적은 금액이라도 일부는 중소기업에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미리 투자할만한 기업에 대한 조사를 하다 보니 쓸 만한 중소기업이 꽤 있었다. 나중엔 이름도 남아있지 않아서 기억을 못했지만 가진 기술이 쓸 만한 기업도 많았다.
규태가 기억하지 못하는 회사이고 자체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이라면 백이면 백, 대기업에 먹혔을 것이다. 그런 기업들을 잘 살린다면 나쁜 일이 아니다.
편법으로 창투펀드를 사모펀드처럼 운영할 생각이지만 중소기업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투자는 면피를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황경감에게 사장님께서 보통 투자자가 아니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이어린 규태를 무시할 법도 하건만 구봉만은 깍듯하게 규태를 대했다. 황규철이 구봉만을 창투사 대표 자리에 최선이라 손꼽은 이유가 나이답지 않게 유연한 사고방식과 부드러운 처신이었다.
대주주이자 실권을 가진 규태를 대표 자리에 오를 사람이 깔아뭉개려는 행동을 하면 회사내부가 시끄러워진다.
“제가 부탁을 드려야지요. 앞으로 대표 자리에서 회사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구봉만이 이야기를 마치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황규철이 규태의 방으로 들어왔다.
“구전무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단박에 결정을 내리신걸 보면 말입니다.”
“이야기는 많이 나눠보지 않았지만 괜찮은 분 인 것 같네요. 은행에 근무할 때 평판도 좋았다면서요?”
“업무실적으로 보나 내부평판으로 보나 차기행장으로 손색이 없는 분이셨지요. 문제는 은행행장자리가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모피아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재무부출신 퇴직관료들 말씀이시죠.”
“모피아들이 금융기관인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쪽하고 선이 닿지 않으면 밀리는 거지요.”
모피아는 관치금융의 어두운 그림자다. 금융기관들이 정부정책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
니 자연히 그곳 출신들의 입김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저는 마땅한 사람을 구해서 좋지만 입맛이 쓴 것이 사실입니다.”
“언젠가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미래를 모르는 황규철의 말에 규태가 속으로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좋아지지 않으니 문제죠.
“대표하실 분이 구해졌으니 직원들을 마저 구해서 중소기업청에 신고를 하죠. 가장 먼저 신청해서 세간의 눈길을 끌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시간을 맞춰서 여름에 등록하는 걸로요.”
“알겠습니다. 변호사와 협의를 해서 그렇게 맞추겠습니다.”
황규철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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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사무실은 넘겼지만 하루에 한번은 얼굴을 내비췄다. 이따금 현민과 태하가 모두 자리를 비우면 도움을 청하는 전화가 오기도 한다.
날씨도 쾌청했기에 기분 좋게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간 규태는 음침한 분위기에 이마를 찌푸렸다. 장금란과 일행이 머무는 상담실 안에서 큰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냐! 이 우중충한 분위기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조애리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규태를 반갑게 맞았다.
“선배님, 어서 오세요.”
“현민이하고 태하는 어디가고, 제수씨만 혼자 있어요? 급한 일이라도 생겼어요?”
“현민 이는 수업 받으러 대학에 갔고 태하 씨는 손님하고 건물 보러 갔어요.”
“그런데 저쪽 안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무슨 일 있어요?”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리나오는걸 들어보면 올라가는 종목을 팔고 내려가는 종목을 샀다고 장여사님이 화를 내는 것 같던데요.”
아이고,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장금란이 기어코 증권사 영업직원의 꾐에 넘어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