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14화 (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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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주민등록증

86년대의 대학 생활은 독재타도와 최루탄, 독재타도를 외치는 함성으로 시작되었다. 개학을 하고도 눈치껏 학교를 뺏더니 교수님의 경고가 전해졌다. 당장 학점에 구멍이 나게 생겼으니 몸을 바싹 낮 출 수밖에.

오랜만에 학교에 간 규태는 차안까지 스며드는 코를 간질거리는 매캐한 냄새에 재채기를 했다.

“에이취, 이 냄새는 오랜만에 맞아도 변함이 없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터덜터덜 강의실로 향하니 요상하게도 텅 비어 있다. 불길한 기운이 뒷골을 강하게 찔렀다. 냉큼 과사무실로 달려가니 낯익은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너 군대 안 갔냐? 하도 학교에 얼굴이 안보여서 다 군대간줄 알던데. ‘

“군대는 무슨 군대예요. 오늘 장 교수님 수업 강의실 옮겼나요?

“그거 오늘 휴강이야. 집안에 일이 생겨서 서울에 가신다고 하던데.”

휴강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마음잡고 학교에 왔더니 이 모양이다. 활짝 핀 봄꽃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규태의 눈에 과동기인 현영이 보였다.

“현영아!”

“이 자식! 너 안 죽었냐?”

냉큼 달려온 현영이 규태의 목을 감았다.

“켁켁, 내가 너 이 짓하면 죽인다고 했지. 힘만 좋은 놈이.”

덩치도 크지 않고 마른편인 녀석이 손힘은 엄청나게 좋아서 장난을 칠 때면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너까지 학교에 안 오니까. 동기가 하나도 없어 심심하단 말이다.”

2학년이면 휴학하고 군대를 간다. 같이 입학한 친구 중에 4학년까지 다이렉트로 올라온 친구는 ROTC를 하는 강동욱과 유현영, 규태가 전부였다.

“동욱이 있잖아. 그 자식이랑 놀아.”

“그 자식은 재미없어. 게다가 얼굴 보기도 힘들어.”

“그러면 너도 지원해서 군대에 가던지.”

“내가 미쳤냐?”

“이 부러운 신의 자식 놈. 군대도 안가는 놈이 어디서 찡얼거려. 전방에서 개 고생하는 친구들의 원성이 두렵지 않더냐.”

“응 하나도 안 두려워.”

심드렁한 현영의 반응이었다.

“엊그제 철희 휴가 나왔더라. 어휴! 그 녀석 얼굴이 아주 삭았던데.”

동기인 철희는 입학할 때는 그렇게 미소년이라고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던 녀석이다. 얼굴이 까맣게 탄 것은 물론이고 노안까지 왔다.

“낮에는 자고 밤에 철책 들어간다던데?”

“훈련 안하겠냐. 철책 들어가기 전에 죽어라 연병장 굴렀다던데.”

규태의 사무실은 서클 후배들의 아지트나 마찬가지다. 휴가 온 녀석들도 사무실로 자주 찾아왔다.

“수업에 참석하려고 왔더니 학교가 난리도 아니다.”

“언제는 안 그랬냐. 다음 수업은?”

“오후에 교양이다. 밥 먹고 서클실가서 시간 때우다가 들어가야지.”

“오오! 교양? 어디에서?”

“인문관이다. 국문과 1학년 애 들하고 듣는다.”

“속이 시커먼 놈, 하필이면 인문관이야. 거기는 꽃밭이잖아.”

공대보다야 덜하지만 상대 역시 여자의 숫자가 아주 적은 시절이다. 백 명의 입학동기중에 여학생이 다섯이다.

“수업을 월, 화, 수에 몰다 보니까 맞는 게 없어서 그랬지.”

예전이라면 흑심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겉모습은 스물 셋이지만 알맹이는 닳고 닳은 구렁이다.

“세살차이면 딱이네. 잘 찾아봐라.”

한참을 남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충 점심시간이 맞았다.

“식당이나 가자. 늦게 가면 줄서야 한다.”

크게 맛은 없지만 학교가 넓다보니 밖으로 나가서 밥 먹기도 힘들다. 점심시간이면 길게 줄을 서야한다.

현영은 밥을 먹고 다음 수업이 있다고 사라지고 혼자 남은 규태는 학생회관에 앉아서 노트를 끼적였다.

세월의 괴리.

이전 생에서는 자주 찾았던 학생회관이지만 바쁘게 살다보니 무심하게 지나치기만 했다.

현실을 살고 있지만 눈을 앞만 바라보는 골이다. 누가 자신을 보내 주었는지 몰라도 이렇게만 살기엔 젊음이 아까웠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아는 얼굴을 찾아보려 했지만 오고가는 사람 중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스마트폰이라도 있으면 시간을 잘 보내겠지만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보급이 되지 않은 시절.

멍하니 바깥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낸 규태는 오후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문학개론과 영문학의 이해, 교재도 준비하지 않아서 중간에 부랴부랴 서점에 들러서 구입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 수업이 끝났다. 해가 길어져선지 아직 화창한 날씨였다.

차만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맑은 날이다.

쩝쩝

입맛을 다신 규태가 터덜터덜 차를 세워둔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사무실에 들렀지만 큰일은 없었다. 사무실을 지키는 사람은 현민 혼자였다.

“아무 일 없냐? 태하는”

“아무 일 없구요. 태하는 수업.”

들여다보는 서류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지 이마를 잔뜩 찌푸린 현민이다.

“뭐하는 게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궁금한 마음에 들여다보니 토지대장이다. 옆에는 토지등기부 등본까지 있다.

집하나에 여기저기 권리가 복잡하게 엮여있는 토지였다. 자잘하게 지분이 쪼개져서 등기부등본이 두툼했다.

“이거 매매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그건 매매 안 돼. 여기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개발된 건 알지? 상속이나 개발문제까지 겹쳐서 권리관계가 복잡해. 예전엔 측량도 엉망이라 새로 측량하면 토지 면적도 다르게 나온다고 게다가 토지경계가 달라서 문제가 심각해. 남의 땅에 집 짓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해줘야 하는데 방법 없어요?”

아는 사람의 부탁인지 현민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방법이라? 그거 등기부에 들어있는 사람들한테 전화 걸어서 권리 포기서류 받아야 하는데 개인이 하기는 힘들고 변호사가 해야 하는데 하려는 변호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변호사의 숫자가 적어서 콧대가 높다. 이런 귀찮은 일을 수임하려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것도 일이다.“변호사요? 얼마 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찾아왔었는데?”

“그걸 왜 얘기 안했어.”

“잊어버렸어요.”

규태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올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주민등록문제로 소송을 부탁한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얄미운 현민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서둘러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하고 달려간 규태는 노란 대봉투안에 담긴 판결문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수임료를 냉큼 계산한 규태가 집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쉬운걸.”

자책하는 마음으로 봉투안의 판결문을 읽는 상웅이었다. 새롭게 주민등록을 하려면 대법원 판결이 나야한다.

할머니는 어린나이에 구미에서 옆 동네 김해로 시집을 왔다. 태어나자마자 죽을병에 걸려서 다들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출생을 신고하지 않았고 평생 학교를 다니지도 못햇다.

할머니는 문맹이었다.

호적이 없으니 이름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 부르는 갓난이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나이를 먹고 시집을 와서는 구미댁이라 불리는 게 이름 대신이었다.

할머니는 호적을 갖게 되었다는 말에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셨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도 같이 울었다.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아 규태도 어렴풋하게 짐작만 했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후처였다. 막내 정웅을 낳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새장가를 든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셨는지 할머니가 낳은 자식이 없었다. 계모였지만 손주들이 느끼지 못할 만큼 자식들과 사이가 좋았다.

정이 많고 사람 좋은 할머니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많았을까.

주민등록하나 가지지 못하고 평생 학교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한 할머니의 한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규태는 엉엉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영문을 모르지만 대충 눈치로 감을 잡은 동생들도 규태의 눈물에 전염이 되었는지 큰소리를 내며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할머니가 눈물을 그쳤다.

그런 할머니를 규태가 꼬옥 안아 주었다. 할머니의 가슴속 한이 그 눈물 속에 녹아서 모두 사라졌기를 바라며.

명절 때만 입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할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학교에 가야하는 고등학생 막내만 제외하고 전부 출동한 가족이다. 아는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었다. 할머니의 옆에서 미려가 부지런히 할머니에게 여러 주문을 했다.

사진한번 찍는 다는데 보통 번거로운 게 아니다. 할머니의 연세가 많으시니 이번 기회에 영정사진도 찍어두어야 했다. 미리 귀띔을 받은 사진사가 눈치껏 사진을 찍었다. 가족들도 번갈아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인화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닦달을 해서 빠르게 사진을 받은 가족이 증명사진을 들고 동사무소를 찾았다. 아버지와 얼굴을 아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순조롭게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이게 내 주민등록증이란 말이지? 믿어지지 않는구나. 내 얼굴이 있는 신분증이 생기다니.”

한참동안 앉아서 주민등록증을 어루만지는 할머니의 모습에 규태가 서둘러 말했다. 자칫하면 사람들이 많은 동사무소에서 어제 집에서 같은 대성통곡을 할 판이다.

눈치 빠른 미려가 할머니의 팔짱을 끼었다.

“할머니,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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