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10화 (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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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를 정하다

명함가게에서 찾아온 명함을 살피고 규태는 피식 웃었다.

KF 창업투자사 Venture Capital 창립추진위원, 위원이라 적힌 명함은 말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봄이 되면 학교를 가야하는데 규태는 교수들에게 이미 찍힐 대로 찍힌 상태. 오죽하면 학적은 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유령학생이라 부르겠는가.

나중 같으면 출석미달로 당장 학점에 권총을 맞아 구멍이 숭숭하겠지만 이 때는 교수들이 알아도 대충 눈을 감아주는 시기다.

3학년 2학기 학점은 한마디로 시들시들했다. D로 바닥을 깔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집안 눈치 보면서 성적표 빼돌리는 것도 일이었다.

4학년이 되었지만 학교에 자주 나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때는 최대한 피해야 한다. 앞으로 대학가의 시위가 세지면 세졌지 약해지지 않는다.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커지는 시기였다.  데모에 휘말렸다간 가뜩이나 주변의 눈길을 끌고 있는데 무사하기가 힘들다.

주식투자와 부동산 중개거래로 돈을 벌면서 규태는 부자 몸조심을 실천중이다.

시경 정보과나 세무서는 물론이고 안기부나 기무사의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교수들이 봐주는 것은 취업을 해 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면 학점에 구멍이 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이걸로 비벼봐야 하는데 잘 넘어갈지는 규태도 의문이었다.

“좋은 일 있어요? 뭐 보면서 혼자서 웃고 그래?”

맞은편 자리에 앉은 태하가 명함을 보고는 혼자 실실 웃는 규태의 자리를 기웃했다.

“이거 봐라.”

규태가 건넨 명함을 본 태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와아, 전에 말한 대로 진짜 할 거야? 창립추진위원회 위원?”

”나중에 만들더라도 준비는 해야지. 늦어도 10월안에는 시작할 생각이다. “

“그런데 이거 잘될까? 그냥 부동산이나 하는 게 낫지 않아? 군대도 가야하고.”

3학년이 되면서 비슷한 입장이라 고민이 많아진 태하였다.

군대 그게 문제였다. 인생 2회 차에 가장 큰 난관. 두 번가라면 욕을 할 텐데 이게 빼도 박도 못하는 처지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군대란 남자에게 최대의 숙적이자 골칫거리다. 규태는 방위병출신이다. 대전과 그 인근에 주소를 둔 입대병들은 신체검사결과에 상관없이 방위로 간다. 계룡시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근무할 병사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규태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수지원단에서 18개월간 근무를 했었다.

“넌 군대는 어쩔 생각이냐? 계속 돈 벌어야지?”

“형이 판 깔아 놨잖아. 이렇게 돈 잘 벌면서 군대 가면 미친놈이지.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라며.”

규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동산 중개업이란 게 돈은 잘벌지만 겉으로 보기엔 좋은 직업이 아니다.

올림픽까지의 호황이 끝나면 부동산 거래가 위축되면서 불황이 찾아온다. 계속 버티다 보면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올라가지만 버틸 체력이 없으면 중간에 직종을 바꿔야 한다.

“형도 남 눈치 때문에 만드는 거잖아. 나도 거기에 자리하나 만들어줘.”

“당연하지. 너도 딴대로 셀 생각은 하지 마라. 혁민이도 마찬가지고.”

“크크, 그녀석이 어딜 가겠어. 그 녀석은 형 광신돈데. 집에서도 형한테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다고.”

두 사람이 집에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뻔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둘이다.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매달 벌어오는 금액이 어지간한 월급쟁이의 연봉 정도가 되니 다른 서클후배들도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둘도 부동산 시장을 어느 정도 알고 욕심이 생기면 따로 사무실을 차려서 독립을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규태가 이리저리 살펴서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걸러내면서 사고를 막았다.

사고가 한번나면 푼돈모아서 목돈으로 막아야 한다.

이 바닥에 워낙에 사기꾼이 많다보니 욕심을 부리다가 한방에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 녀석은 어리니까 주위의 부추김이 약하겠지만 한꺼번에 목돈이 오가는 것을 보면 눈이 돌아간다.

“회사를 차리려면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잘 찾아보면 있겠지.”

생각 없고 단순한 태하다운 대답이었다.

“하아! 너한테 뭘 바라겠냐. 현민 이는 어디 갔냐?”

“몰라, 손님하고 약속 있다고 차 끌고 밖에 나갔어.”

“손님하고 약속은 무슨, 또 여자애가 찾아왔구나.”

“에이! 난 왜 이렇게 여자한테 인기가 없을까. 피부과라도 가야하나? 빌어먹을.”

돈 있겠다, 차있겠다. 손님 없으니 시간 많겠다. 엄동설한에도 피 끓는 젊은 청춘답게 바쁜 후배 현민이다.

산적 같은 외모 탓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태하가 혼자말로 투덜거렸다.

남의 일이 아니기에 규태도 쓴 입맛을 다셨다.

둘이 패배자의 아픔이 섞인 눈빛을 교환할 때 조용하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동생, 나야. 내 장인이 가진 건물을 팔려고 하는데 한번 매매해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재빨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냈다. 충남도청에 근무하는 장형일이었다.

“아이고! 엄동설한이라 작자가 나설지 모르겠네요.”

- 엄살은, 요즘 부동산 경기가 좋다던데. 자신 없어? 그러면 다른 곳에 부탁하고.”

“아이고 형님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세요. 당연히 빠르고 비싸게 매매해드려야죠. 건물은 지난번에 말했던 그건가요?”

- 그래 그 건물, 얼마나 하지?”

슬그머니 가격을 물어오지만 이미 빼꼼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잘 아시면서 뭘 물어요, 한 8억 할걸요. 그거 은행 대출 빼곤 잡다한 거 없잖아요.”

- 그럼 부탁하네. 돈 들어오면 알지? 자네 믿고 파는 거야.”

전화를 끊은 규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건물 명의만 장인명의지 실제소유자는 장형일이다. 팔고 주식하라고 꼬였는데 그때는 시큰둥하더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전화가 온 것이다.

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살 사람은 줄을 섰다.

“누구예요? 건물 판데?”

“도청 장계장, 저 뒤쪽에 아비식당 4층짜리 그거 판다는데.”

“오오! 장계장님 부자네. 그 건물 비싸잖아. 뒷돈 열심히 받았나?”

“장계장이 본가도 부자지만 처가도 논산 땅 부자야. 그 건물은 장계장 와이프가 실제주인이야.”

태하의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전에 규태가 막았다. 공무원이 건물가지고 있으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시절이다.

공무원 월급이 박봉이니 건물에서 나오는 세를 가지고 살림을 살라고 장인이 실질적으로 넘겨준 건물이다.

요즘 그 와이프 되는 장금란과 증권사객장에서 만나 몇 번 돈을 벌게 해주었더니 아예 투자를 늘릴 생각인 모양이다.

대전 도심의 건물들은 가격이 만만치 않다. 평당 천 이천은 훌쩍 넘어간다. 나중에는 신도심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구도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

다이어리를 뒤져서 건물을 매수 할 만한 이를 찾은 규태가 수화기를 들었다.

“매매가는 8억 2천, 은행에 걸려있는 대출이 3억이라 현금으로 5억 2천입니다. 한 달 월세가 500넘게 나오는 건물 이예요. 놓치기 아까운 물건이죠.”

- 알았어, 내가 사람 보낼게.”

“매수자 인적사항하고 돈은 삼억은 수표로 이억 이천은 현금으로 가져오세요.”

전화를 한 바퀴 돌리니 곧바로 작자가 나섰다.

관행처럼 다운 계약서가 일반적이어서 차액은 현금으로 거래를 해야 한다. 실제 매매가는 8억 2천이지만 세무서에 신고하는 매매금액은 육억이다. 육억 부분만 수표로 거래하고 나머지 차액은 현금으로 거래하는 것이다.

양도세 문제 때문에 매도자가 요구하는 다운 계약서는 두고두고 중개사에게 부담을 주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건물 팔면서 세금폭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상당수가 차명 부동산이다. 지금 규태와 통화를 한 육반금 사장도 자신명의로 부동산을 사지 않았다.

술장사를 하며 어둠 쪽에 반쯤 발을 걸친 상태라 자신의 재산을 절대로 외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장을 가진 사람이 낮에 건물매매를 하러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필요한 서류를 일러주니 장금란이 서류를 들고 나왔다.

미리 준비한 계약서에 장금란이 건넨 도장을 열심히 찍었다.

매수자의 도장도 미리 받아두었기에 일처리는 빨랐다. 옆에서 법무사가 앉아서 서류를 확인했다.

“이상 없습니다.”

법무사의 말이 끝나자 규태가 미리 준비한 수표를 내밀었다.

계약서에 적힌 매수자 명의로 발행한 삼억 짜리와 규태가 준비해둔 2억짜리 수표였다. 규태가 받은 대로 현금으로 이억을 주면 도둑이 들끓는 세상에서 잠도 편하게 자지 못할 것이다.

건물을 판 장금란의 표정은 아쉬움과 섭섭함이 공존했다.

“김사장 말대로 팔기는 했는데 이거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달마다 따박따박 월세가 잘 들어왔는데. 이거 팔지 말까?”

계약서에 도장 찍고 잔금까지 치렀는데 딴소리다.

“아이고 누님 걱정마세요. 내가 종목 잘 찍어 줄 테니 한 달만 기다리쇼. 올해 끝에는 내가 진짜로 잘 했구나 할 테니까. 나도 가진 주식 다 팔고 찍어둔 종목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규태가 넉살이 좋은 게 나이 많은 사람은 다 형님 누님이다.

“그리고 이거”

장금란이 하얀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을 확인한 규태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뭐 이렇게 나.”

봉투 안에는 법정 수수료 보다 많은 금액의 수표가 담겨 있다.

“지난 번에 오리온 알려줘서 내가 크게 먹었잖아. 그 보답 겸해서.”

주식이란 게 요물 같아서 사면 내리고 팔면 오른다.

장금란도 친구 따라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뜨거운 맛을 봤었다.

“하하, 친구 분은 어때요?”

“그 계집애도 투자금액 손해 때문에 이혼당할 뻔하다 살았잖아. 나중에 한턱낸다고 하더라. 김사장이 종목 찍어준다고 하니까. 현금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한턱은 무슨, 투자할 종목을 알려준다고 했으니 아는 척이지 돈을 벌고나면 안면 몰수할 터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는 게 세상의 인심이다.

주식이란 게 도박처럼 사람을 흥분시킨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앞에 있는 커피 잔을 들면서 장금란이 사무실 안을 휭하니 돌아보았다. 그녀의 남편 장계장은 시세를 알아본다고 몇 번 방문했지만 장금란은 처음이다. 다른 부동산들과는 인테리어에 장금란이 감탄했다. 우중충한 실내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오갈 것이라 생각했던 장금란이었다.

의자며 탁자, 내부를 꾸며놓은 것까지 부동산사무실이라기 보다는 커피숍 같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부동산 사무실의 빈 공간을 본 장금란의 머릿속으로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는 학교가면 남는 시간에 할 일이 없어 무료했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장금란이 주식투자를 하겠다고 밖으로 나온 것도 그런 무료함 때문이다.

증권사 객장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모임을 만들었다.

주식시장이 열리는 아침이 나와서 점심 먹고 친구들과 떠들다가 시장이 마감하면 집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맞지 않는가. 하지만 증권사 객장은 그녀들에게 불편했다.

나이 먹은 남자들이 오가는 것이며 흡연구역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까지. 공기도 좋지 못해서 장기간 머물 기에 불편했다.

하지만 이곳은 완벽하지 않은가.

깔끔한 인테리어와 조명,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커다란 사무실에 남아있는 여유 공간까지.

우아하게 앉아서 차 한 잔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수다를 떨면 완벽한 공간이지 않은가.

암사자처럼 빛나는 장금란의 눈빛에 규태의 얼굴에 저절로 난감함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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