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로를 정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코트를 스치며 지나갔다. 추웠다. 옆구리가 시렸다.
‘젠장 폼은 잡았지만 속은 쓰리네. 춥긴 오잘라게 춥네. 나도 여자나 사귀어볼까.’
학교에 가면 제법 봐줄만한 처자들이 득시글거렸지만 여자라면 이미 전생에 질릴 대로 질렸다.
이 시대에 여자를 사겼다간 백이면 백, 결혼해야 할 상황으로 몰린다.
결혼이라면 학을 뗏기에 여자를 만나는 것을 피했지만 이럴 때는 정말 쓸쓸했다.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태하 녀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형, 큰일 났어요.”
“누가 죽기라도 했냐? 추워죽겠는데 호들갑은.”
“그때 그 사람!”
“누구?’
“형이 사기꾼이라던 노인네 말이야.”
“아? 그 노인네.”
“진짜 사기꾼이라고 경찰서에서 연락 왔어요.”
“나 참 뭐라고, 그게 호들갑 떨 만한 일이냐.”
시큰둥한 규태의 반응에도 태하가 호들갑을 멈추지 않았다.
‘그 영감탱이 메이도프 영감하고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단 말이야.’
부유한 유대인들이 믿고 투자한 버나드 메이도프, 얼마나 철저하게 사기를 쳤는지 한때 미국에선 메이도프 펀드에 투자할 수 있는가 없는 가로 상류층을 구분한다고 할 정도였다.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한꺼번에 환매가 몰리자 결국 본색이 드러나 105년짜리 징역형을 구형받은 희대의 사기꾼.
이번에도 미국에 가면 다시 만날 것이다.
꼴 보기도 싫은 영감탱이지만 자신만 손해를 보지 않으면 그뿐이다.
사무실 안쪽 회의실이 떠들썩한걸 보니 후배들이 또 쳐들어온 모양. 학기가 끝났어도 후배들은 규태의 사무실로 종종 놀러왔다.
술하고 밥을 잘 사주는 선배들이 셋이나 있으니.
“오늘은 두부 두루치기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아라.”
태하 녀석이 오늘 사기로 했는지 호쾌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와!”
시끄러운 함성이 들려왔다.
규태는 이런 시끌벅적함이 좋았다. 1985년의 연말은 거리를 가득채운 캐롤소리와 차가운 바람 속으로 저물어갔다.
86년은 혹한과 함께 찾아왔다.
영하 20도를 넘는 혹한으로 한반도가 얼어붙었다. 한낮 최고기온이 영하 13도인 추위가 이어지자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확 줄어들었다. 겨울방학이라 한결 운신이 자유로워진 태하와 혁민은 가득 찬 기대가 수그러들어 우울해 했지만 부동산 사무실은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가격을 물어보는 사람들의 전화만 있을 뿐 조용했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상황이 달랐다. 지난 연말까지 조정 양상을 보였던 주식들이 고개를 쳐들고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지고 있는 자금들을 전부 미수까지 꽉꽉 채워서 지르는 탓에 매수할 때는 정신이 없었다. 한꺼번에 주문을 넣으면 번거롭지 않겠지만 거래량이 그 정도는 아니다.
천주에서 이천주로 잘라서 주문을 넣어야 한다.
매매체결도 전화로 확인을 해야 해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보통 번거롭지 않다. 이걸 매끄럽게 해내야 제대로 된 영업사원이다.
전화기를 얼굴에 끼고 얼마나 통화를 했는지 김하성의 뺨 한쪽이 발갛다.
“오늘 주문한 거 제대로 다 체결이 됐다. 김정웅계좌로 현대차 9만 1800주, 평균 매입단가가 22,500원. 지성희 계좌에 9,200주, 김성웅 계좌에 1만200주, 남순자 계좌에 9,100주, 김미려계좌에 1,500주, 김규태 계좌에 3만주. 이게 전부 얼마야? 사는 것도 일이지만 나중에 파는 것도 일이다.”
옆에 있는 계산기를 두드리려는 김하성을 막았다.
“됐어요, 구체적인 거야 오늘 장 끝나고 잔고확인하면 되고. 이걸로 살 수 있을 만큼은 전부 산거네. 큰일은 대충 끝난 거네.”
“아이고 그래 오늘도 대충 마무리가 된 것 같다. 밑에 직원이 들어오니까 좋네. 칠판에 받아쓰기만 안 해도 살 것 같다.”
전에는 객장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에 급급했지만 새해가 되면서 대리로 승진하면서 신입직원도 받았기에 여유가 있었다.
지점에 있는 직원들의 숫자가 지점장을 제외하면 과장 둘과 대리 둘, 사원하나. 나머지는 여직원 셋.
대도시에 있는 지점이라고 하기엔 너무 적었다. 시장이 침체되면서 제일먼저 영업직원의 숫자를 감축하다보니 생긴 일이다.
시장이 좋아지면서 지점일이 정신없이 바빠지자 신규직원을 체용하면서 김하성의 막내생활도 마감했다. 하나뿐인 남자 사원이라 온갖 잡일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밑으로 신입사원이 셋이나 들어오면서 숨통이 트였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영업력이 떨어지고 업무적인 실수도 하지만 그러면서 배워나가는 것이다.
신입직원이 실수하면 김하성이 뒤처리를 하느라 골머리를 앓겠지만.
“그래도 업무대리까지 해야 하잖아요.”
“그래, 그건 정말 골치 아프다. 마감 안 맞으면 퇴근을 못해요. 데이트할 시간이 모자라.”
김하성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나야 주문대로 매수한 거지만 너무 공격적인 거 아냐? 현대차 이미 오를 만큼 올랐잖아? 오천 원에서 이만 오천 원까지 오른 주식을 지르다니 난 어째 걱정스럽다.”
“주가가 조정을 거칠 만큼 거쳤고요. 이번에 미국에 수출한다고 하더라고요. 5일 이평선이 꺽일 때 까지는 들고 있어야죠.”
“그건 계속 나온 재료잖아?”
“전망이 좋답니다. 차가 미국에서 생각보다 많이 팔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단기간에 급등한 주식이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현대차는 2월에 3만원을 넘는다. 이후로는 대형주답게 쭉 크게 오르지 못하고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주식으로 바뀌지만 말이다.
“나도 찌라시를 봤는데 캐나다 쪽도 차 수출이 잘된다고 하더라.”
찌라시라 부르는 정보지는 허황되고 장황한 내용들이 많아서 쉽게 믿기 어렵지만 이따금은 아주 정확한 정보를 담는다. 누구와 누가 만났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연예계까지 촉수를 편다.
나중에 신문의 연예면 을 가득 메운 톱기사들을 제일 먼저 다루는 것도 증권가의 정보지다.
민감한 내용이 많아서 아무나 볼 수는 없고 최소한 지점장정도나 돼야 볼 자격이 주어진다. 80년대엔 특히 더 그랬다.
자료를 열람한 후에 파기가 원칙인데 김하성이 우연찮게 자료를 본 모양이었다.
“여기 지점장님 잘나가네. 그거 아무나 받는 자료가 아닐 텐데.”
“우리 지점장님이야. 이번에 이사 달고 곧바로 상무 달걸. 사장님하고 인척이잖아.”
지점장하고 술만 마시면 자랑을 하는 통에 모를 수가 없다. 본사에 있다가 지점으로 내려온 것도 이사가 되기 위한 과정의 하나다. 지점장이 실적 좋은 규태의 계좌를 탐내어 침을 흘리는 것을 막는 것도 일이었다.
지점장쯤 되면 여기저기 선을 엮어서 작전주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으휴! 그놈의 혈연, 지연, 학연.”
“한국에서 살려면 어쩌냐, 지점장이 너 시간 있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는데.”
“됐어요, 관심 없어요. 지난번에도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영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내가 실적 올려준 게 어딘데. 개인별 실적으로 성과급을 안준다고 해도 지점으로 영업비를 내려줄텐데. 형님은 지점장한테 따로 받는 거 있어요?”
“있겠냐?”
“참 너무하네. 지점장 혼자 다 먹겠다는 심보잖아. 증권사는 자리 옮기는 것 쉽잖아, 좋은 이야기 없어요.”
김하성은 규태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요? 다른 회사에서 오래요?”
“여기 이야기 하기는 그렇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점 내에서 이야기하긴 확실히 그랬다.
“당분간은 현대차를 매매할거예요. 삼성전자 거래량 터지면 매매하고.”
“언제까지? 지금처럼 두 종목만 사고 팔거야? 금융주는 주가가 바닥이잖아.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데.”
“매매하기엔 거래량 많은 대형주가 편해요. 그중에서도 아직 건설주나 금융주는 시기가 아닌 것 같아서.”
미리 증권주이야기를 했다가 섣불리 건드려 가격변동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다. 역사대로 2월에 바닥을 치고 상승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심산이다.
* * *
김상웅씨는 해가 저물어가는 창밖을 보았다. 겨울은 깊어가고 추위는 여전했지만 상웅의 마음은 여유로 왔다.
하루 종일 피운 난로 때문에 사무실 공기가 건조해서 뜨거운 보리차를 마시자 컬컬했던 목이 조금 풀렸다.
시청으로 쓰이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서 겨울이면 추위가 말도 못한다. 새로 건물 짓는다는 말은 계속 나오지만 예산 탓에 말로만 그친다.
남몰래 규정집을 들고 퇴직금이 얼만지를 계산했었다.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벌어봐야 얼마나 벌였겠는가.
간이 작아서 남들처럼 뒤로 들어온 돈을 탐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목표는 최대한 길게 버티면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요즘은 더 이상 공무원 생활을 하지 않아도 연금은 나올 테고 자식 놈이야 알아서 살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동생과 자주 전화를 해서 아들놈이 얼마나 벌었는 지를 들었을 때는 뭐 저런 놈이 있나 싶었다.
자신은 평생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을 했어도 이루지 못한 일을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아들놈이 이루는 것이다.
새롭게 생겨난 그의 고민은 큰아들 규태의 진로문제였다.
공무원생활이야 관심이 하나도 없으니 그렇고. 회사에 들어가란 말도 벌고 있는 돈을 보면 말하기가 그랬다.
현재 하고 있는 부동산도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생에게 말했던 대로 규태에게 돈 귀신이 붙었다는 말은 진짜였다. 그래도 번듯한 직장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주식이나 부동산은 아무리 돈을 벌어도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우습게 본다.
자신도 체면이란게 있으니 자식이 좋은 직장을 가지기를 바랐다.
‘하! 이놈이 뭐라고 할지 모르겠네.’
상웅은 규태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으니 저녁 늦지 않게 집으로 오라는 말을 전했다.
규태는 부친의 전화를 받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식사후 마주한 부친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속으로 올게 왔구나 싶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이다. 돈을 벌겠다고 이리 저리 바쁘게 다니는 통에 공부를 할 시간이 없으니 규태의 학교생활은 엉망이라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이제 4학년이 된다. 나름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했다.
제일 쉬운 일은 증권사에 취직하는 것이지만 남의 배만 불려주는 일이다.
공부를 더 하는 것도 그렇고 머리를 굴린 끝에 올해에 만들어지는 금융기관을 하나 떠올렸다.
86년 5월쯤에 국회를 통과하는 중소기업창업투자법으로 만들어지는 창업투자사다. 중소기업의 창업을 돕기 위해 만들어지는 창투사는 이 당시 금융기관의 설립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드물게 소규모 창업이 가능한 금융 기관이었는데 감독기관이 중소기업청이다.
최소 자본금 20억, 전문가 2인으로 설립되는 창투사는 이후 부침을 거듭하는데 제대로 활성화되는 것은 IMF이후다.
법이 만들어지면서 금융기관들은 다투어 창투사를 만들었지만 80년대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제대로 굴러 갈 리가 없다. 투자한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막대한 손해를 입고 결국 문을 닫는 곳이 허다했다.
감독기관도 중소기업청이었으니 2년에 한번 감사를 받으면 그뿐이다.
만들어도 제대로 투자할 곳이 없다. 오죽하면 투자할곳을 찾다가 만들어진 것이 영화펀드다.
규태의 입장에선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도 아쉬운 것이 없다. 노골적으로 필요한 것은 회사에 다닌다는 간판이었다.
김상웅은 자식 놈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상식으로 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금융기관을 만들겠다는 소리는 그의 상상을 한참 초월한 것이다.
“그게 금융기관이라고?”
“반금융기관이라고 해야죠. 은행감독원이나 증권감독원에서 관리하는 게 아니라 중소기업청에서 관리를 하니까요. 쉽게 말해서 돈을 모아서 펀드를 만들어서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회사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장사가 되겠냐? 남의 돈 받아다가 중소기업에 투자한다는 건데 말아먹기 딱 일 것 같은데. 기업한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야반도주하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데.”
“당연히 법대로 투자하면 망하겠죠. 그런데 누가 법대로 하나요.”
옆에서 가만히 자식이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 여사가 끼어들었다.
“자본금이 20억이라는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거니? 어디서 투자를 받으려고?”
역시 회사를 만들려면 돈이 제일 문제 아닌가. 모친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규태가 잠시 머릿속으로 가지고 있는 돈으로 투자한 주식의 움직임을 고려한 셈을 해보았다.
“가진 돈으로 가을쯤이면 될 것 같은데요. 두분 이름으로 투자한 금액들도 그때쯤이면 많이 오를테고요.”
태규의 부친과 모친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말이 20억이지 그게 얼마나 큰돈인가. 그런 돈을 올해 안에 만들겠다니 이걸 믿어야 하는지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 같으면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말고 취직이나 하라고 고함을 지르며 닦달을 했겠지만 지난해 보여준 게 있으니 믿지 않기도 그랬다.
“흠흠, 하여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알겠다. 너도 알다시피 너에게 보태줄 돈은 따로 없다. 지난번에 증권계좌에서 찾았던 돈으로 대출받았던 것 해결했고 여유자금으로 얼마를 가지고 있지만 나도 살아야하니. “
그러면서 김상웅은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김상웅이 가정의 경제권을 쥐고 있다지만 남편 손에 현금이 있다는 것을 아내가 알아서 좋을 게 없다.
그런 남편의 눈치에 남순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전까지는 치사하고 더럽지만 남편이 주는 생활비에 목을 매달았지만 아들 규태가 자기 자기명의계좌로 주식투자를 해서 번 돈에 부동산을 하며 달마다 남편보다 훨씬 많은 생활비를 건네 남순자의 주머니도 여유로 왔다.
살림살이가 여유로우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얘가 당신 돈 기댈 생각이나 하겠어요. 돈만 되면 한번 해봐라. 어머머! 그러고 보니 창투사란 회사 만들면 네가 사장이네.”
사장이 별건가, 돈을 많이 내서 회사를 만들면 사장이 아닌가.
“나이가 있으니까 제가 나서기는 곤란하죠. 은행출신으로 나이 먹은 사람을 구해야죠.”
“하긴, 사람들이 보는 눈이 있으니 네가 나서긴 곤란하지.”
옆에서 김상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로에 대한 자식의 생각을 알았으니 이젠 다음차례.
“학교는 여전히 시끄럽지.”
“올해는 더할 것 같은데요.”
규태가 부친의 눈치를 살폈다. 이쯤 되면 터져 나오는 레퍼토리가 있다.
“배가 불러 터져서 그래. 내가 너희 나이에는.......”
부친의 장광설이 터져 나오자 규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하는 도중에 끊으면 뒤끝이 길다.
잘못 걸렸으니 최소 한 시간이다. 눈치를 보니 모친은 벌써 유유히 사라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