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금융재벌-5화 (5/220)

────────────────────────────────────

────────────────────────────────────

날아오르다

무더위가 한 꺼풀 숨을 죽이고 찬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2학기가 시작을 했지만 규태는 도서관에서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미리 계획한 것을 이루려면 첫 단추부터 잘 꿰어야 하는 법.

쉬운 시험이란 걸 알지만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예상대로 위암진단이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수술이 가능했고 잘 치료만 하면 큰 문제는 없다는 진단이었다.

급하게 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회복도 나이에 비하면 빨랐다. 규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에 들러 할머니와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었다.

오늘도 병원에 들렀다가 도서관으로 왔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앉아 하루 종일 책을 들여다보니 눈이 뻑뻑했다. 옆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태하를 툭 쳤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태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민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는 사라진, 가장 인기 있는 오백 원짜리 솔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양담배를 피우는 게 죄악시 되던 시절이었다.

태하가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건넸다. 담배 한 모금에 커피 한잔.

건강에는 그리 썩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이때는 이게 그렇게 좋았다.

“공부는 잘 되냐?”

“민법 쪽하고 세법 쪽이 어렵 네요. 평소에 법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그런가. 실무 쪽도 그렇고.”

“나도 그래요. 머릿속에 잘 안 들온다고 시험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합격할 수 있기는 한지 싶기도 하고.”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두 녀석이 불안을 토로했다. 미리 준비한 거면 몰라도 느닷없이 시작한 시험공부였다.

불안하지 않다면 이상할 일이다.

“걱정하지마라. 시험은 아주 쉽게 나올 테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어렵게 나올 거야. 1차 시험에 합격자가 너무 많이 나와서 아우성을 칠 테니까. 너희들은 이번에 자격증 하나를 줍는 거야.”

“그럴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두 녀석만이 아니라 부친 김상웅도 이번에 시험에 응시를 했다. 중개사 시험 감독을 위해 들어간 시험장에서 문제를 풀어보고 자신도 시험에 응시 할걸 했던 부친의 탄식이 기억이 나서였다.

그만큼 1회차 중개사 시험의 내용은 상식적이고 평범했다.

기존에 부동산 실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첫 번째 시험에서 너무 많은 합격자를 냈다는 불평과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숫자를 조절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까지 합쳐져서 아주 어려워진다.

IMF로 자영업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시험의 난이도가 낮아지고 합격자가 늘어나지만 앞으로 십년도 넘게 남은 이야기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시험을 마치고 나왔다.

기억대로 문제는 쉬웠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도 끙끙거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이런 날은 술 한 잔 마셔줘야 하지만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아직 밝은 하늘을 보며 규태는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삼십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 규태는 환한 얼굴이 부친을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중개사시험이 끝나고 규태는 다음날부터 증권사 지점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추석은 일주일이 남았다.

사무실도 내고 인테리어도 새롭게 바꿔야 한다. 차도 한 대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예 출근을 하는 구나. 졸업하면 우리 회사에 올래.”

“싫어요. 여긴 월급이 너무 짜.”

가장 월급이 많은 곳이 단자회사, 신입이 80만원을 받았다. 증권사의 신입은 20만원을 채 받지 못한다.

증시활황기가 오면 바뀔 테지만 하여간 지금은 사회적 평판이나 급여수준이 너무 낮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규태는 취직할 생각이 없었다.

86년이 오면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서 창투사 설립이 허용된다. 최소 자본금 20억 원짜리 회사를 만들어서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렇긴 하지.”

하성의 자리 앞에 커피를 들고 앉았다.

전화기 한 대 놓여있는 것이 고작이다. 주식가격표를 들고 시간마다 고쳐 써야한다. 증권사의 막내직원은 본사로 전화를 걸어서 시간마다 주식가격과 거래량을 받아 적어야 한다.

시장이 상승하는 날에는 객장 앞에 모인 손님들은 시간마다 바뀌는 가격에 일희일비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늦어지면 아우성이 터진다.

“객장이 전산화가 빨리 돼야 하는데.”

증권사 직원들의 숙원중 하나였다.

“내후년에는 되지 않겠어요. 대신증권은 내년에 전산화 한다고 하던데. 다른 곳도 바꿀 테지요.”

“뭐 하긴 여기도 본사에서 준비를 한다고 하긴 하더라.”

“돈이 있어야죠.”

“그래 문제는 돈이지. 일 이억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니까.”

주식시장이 활성화 된다고 하지만 증권사는 작은 규모다. 지점마다 전산화를 하려고 하면 엄청난 금액이 소요된다.

백억 이상은 소모해야 하는데 그걸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년부터 시작된 증권활황기에 각 증권사 마다 엄청난 규모의 증자를 하는 것이다.

증권사마다 대여섯 번은 기본이었다.

“주문이나 내줘요.”

“또? 남아있는 돈이 없잖아?”

부친의 명의로 만든 계좌도 한참 전에 현대차를 매수했다.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돈을 보내왔네요.”

“누군데?”

“작은 아버지요.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일억이나 보내왔던데요.”

“그래! 그런데 이건 신용거래가 힘들 것 같은데. 아침 회의 때 신용한도 찼다고 하더라.”

그럴 것 같았다. 지점마다 신용을 주는 한도가 있기 마련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현금거래로 할 생각이니까”

규태의 말에 김하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손님의 계좌가 돈을 벌건 말건 영업사원은 매매금액으로 평가를 받는다.

실적이 나쁘면 지점장이 아침저녁으로 쪼아댄다.

규태의 계좌는 금액은 크지만 매매가 없어서 실적이 나오지 않았다.

“미수거래로 할거지?”

은근한 김하성의 말에 규태가 웃음을 지었다.

“미수청산이 열흘이죠?”

삼성전자와 현대차, 두 종목이 규태가 선정한 종목이다. 선정한 이유는 단기거래를 하려면 매매 량이 많아야 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두 종목의 시초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풀로 매수주문을 넣는다.

삼성전자가 14,500  ▲ 100

현대자동차 13,800  ▼ 200

가격을 받아 칠판에 적느라 바쁜 김하성을 보며 두 종목의 가격을 확인하고 주문지를 작성한 규태는 여직원에게 주문지를 내밀었다.

“삼성전자가 14,500원에 칠천 주, 현대차 13,800원에 만주요. 둘 다 매수입니다.”

주문지를 받은 여직원이 확인을 했다.

“네, 이렇게 주문 넣어주세요.”

확인을 한 여직원이 전화기를 붙잡았다. 벌써 객장은 전화 받는 소리와 객장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규태는 지점 밖으로 나섰다. 생각 같으면 매매주문의 결과를 기다리겠지만 이 시기 증권사 객장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로 인해서 너구리굴이나 마찬가지였다. 흡연실을 따로 마련해 두어도 제 멋대로 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

그런 인간들일수록 큰손이어서 증권사 직원들도 뭐라 할 수가 없다. 점심시간마다 증권사 지점 문을 활짝 열어놓고 환기를 시켜야 했다.

규태도 흡연자지만 그런 너구리굴에서 버티기는 싫었다.

지점을 벗어난 규태는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10월에 낼 부동산 사무실 자리를 찾아야 했다.

시내의 복덕방들을 돌았지만 마땅한 자리에 나온 사무실을 찾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자리가 마음에 들면 권리금이 비싸고 권리금이 싸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동산 사무실의 풍경은 한결같았다. 다들 사무실에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화투를 치거나 장기를 두면서 시간을 소비했다.

딱히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 시절 부동산은 동네 사랑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위상인들과 친분을 가져야 일거리를 물어와 주니까 이것도 일종의 영업 전략이긴 했다.

그렇게 나흘정도를 헤매 다녔지만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자 규태는 사무실을 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다시 생각했다.

좋은 자리라면 어림잡아도 삼천은 들여야 사무실을 차린다.

그 돈을 가지고 주식에 투자하면 수익이 비교할 수가 없다. 부동산 사무실을 내는데 회의가 느껴졌다.

규태는 마땅한 자리가 나지 않으면 사무실 내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추석연휴 하루 전 규태는 매수했던 주식을 되팔 면서 수익을 냈다.

신용으로 매수한 계좌들은 건드리지 않고 미수로 사들인 계좌를 정리해보니 대략 30%의 이익이 났다.

세금과 이자를 빼고 나니 이익이 2,890만원이었다.

추석이 되자 작은 집 식구들이 부산에서 올라왔다. 친가 쪽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두 분뿐이다. 고모님이 한분 계셨지만 일찍 돌아가셨다.

수술을 마치고 할머니도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오랜만에 보는 작은 아들과 손주들을 보는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수술 때 올라오겠다는 작은 아들 부부를 추석 때 보자며 극구 만류했던 할머니였다.

경과가 좋다는 소리에 작은 아버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떨어져서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 보지 못해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음식을 준비하는 며느리들의 관심사는 역시 학력고사였다. 규태의 여동생 미려도 고3, 작은집의 큰딸인 현지도 고3이었다.

미려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지만 현지는 전교에서도 손꼽히는 성적이었다.

작은 어머니의 현지 자랑이 한동안 이어졌다.

사실 규태의 모친 남 여사와 작은 어머니 지 여사는 젊은 신혼 시절 같은 집에서 살았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후, 형제가 과수원 땅을 팔아서 사업을 시작했다가 홀라당 망해서 작은 아버지가 야반도주하다시피 해서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젠 건축업으로 제법 자리를 잡았지만 그동안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남 여사와 지 여사는 동서지간이지만 동갑이다.

서로 경쟁심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주식투자가 그렇게 좋다던데요. 주변 친구들이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벌었나봐요.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데.”

속으로 입을 삐죽이며 이야기를 듣던 남 여사의 귀가 찬스를 만나 쫑긋했다. 그럴지 않아도 큰 아들 놈의 투자로 떼돈을 버는 와중. 이걸 어떻게 자랑을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뜻하지 않게 자랑질의 멍석이 깔리자 재빨리 뛰어들었다.

“글쎄 말이야. 규태가 이번에 하도 권해서 주식을 샀는데 그게 지금 3배로 올랐어, 세배.”

손가락으로 셋을 만들며 자랑 질을 시작한 남 여사의 말에 지여사의 눈이 크게 커졌다.

“어머나! 세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