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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을 마련하다.
자금을 마련하다.
“어무이, 이건 된다니까!”
“뭐가 된다는 거니. 그 주식투자얘기는 그만하라니까. 넌 수업도 없니 학교는 왜 안가는 거야.”
귀찮다는 얼굴을 한 모친은 손사레를 쳤다.
주식투자는 패가망신.
듣기만 해도 두렵지 않은가.
주변에서 주식에 투자해서 돈 벌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규태의 모친 남 여사도 소싯적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천재소리를 들은 사람이다. 규태의 외증조부 그러니까 남 여사의 조부가 큰 손녀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했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까.
중학교 시절 몸이 약해서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음에도 지역의 최고 명문여고를 덜컥 합격하는 것을 보면 여간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뭐가 되도 됐을 거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김 씨네 집에 시집와서 세 아이를 키우다보니 그 좋은 머리를 써보지도 못하고 세월만 보내는 중이었다.
“작년에 선경주식 석 달 만에 여섯 배가 올랐다고. 천만 원 투자하면 육천만원을 벌었다는 소리야. 요즘 수출 잘 된다는 소리 들었지. 그런 회사 주식 사놓으면 돈버는 거라니까.”
“시끄러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학교나 가!”
“엄니 이건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건데. 엄니도 아부지가 경제권 쥐고 생색낼 때마다 짜증나잖아.”
남 여사의 가장 큰 약점은 경제권을 쥔 부친이 짠돌이 노릇을 하며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다.
“그거야 그렇지 너희 아버지가 돈 문제는 얼마나 치사하게 구는데.”
“아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엄마도 딴 주머니 차라니까. 나도 어지간하면 이렇게 안하는데 이건 정말 확실하다니까.”
“.....그래도 주식은”
“진짜! 나 좀 믿어봐. 나 엄니 큰아들 규태야, 규태. 서울에서는 돈 싸 짊어지고 주식 사려고 눈이 벌것데.”
규태가 이렇게까지 큰소리를 치자 모친도 고개를 갸웃했다.
큰 아들놈이 무뚝뚝하긴 해도 속 한번 썩힌 적 없고 손에 들고 보여주는 것들도 그럴싸해서 귀에 솔깃했다.
“그런데 중요한건 내가 돈이 없다는 거잖니. 돈이 있어야 투자를 하던지 말던지 하지.”
“돈이 왜 없어 엄니 계하잖아.”
“그거 아직 탈 때도 안됐는데 내년이나 돼야 순번 돌아와.”
규태가 손을 내저었다.
“빌리면 되지, 계주한테 미리 당겨달라고 하면 되잖아, 2부라면서.”
“얘가! 얘가! 돈을 빌려서 주식을 산다고. 집안 말아먹을 일 있니.”
남 여사가 펄쩍 뛰었다.
“그러지 말고.”
“안 돼.”
모친이 손사레를 쳤다.
하지만 규태는 알고 있었다.
한 두어 번 더 모친을 조르면 틀림없이 넘어온다고.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매달린 끝에 규태는 어머니로부터 2,000만원의 자금을 빌려낼 수 있었다.
“빵순아, 너 투자 좀해라.”
“뭐래.”
“투자 좀 하라고 지지배야.“
“설명.”
“너 말 짧게 하지 말라고 했지.”
못마땅한 게 있으면 여동생은 말이 짧아진다. 외모는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 놓지 않아서 형제들 가운데 제일 부자였다.
“이 오라버니가 좋은 정보가 있어서 이번에 주식시장에 투자를 하려고 한다. 그러니 어여쁜 너도 한 다리 걸치거라.”
“오래비가 무슨 돈이 있어서. 돈 생기면 매일 술 먹기 바쁘면서.”
“흐흐, 엄마 꼬셨지.”
여동생 미려가 이마를 찌푸렸다. 이 오빠란 놈은 어지간한 게 아니면 큰 소리를 치지 않는다.
책임을 지기 싫어서 라는데 하여간 어린 시절부터 아주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나서지 않는 놈이다.
“할게.”
“엥, 진짜로? 얼마나?”
“어디보자 은행에 가야하는데. 여기 통장 있으니까 오래비가 찾아서 투자해. 여기 도장. 비번은 거기 통장 뒤편에 써 있는 거.”
미려가 규태에게 통장을 던져주었다.
한번 결정하면 동작이 빠른 것이 여동생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우와! 너 부자구나.”
통장에 찍힌 돈은 무려 240만원. 일개 고등학생이 가질돈이 아니지만 어린시절 세뱃돈부터 꼬박꼬박 모아온 것이라 액수가 제법됐다.
“잘해라, 손해보면 죽을 줄 알아.”
“걱정하지 마라.”
주먹을 쥐고 위협하며 흔드는 동생을 보며 규태가 호언장담을 했다. 이미 미래보고 결과를 뻔히 아는 투자인데 손해를 볼 리가 있겠는가.
“야! 이때는 이랬구나.”
증권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때라 대전에 있는 증권사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시청앞에 있는 동방증권 대전지점이었다.
규태도 이전 생에서 증권사에 출입하기 시작한 것은 89년부터, 주식시장의 활황기 끝 무렵부터였다.
86년부터 시작된 증권시장의 호황에 힘입어 전국의 증권사 지점마다 시세전광판이 설치된 후였다.
그전에는 커다란 칠판에 종목이 적힌 나무패가 걸려있고 시간마다 가격과 거래량을 손으로 적는 방식이었다.
전화주문을 받는 직원들과 객장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여직원에게 가서 거래계좌를 세 개 만들고 목적한 주식인 현대차의 가격을 살폈다.
5,350원.
3월에 3,400원이었던 주가가 꽤 오른 상태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1년 후에는 3만 원까지 오른다.
‘어디보자 이 인간이 지금쯤 여기 있을 텐데.’
규태가 찾는 증권사 직원 김하성은 고등학교 동창의 형이다. 규태가 들어간 첫 직장의 사수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회사를 옮겨서 영업담당 상무까지 오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규태는 앳된 얼굴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김하성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앞자리에 앉았다. 전화로 주문을 마친 김하성이 인사를 받았다.
“처음 뵙는 분인데요?”
영업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기억해야 한다.
“하석이 형님 되시죠. 저 하석이랑 고등학교 동깁니다.”
“그래요. 반갑네요. 우리 막내랑 친구라니까. 그런데 어떻게 주식을 살려고?”
“오늘 계좌를 개설했는데요.”
“종목은, 뭘 사려고?”
“현대차요.”
“나쁘지 않네. 그런데 단기간에 너무 올랐어. 올 초에 산 사람들이 전부 이익보고 빠졌거든.”
“압니다. 3천 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제 5천 원대로 올라왔다는 걸. 그래도 먹고 더올라갈 것 같네요.”
김하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증권사 영업직원들은 선호하는 한 두 종목이 있다. 증권사를 찾는 손님들이 추천종목을 물어오면 답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란 게 묘해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종목도 몇 번 추천하다보면 점점 자기 확신에 빠지게 된다.
그 주식이 좋아보이게 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어때? 별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올해 실적도 좋거든.”
역시 뛰어난 능력을 가진 김하성답게 날카로운 종목추천이었다. 삼성전자도 역시 오르긴 오른다. 하지만 그 폭이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다.
“삼성전자도 좋죠. 하지만 현대차 쪽이 더 좋을 것 같네요. 미국수출이 성공을 거둬서 내년 이익이 크게 날 것 같던데요.”
태규의 말에 김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이 권해도 최종선택은 투자자의 마음이니까.
“그럼 내가 주문을 넣을까?”
“아! 그런데요. 신용거래를 하고 싶거든요.”
“신용매매? 그게 뭔지는 알고 있는거지?”
“증권회사에서 돈 빌려서 주식을 사는 거잖아요. 기간이 석달인가요?”
“아는구나, 그래도......”
김하성이 이마를 찌푸렸다. 어지간히 주식시장을 아는 사람들도 함부로 신용거래를 하지 않는다. 주식이 급락하면 기존에 투자한 자금들도 한꺼번에 날아가 버리는 깡통계좌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부탁드릴께요.”
규태가 고개를 숙였다. 신용거래는 말그대로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서 투자하는 것이다. 실적압박을 받는 증권사 영업사원들이 만류할 이유가 없지만 위험도 크다보니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않는다.
증권사고의 99%는 이 신용거래 때문에 발생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하성이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지점장님께 여쭤보고 결정할 일이라서. 잠깐만.”
지점장이 신용거래를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더군다나 직원이 아는 사람 일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결국 규태는 5,600만원의 현대차 매수를 부탁하고 증권사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