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곧 졸업식을 하니까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
수혁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난 아빠가 오기로 해서 그쪽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담 회장님도 오시는구나. 그럼 인사도 드릴 겸 같이 가자.”
루나의 말을 들은 수혁은 그녀를 따라 아담에게 인사를 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아담을 비롯한 미국에 있는 그의 지인들은 대부분 참석하여 졸업식을 축하해 줬고, 식을 마친 뒤에 함께 레스토랑으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즐겼다.
* * *
2004년 8월 16일 월요일, 수혁은 1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했다.
“수혁아!”
“엄마, 잘 지내셨어요?”
긴 시간 아들을 기다리던 혜정은 수혁을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버지는요?”
수혁은 엄마를 한 번 꼭 안아 준 뒤 선웅을 찾았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왔는데, 그새 도착했구나.”
강선웅은 서로 포옹하고 있는 가족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캐리어랑 다 챙겼지?”
“네, 바로 출발하셔도 될 것 같아요.”
“혹시 괜찮으면, 양평으로 가는 건 어때? 아니면 서울에 있는 네 아파트로 가도 되고.”
선웅은 아들이 행여나 피곤해할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평으로 가시죠. 말 나온 김에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같이 지내는 건 어떠세요?”
“우린 완전 환영이지!”
수혁의 말을 들은 혜정은 화색을 드러냈다.
“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부모님과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것 같아서요. 9월에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되면 또 오래 못 볼 텐데, 한국에 있을 때만이라도 같이 있어야죠.”
“회사는 안 나가 봐도 되냐?”
“이 양반 좀 봐? 지금 회사가 대수야?”
선웅은 선의에서 한 질문이었지만, 혜정은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회사에서 쓰는 화상 프로그램이 있어서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원격으로 임직원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한 번씩은 본사에 갈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어지간해서는 계속 엄마, 아버지랑 함께 있으려고요.”
“그래, 알겠다. 더 이야기했다가는 너희 엄마 화날 것 같으니까 얼른 출발하자.”
“하하, 알겠어요.”
선웅의 넉살에 수혁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
양평에 도착한 수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주변 풍광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혁아, 옆에 새로 짓고 있는 집 보이지?”
선웅은 마당에서 가만히 서 있는 수혁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네, 안 그래도 그걸 보면서 이웃이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집은 유리와 어르신이 살 집이야.”
“잘됐네요. 일전에 할아버지께서 이 동네를 참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수혁은 과거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너, 유리랑은 계속 연락하지?”
“네, 미국에 있을 때도 종종 연락했어요. 아마 오늘 저녁에는 유리가 이곳에 올 것 같아요.”
“그래, 서로 떨어져 있는 만큼 네가 신경을 더 써야 해. 유리가 내면이 강한 아이지만, 너 없이 홀로 있는 게 많이 힘들었을 거야.”
선웅은 수혁과 유리가 정식으로 교제하지는 않지만, 서로 호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게요. 좀 있다 저녁에 보면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요.”
“잘 생각했어. 자, 이제 들어가자. 엄마랑 할아버지가 기다리신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그냥 아저씨나 아버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1년 정도 살긴 했지만, 입에 잘 안 붙더라고. 어르신도 호칭을 바꾸라며 뭐라고 하셨는데, 이제 포기하셨어.”
선웅과 혜정은 집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상욱을 모시고 살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그렇군요. 가서 할아버지랑 차나 마시면서 담소를 나눠야겠어요. 들어가시죠.”
수혁은 아버지를 따라 집에 들어갔다.
* * *
“어머니, 이거 정말 맛있네요.”
“오랜만에 솜씨 발휘해 봤어.”
양평에 도착한 유리는 혜정과 같이 갈비찜을 비롯한 다양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음식을 만드는 사이 남자들은 식기와 테이블을 세팅하며 식사 준비에 동참했다.
“아들이 왔다고 오늘은 좀 무리를 했구먼.”
김상욱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밥상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유리가 도와준 덕분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손녀딸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까 참 다행이야.”
상욱은 선웅 내외에게 1년간 신세를 졌기 때문에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했다.
“아버님도 계시고, 유리도 종종 왕래한 덕분에 저희도 적적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어요. 연말이면 집이 완공될 텐데, 편하실 때 언제든지 놀러 오세요.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녀는 상욱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후 사람들은 식사를 시작했고, 한국에 돌아온 수혁을 두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작년 11월쯤이었나? 집에서 뉴스를 보는데, 수혁이 네 이름이 나와서 엄청 놀랐어. 당장 너한테 연락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는데, 이이가 말리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지 뭐야.”
혜정은 선웅을 흘겨보며 말했다.
“스트레스 받고 있는 애한테 꼬치꼬치 물어봤자 좋을 게 뭐 있어? 그리고 어차피 별 탈 없이 잘 지나갔잖아.”
“죄송해요, 제가 전화를 드려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어요.”
부모의 대화를 들은 수혁은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우리보다는 유리한테 연락 좀 잘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아, 맞다. 수혁아, 나가서 유리랑 정원에 있는 의자들을 정리해 줄 수 있어?”
선웅은 수혁을 배려하기 위해 가벼운 심부름을 시켰다.
“출입문 들어올 때 보이는 의자들 말씀하시는 거죠? 가자 유리야.”
“알겠어.”
수혁은 속으로 고마워하며 유리를 데리고 밖에 나갔다.
“의자들은 정리 안 해?”
“괜찮아, 산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자.”
정원을 나와 길가로 나온 유리가 의아해하며 묻자 수혁은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좋아. 우리끼리도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잖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유리의 말을 들은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하늘에는 보랏빛 노을이 살짝 남아 있었고, 사방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 여름밤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배경이 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면서?”
“아, 그게 회사 운영에 꼭 필요한 일이라 어쩔 수가 없네…….”
수혁은 자신이 꺼내려던 말을 유리가 먼저 언급하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MK 그룹을 견제하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들었어.”
“맞긴 한데, 누가 이야기해 준 거야?”
“내가 답답해하니까 찬식이가 몰래 귀띔해 줬어.”
유리는 가끔 안부 전화를 했지만, 수혁이 워낙 바쁜 터라 길게 대화한 적이 드물었다. 따라서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대학 동기였던 찬식에게 자연스레 물어보는 경우가 잦았다.
“1년 동안 날 기다렸을 텐데, 또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서 미안해. 하지만 이 과정만 마무리하면 한국에 완전히 돌아올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수혁아, 이번에는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어? 방금 한 말 진심이야?”
반대를 예상했던 유리는 의외의 답변에 화들짝 놀랐다.
“솔직히, 미국에 있었을 때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
“그럼, 진즉에 말하지 왜…….”
“옛날부터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싶다고 했던 네 말이 자꾸 떠오르더라고. 현재 재단 이사장으로 그 꿈을 펼치고 있는데, 날 위해서 네 인생이 소모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리고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남아 있어.”
“그게 뭔데?”
유리는 진지한 자세로 수혁의 말을 경청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차마 같이 가자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너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신데, 미국에 가게 되면 돌볼 수 없게 되잖아.”
“참 신기하다. 할아버지께서 네가 그 부분을 고민하고 있을 거라며 나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있거든.”
“할아버지께서?”
수혁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처음엔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었어. 내 인생이 중요해도 날 키워 주신 할아버지를 두고 가는 일은 용납이 안 되더라고.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며 거듭 설득하셨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미국에 있었던 수혁은 유리가 자신을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 한들 상대가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까 방금 네가 말한 부분을 언급하시며 오해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그러면 널 데려가도 큰 문제는 없는 거야?”
“너랑 함께 간다고 하면 할아버지는 서운해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하실 거 같은데?”
“잘됐다. 그러면 집에 돌아가는 데로 바로 말씀드려 보자.”
“응, 그렇게 하자.”
유리는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미국행을 결정 지은 수혁은 그녀와 손을 잡고 동네를 천천히 돌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실컷 나누었고, 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둘이 데이트라도 하고 왔어?”
선웅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혁을 익살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대화가 길어지더라고요. 할아버지랑 엄마는요?”
“지금, 부엌에서 맥주 마시면서 놀고 있지.”
“아버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같이 부엌으로 가시죠.”
“그래, 알겠다.”
수혁은 유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어른들에게 미국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잘 생각했어, 마침 우리도 너희가 없을 때 그 부분에 대해서 상의하고 있었거든.”
혜정은 아들의 말에 반색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이번에 유리랑 미국에 가게 되면 1년에서 2년 정도는 얼굴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지 마라. 지난 1년도 너희 부모랑 즐겁게 잘 지냈으니까. 그리고 유리도 이제는 본인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어?”
상욱은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유리를 잘 챙기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둘이 그냥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
“배려해 주신 만큼 더 잘하겠습니다.”
수혁은 상욱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수혁아, 유리가 미국에서 체류하려면 관광 비자로는 힘든 거 아니야?”
혜정은 외국에 나가 본 적은 없지만, 미국 비자 발급이 까다롭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행히 미국에 지오스토리 법인이 있어서 취업 비자를 신청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내일부터 유리랑 미국 갈 때 필요한 것들을 같이 준비해 봐. 나중에 한꺼번에 처리하려다 보면 꼭 문제가 생기더라고.”
“어째 엄마가 저보다 더 적극적이시네요?”
“나도 네 엄마 말에 동감이다. 둘이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괜히 문제라도 생기면 얼마나 아쉽겠어?”
이야기를 듣던 선웅은 혜정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내일 점심에 유리랑 서울에 가서 이것저것 알아볼게요. 유리야, 괜찮지?”
“응, 그렇게 하자.”
유리는 어른들의 격려하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 31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