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MK이노베이션이 특허와 종자 사업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곤 하지만, 석유를 팔아서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수혁은 MK그룹의 주 수입원인 석유 판매 사업을 약화시키기 위해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부각시킬 계획이었다.
“대표님, 정책 설명이야 할 수 있겠지만, 실시간 소통이라 하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네. 정책 설명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을 말씀드린 겁니다. 질문 선택은 의원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질문은 나오더라도 알아서 골라내시면 되고요.”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혁은 존의 부름에 정신이 들었다.
“그전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획기적인 방법이군요. 이거라면 승리까지는 몰라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전세를 흔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메디슨 전략실장은 수혁의 의견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 그동안 스태프들과 정책 현안들을 꼼꼼히 검토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대중들과 직접 소통할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는구나.”
존은 아들의 물음에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설명이야 아버지께서 누구보다 잘하실 수 있겠죠. 하지만 질의응답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에요.”
스콧은 대선 토론 당시, 잭에게 시종일관 밀리는 모습을 보여 줬던 존이 질의응답 코너를 침착하게 수행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흠, 지금부터 대비를 해 봐야지.”
“아,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의원님을 위해 이미 준비를 다 해 뒀거든요.”
수혁은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존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각 현안별로 들어올 수 있는 질문을 정리해 봤습니다. 파트 별로 적게는 70개, 많게는 120개까지 모범 답변을 만들어 놨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허허, 애당초 작정을 하시고 오신 거였네요?”
존은 수혁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기왕 하는 거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거기 있는 문항들만 잘 숙지하셔도 질의응답 때 당황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양이 방대한 것 같으면 말씀하세요. 핵심 질문만 요약해 놓은 축약본이 있거든요.”
“축약본을 볼 일은 없을 거야. 아버지가 순발력은 좀 부족하셔도 대본이나 텍스트 같은 것들이 주어지면 누구보다 숙지를 잘하시는 편이거든. 그리고 고마워, 수혁. 네가 이 정도로 준비해 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
스콧은 수혁이 여러 방면으로 고민한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훗, 공치사는 선거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아닙니다. 공들여 만드신 자료를 그냥 받으려니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이런 것들은 원래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메디슨은 전략실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 또한 여러분들에게 얻어 가는 게 적지 않습니다. 자료를 애써 만들어도 메신저가 공신력을 갖추지 않으면 큰 효과가 없으니까요.”
수혁은 본인이 직접 비위 사실을 공개하고, MK그룹을 규탄해도 파장이 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창 커 가는 유망한 회사를 운영하는 오너이지만, 미국에 온 지 2달밖에 되지 않은 초출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서로 윈윈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대충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은데, 혹시 궁금하시거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수혁은 존의 덕담에 화답하며 물었다.
“이미 해 주신 게 많아서 당장은 부탁드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대표님 회사에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됩니다. 저에게 주신 자료들은 MK게이트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사안이 엄중하니까요.”
“되도록 조심스러운 행보를 걸어야겠죠.”
“폴 모리 회장과 제이슨은 촉이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의 관계를 알아챌 겁니다.”
존은 수혁이 행여 피해를 볼까 염려가 되었다.
“네, 분명 그럴 테지요. 만약 저쪽에서 공격해 온다면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MK그룹이 밉더라도 자국 기업을 두고 한국 기업 편을 들기에는 부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희야 당연히 대표님께 호의를 갖고 있지만,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메디슨은 SH그룹과 MK그룹이 부딪혔을 때 대놓고 편을 들어줄 수 없음을 밝혔다.
“괜찮습니다. 환경에 불편하기보단 주어진 여건에 맞게 적절한 대책을 세우면 될 일입니다.”
수혁은 미국이 자신의 홈그라운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덕분에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략실장님의 말씀이 다소 매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실망이라니요. 딜을 제시한 사람은 저고 회담 결과에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존이 위로해 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수혁은 심적으로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당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나서 주신 점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여기 명함이 있으니 의논하실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수혁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캠프 본부를 빠져나왔다.
* * *
이튿날이 되었다.
“속보입니다. 존 그레엄 후보가 오후 2시에 있던 기자 회견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당내 원로로 분류되던 톰 상원의원이 MK이노베이션의 제이슨 대표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증거 자료를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입수했다는 소식입니다. 존 그레엄 후보는 이 사태에 대해 사과 성명을 냄과 동시에 당 차원에서 대대적인 전수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힌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런 젠장. 어떤 버러지 같은 놈이 내 뒤를 밟은 거야?’
제이슨은 신경질적으로 TV를 꺼 버렸다. 그는 존의 기자 회견 직후, 필 모리에게 연락을 받아 뉴욕에 있는 자택에 와 있는 상태였다.
“너,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아버지…….”
필 모리는 오후에 일정이 있었지만, 모두 취소하고 곧장 집으로 왔다.
“넌 어렸을 때부터 입이 방정이었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널 뭐라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딱 하나다.”
“제가 성과를 냈기 때문이죠.”
제이슨은 눈을 질끈 감으며 폴이 할 말을 대신했다.
“네가 사고를 쳐도 수습을 할 수 있는 범위 안의 것들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경우가 달라.”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자유당에 우리가 매수한 의원들이 남아 있잖아요. 게다가 대통령께서도 우리 집안과 각별한 사이니 일을 크게 키우지 않을 겁니다.”
“안 그래도 방금 잭과 통화하고 오는 길이다. MK그룹이 뇌물 수수와 연관되어 유감이긴 하지만, 이대로 사건이 수습만 된다면 선거에는 호재라며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어.”
필은 잭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제이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볼게요.”
“어떻게 말이냐?”
“당사자의 동의 없이 녹화된 영상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아요. 그리고 톰에게 준 돈은 세탁을 마친 거라 본인이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MK그룹이 흔들릴 일은 없을 거예요.”
“흠, 믿고 맡겨도 되겠어?”
필 모리 회장은 확신에 찬 제이슨의 태도에 불안감은 점점 수그러들었다.
“제가 이제까지 아버지를 실망시킨 적이 있나요? 비록 말썽은 좀 피우긴 했지만, 공부부터 사업까지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잖아요.”
“네 말이 맞아. 넌 항상 어떤 난관이든 잘 헤쳐 왔지. 후, 그래도 이번 일만큼은 정말 신중하게 처리해줬으면 좋겠다. 잭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당연하죠. 아버지께서 자유당 특별 고문을 맡으신 것도 다 잭 아저씨 때문이잖아요.”
필 모리와 잭 웰링턴은 중학교 고등학교 동문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필은 잭이 정치를 시작한 이래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고, 잭 또한 MK그룹을 은밀히 지원해 주었다.
“어쨌든, 네가 잘 처리할 거라 믿고, 난 이만 가 봐야겠다.”
“또 어딜 나가세요?”
“지난주부터 후원회 회장직도 겸임하게 돼서 모금 행사에 참석해야 하거든. 나중에 보자.”
대화를 마친 필은 겉옷을 챙기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날 노리는 거지? 떠오르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제이슨은 평소 척을 지고 사는 사람이 많았기에 수혁이 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일단, 벌어진 일부터 수습해야겠다.’
그는 오늘 공개된 영상에 대해 어떻게 해명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 * *
존의 사과 성명 발표 후 하루가 지났다. 수혁은 여느 때처럼 케이턴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이 되어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는 중이었다.
‘훗, 예상대로 움직이는군.’
MK이노베이션은 언론사를 통해 입장문을 공개했다. 제이슨은 영상 속 인물이 본인인 건 시인했으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앞뒤 맥락을 잘라 자신을 음해한 거라며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어제부터 제이슨을 두고 시끌시끌하던데?”
루나는 뉴스를 보고 있는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시끌시끌한 것치고 검찰이나 FBI에서 너무 잠잠한 것 같은데?”
“현 행정부도 그렇고, 정치인들이 뒤를 봐주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학교에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나름 심란한 모양인데?”
“훗, 심란한지, 어떤지는 두고 볼 일이지.”
제이슨은 신속한 대처를 위해 수업을 듣지 않고 회사에서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중이었다.
“어째, 뭔가 아는 표정인데?”
루나는 수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수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질문은 사양할게.”
“쳇, 그것보다 오늘은 뭐해? 괜찮으면 나랑 펍에서 맥주나 마실래?”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술은 어려울 것 같아. 나중에 한가해지면 그때 마시자.”
수혁은 학교를 마치고 존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여유는 없었다.
“휴, 난 오랜만에 찬식을 불러서 같이 마셔야겠다. 거기가 맥주로 정말 유명한 곳인데…….”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걸까?’
그는 루나가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듣지 못한 채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 * *
맨해튼에 위치한 평화당 선거 캠프.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신원 검사도 안 하네?’
경호원은 첫 방문 때와 달리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혁을 바로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서 오십쇼. 후보님께서 대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가시죠.”
“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수혁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존 의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떤 일로 날 불렀는지 대충은 알 것 같군.’
세트장과 각종 촬영 기구가 있는 스튜디오에 도달한 수혁은 존이 자신을 왜 호출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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