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다음 날이 되었다. 수업을 마친 수혁은 집에 돌아와서 최필재 팀장과 화상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지오스토리 개발은 어디까지 진행되셨습니까?”
“현재 프로토타입은 완성된 상태고, 간단한 테스트만 진행하면 서비스를 개시해도 될 듯 보입니다. 아마, 11월 초나 중순쯤에는 출시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최필재 팀장은 수혁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예상보다 개발이 빨리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고무적이네요. 사장님, 괜찮으시다면 내일까지 지오스토리의 초안을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몇 가지 검증 과정만 거치면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게 조치해 놓은 상태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필재는 사이트 주소와 접속 방법이 적힌 간단한 문서 파일을 수혁에게 전송했다.
“사이트 주소가 너무 어려운데요?”
“노출 방지와 보안을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중에 지오스토리로 사이트 주소를 수정할 계획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장님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지요. 그럼, 어디 한번 살펴볼까요?”
수혁은 창에 주소를 입력한 뒤 프로토타입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아담에게 보여 줘도 크게 무리는 없겠어.’
그는 지오스토리 서비스를 개시하기에 앞서 레일로의 지원을 받아 낼 계획이었다.
“대표님, 어떻습니까?”
필재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수혁의 피드백을 기다렸다.
“음, 개선해야 할 곳이 몇 군데 보이기는 하지만, 사장님이라면 1주일도 안 돼서 모두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이 외에는 제가 드린 콘셉트안의 내용이 모두 구현되어 있어서 굉장히 마음에 드네요.”
“부족한 부분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필재는 개선 점이 발견됐다는 말에 칭찬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발 기간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팀원들을 너무 닦달하지 마세요. 이만하면 오히려 칭찬을 받아도 될 만한 성과니까요.”
수혁은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필재가 예민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후, 팀원들이 고생한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닦달을 하겠습니까? 대표님. 출시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거지요?”
“주말에 만나기로 한 분이 있는데, 미팅의 결과에 따라서 일정이 정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시는 모양입니다.”
“네, 아담 힐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담 힐즈라…… 설마 레일로의 회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디서 들어 본 이름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필재는 아담이 누군지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훗, 본인이 원래 레일로에서 일했어야 할 운명이었다는 걸 말해 주면 더 놀라려나?’
수혁이 회귀하기 전에 필재의 신분은 레일로의 개발 이사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하여 한국인 엔지니어로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했다.
“케이턴 대학에서 우연히 아담 회장의 딸을 만났습니다.”
“MBA를 같이 다니시나 보군요.”
“눈치가 빠르시네요. 아담 회장의 딸인 루나 힐즈랑 절친한 사이가 돼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레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회원 수를 가진 검색 사이트입니다. 만약 아담 회장을 우리의 우군으로 만들 수 있으면 지오스토리의 성공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수혁은 이번 미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디, 일이 잘 성사되어 우리 회사가 더 번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편하게 물어보세요.”
“지오스토리를 비롯한 SNS 사이트들은 어느 회사가 운영하게 될까요?”
필재는 잠재성이 큰 사업 아이템을 어느 계열사가 가져갈지 궁금했다.
“이런 하마터면 깜빡 잊어버릴 뻔했군요.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요.”
“제가 이야기를 잘 꺼낸 모양입니다.”
“휴, 하마터면 회의를 두 번 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먼저 질문에 답변을 드리면 SNS 사이트는 새로운 법인에서 운영할 계획입니다.”
수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늦어도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영업을 개시하려면 서두르셔야겠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장님께 특별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잠시만요라…… 네, 말씀하시죠.”
필재는 지시 사안을 기록하기 위해 메모장을 실행한 다음 자세를 바로 앉았다.
“10월이 지나가기 전에 서버 관리팀과 콘텐츠 개발을 할 수 있는 인력을 위한 대규모 채용을 진행해 주세요.”
“새 법인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구하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적이면 영어 능력이 출중한 사람 위주로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라면 회화 능력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수혁의 지시를 받아 적던 최필재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보통의 엔지니어라면 분야와 관련된 논문을 읽거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 설립된 회사를 남의 손에 맡기기보다는 제가 직접 관리하고 싶어서요.”
“법인 설립을 미국에다 하시겠다는 겁니까?”
“물론 메인은 대한민국에 두겠지만, 본사와 버금가는 지사를 이곳 뉴욕에 설립하려고 합니다. 인력 충원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에 있는 인재들을 고용하는 거지만, 아무런 바탕도 없이 채용을 진행하는 건 무모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수혁은 미국에서의 낮은 인지도와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 양질의 인재 채용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꽤 자리를 잡았다고 여겼는데,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SH전자까지 고려하면 한동안 바쁘시겠습니다.”
“박유신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셨습니까?”
“파격 승진을 감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쉬우시겠지만, 권성훈 사원을 개발 자원으로만 활용하기에는 그가 가진 능력이 너무 아까워서요.”
수혁이 SH전자 사장으로 발탁한 권성훈은 SH소프트 개발팀에서 근무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되면 저에게 연락을 주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직 전달이 안 됐나요?”
“그게, 권 사원이 시간을 좀 달라고 그랬거든요.”
“SH전자를 맡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이던가요?”
“부정적이라기보단 약간 혼란스러워 보였습니다. SH소프트에 적응하는 것도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제의가 들어온 것이니까요. 동료들과 윗사람들 눈치가 보이는 건 말 할 필요도 없고요.”
필재는 성훈을 매일 보기 때문에 그의 심리 상태를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하긴,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상태에서 이런 제안을 받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지요.”
수혁은 성훈의 심정이 십분 공감되었다.
“당황스러운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팀원들 사이에서 제 말을 가장 잘 알아듣는 친구라 기대가 컸었거든요.”
“사업 팽창으로 인력 유출이 발생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사실, 지오스토리 인력 채용도 엄밀히 말하면 수행하지 않으셔도 되는 업무이지 않습니까?”
최필재 팀장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수혁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닙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릴 수는 없지요. 추가로 더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오늘 말씀드리려던 사안은 모두 전달한 것 같습니다. 사장님 덕택에 마음 편히 미국에 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가게 되면 따로 뵙도록 하죠.”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권성훈 사원은 제가 따로 면담을 해서 이른 시일 내에 연락이 닿을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쇼.”
회의를 마친 수혁은 화상 프로그램을 끄고 생각에 잠겼다.
‘최필재 사장도 많이 변했어. 옛날에는 사회성도 부족하고 무슨 말을 해도 반항적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듬직해졌지?’
수혁은 필재를 영입했을 당시 일어났던 마찰과 갈등 등을 떠올리며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떠올리고 있었다.
‘미국에 지사를 설립하는 건 김건우 사장님이랑 논의하기로 했으니까, 우선은 아담 힐즈와의 만남을 대비하자.’
김건우 사장은 현지 사정에 밝고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지오스토리의 미국 진출을 의논하기에 적격인 사람이었다.
‘2003년이면 아담 회장이 한창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때야. 어떻게 하면 아담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
수혁은 아담 힐즈에게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루나의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좋아, 이거라면 아담 회장도 만족해할 거야.’
아이디어가 떠오른 수혁은 무언가에 홀린 듯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똑
“수혁아 시킬 거 있으면 나한테 맡기고, 일단 밥 먼저 먹는 게 어때?”
찬식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며 말했다. 수혁은 학교 끝나고 바로 화상 회의를 하느라 끼니를 거른 상태였다.
“할 게 많아서 저녁은 건너뛰어야 할 것 같은데?”
“정 그러면 토스트라도 먹는 건 어때?”
“미안하다. 내가 알아서 챙겨 먹어도 되는데…….”
“아니야, 어차피 나도 먹을 거라서 하는 김에 네 것도 만들면 돼. 하던 일 있으면 마저 해. 금방 갖다 줄게.”
찬식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한 후 요리를 하러 갔다.
‘미팅까지 이틀 밖에 안 남았어. 서둘러야 해.’
이날 밤, 수혁은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작업에 몰두했고, 그의 방에서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퍼지고 있었다.
* * *
10월의 어느 토요일, 수혁은 루나의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후, 드디어 만나는구나. 아담 회장이 이걸 보고 뭐라고 할까?’
수혁은 꼬박 이틀을 걸려 만든 기획안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긴장감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번 만남의 결과에 따라 회사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냐 없냐가 결정됐기에 그가 느끼는 긴장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이렇게 생각만 해 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들어가자.’
결심을 굳히 수혁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딩동
“어서 와. 바로 옆에 있으니까 엄청 편하지?”
벨을 누른지 얼마 있지 않아 루나는 문을 열고 수혁을 맞이했다.
“안 본 새에 집이 좀 달라졌네?”
“응, 내 취향대로 나름 꾸며 봤어. 어때?”
루나는 최신 가전제품과 수입 가구를 들여 다소 허전해 보였던 거실과 부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확실히 이전보다 꽉 찬 느낌이 들어서 훨씬 나은 것 같아.”
“사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이번에 거래한 업체가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나쁘지 않더라고.”
“나중에 살 일이 있으면 너한테 물어볼게. 그나저나 회장님은 도착하셨어?”
“아빠는 지금 내 방에서 직원이랑 통화 중이야. 소파에 좀 앉아서 쉬어, 통화가 끝나려면 아마 5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루나는 어색하게 서 있는 수혁을 소파로 안내했다.
“커피라도 마실래?”
“식사 끝나면 마실게. 고마워.”
“으휴, 편안하게 좀 있지. 뭘 그렇게까지 하고 있어?”
“…….”
수혁은 갖고 온 기획안을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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